[김집사의 공공사사(公共私事)] 꼭두각시의 유머, 소오강호의 비웃음
(CNB저널 = 김집사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文來堂 연구원)
홍유손과 가르강튀아
홍유손(洪裕孫)은 은둔한 군자다.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고상한 행적으로 명성과 이익에 간여하지 않았다. 한번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 똥을 누었는데, 똥이 마치 새끼줄처럼 길게 늘어져 언덕 아래에까지 닿았다. 여러 아이들이 모여서 보고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홍유손은 그 똥을 끌어당겨 뱃속으로 도로 집어넣었다.(어우야담)
마담 그랑구지에르는 임신 후 내장 요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수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 약이 너무 독해 태반엽이 풀려버렸고, 태아인 가르강튀아(Gargantua)는 정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맥을 타고 올라 어머니의 귀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16세기 조선의 야담과 16세기 프랑스의 소설, 유몽인(柳夢寅)과 라블레(Rabelais)의 시대는 행복하다. 그럴듯하고 있음직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은 19세기 이래의 것이다. 여기는 그러한 강박에서 해방된 세계, 아니 그러한 강박이 애초 발명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그래서 반대로 그럴듯하지 않고 있음직하지 않게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없는 세계이다. 사실임 직한 것과 사실임 직하지 않은 것, 사소한 것과 거대한 것,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역사와 설화, 알레고리와 웃음이 ‘선악의 저편’에서 자유로이 뒤범벅된 세계이다.
꼭두각시와 유머
16세기 조선의 문인으로 방외인(方外人: 아웃사이더)의 기질을 지녔던 나식(羅湜, 1498∼1546)은 민중연희인 꼭두각시놀음을 보고 지은 ‘괴뢰부(傀儡賦)’에서 “그 거짓됨에 즉하여 진실함을 상상하고, 그 사소한 것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것을 깨닫는다(卽其僞而想眞, 因乎細而悟大)” 하였다. 거짓과 진실, 사소한 것과 거대한 것이 서로 얽혀 있다. 꼭두각시는 인간세상의 알레고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떤 ‘타자’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혹시 꼭두각시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혹시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아닐까?
사실적이지 않은 과장과 허풍,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는 자기인식, 여기서 ‘유머’가 발생한다. 사실은 진실이 아니고 자신은 주체가 아닐 수도 있는 감각이다. 진짜와 가짜의 사이, 그 너머에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주체와 타자의 사이, 그 너머에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며, 선과 악의 사이, 그 너머에서 대상과 자신을 낯설게 바라본다. 유머는 사실적 재현과 단일한 주체, 도덕적 판단이 제각각 중지된 상상적 장소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옥타비오 파스는 유머가 자신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하였다. 아울러 유머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높은 곳(메타 레벨)으로부터 내려다봄으로써 발생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유머를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격려하는 것이라 하였다. 유머는 대상과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낯설게 내려다보는 태도이다.
▲조선시대의 민중연희 '꼭두각시 놀음'. (사진=위키미디어)
오세(傲世)와 소오강호(笑傲江湖)
앞서 유몽인이 인용한 일화의 주인공인 홍유손(洪裕孫, 1431∼1529)은 조선 전기에 실존했던 문인이다. 1453년(단종 1년)에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발하자,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졌다. 유몽인은 그러한 그를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고상한 행적으로 명성과 이익에 간여하지 않았다”라고 고평한 것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또한 계유정난으로 세상을 등진 문인이다. 유몽인은 그러한 그를 “5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스스로 오세(五歲)라는 호(號)를 붙였는데, 오세(傲世: 세상을 오만하게 여긴다)와 음이 같았다”라 묘사하였다. 유자(儒者)이면서도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에 몸을 의탁하고 기성의 질서를 오만하게 비웃었던 그의 자호(自號)답다 하겠다.
여기서의 오만(傲慢)은 을에 대한 갑의 거만(倨慢)함이 아니라 갑에 대한 을의 오연(傲然)함이다. 부정의한 권력에 대한 오연함이다. 강고하고 흉폭한 세계에 대한 오연함이다. 공자는 이러한 인간형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라 칭하였고 유몽인은 이러한 인간형을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겨루었으니 위대하도다”라 칭송하였으며, 헤밍웨이는 이러한 인간형을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노인과 바다')라 평가하였다. 이것이 오연함으로서의 오만함이다.
홍콩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김용(金庸)의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는 그 제목이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는다는 뜻이다. 김시습의 ‘오세(傲世)’와 같다. 주인공 영호충(令狐沖)은 정인군자와 싸우더라도 부득이할 때는 몰염치하고 비열한 수단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사부 풍청양(風淸楊)은 크게 기뻐 낭랑히 말하였다. “좋다. 좋아! 네가 그같이 말하는 것을 보니 착한 척하는 위선자는 아니구나. 사내대장부는 행함에 있어 모름지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흐르듯 마음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무림의 규칙이나 문파의 계율이라는 것은 모두 개방구 같은 소리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초상. (사진=위키미디어)
유머와 웃음, 해방감과 쾌감
진짜와 가짜, 주체와 타자, 선과 악의 저편에서 자신을 낯설게 내려다본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묘한 쾌감과 해방감을 준다. 자신의 죽은 몸을 자신이 쳐다보듯, 자신이 묻힌 무덤을 자신이 쳐다보듯. 마찬가지로 세상을 오만하게 비웃고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는 것은 타인에게 묘한 쾌감과 해방감을 준다. 모든 주류적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모든 관습적 질서가 송두리째 리셋되어버릴 것 같은.
유머와 웃음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드문 정신적 태도이다.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일반적 기준에 따라 기성의 가치와 질서에 안주하는 것이 더 편안하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머와 웃음을 맛본 순간,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된다. 거짓이 오히려 진실이고 내가 더 이상 나인지 확신하지 못하며 옳지도 그르지도 않고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모호한 회색지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해방감과 쾌감에 전율한다. 해방감 속에서 조금은 불편해지고 쾌감 속에서 조금은 불안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감수한다. 이러한 해방감과 쾌감은 그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열반(涅槃)이자 열락(悅樂)이기 때문이다. 지극한 즐거움이다.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