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도쿄 → 키타카미·요코테 환승 → 아키타)
이젠 한국에 온 거나 마찬가지
ANA항공으로 미국 LA를 출발, 11시간 30분 걸려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5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은 참으로 멀다. 이 먼 길을 언제 또다시 다녀올 수 있을까 싶어서 이번에는 아예 미국 서부 일주를 기획했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니 한국 같은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가 맞이한다. 사람들 생김새까지 같으니 공항 터미널을 나와 인파에 섞여 버리면 한국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 편하다.
JR 전국 패스
일본 열차 여행을 하려면 패스가 필요하다. 나는 한국에서 구입한 JR 전일본(全日本) 패스 7일권(2만 7655엔, 약 30만 원)을 사용한다. 하네다 공항 JR 서비스 사무소가 문 열기를 기다려 JR패스 교환권을 실물로 바꾼다.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츠초(浜松町)로 나가 JR 야마노테(山手)선으로 환승하여 도쿄역에 도착한다. 미국 서부에서 갓 건너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도시가 빽빽하게 느껴진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하얀 상의에 검은 바지를 입은 샐러리맨들로 플랫폼이 가득 메워진다.
▲아키타 가는 길. 열차 밖 풍경이 마치 한국 시골을 달리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 = 김현주
단칸 로컬 열차
도쿄 역 지하 공간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지하 공간 활용에 관한 한 일본은 세계에서 으뜸일 것이다. 뉴욕에 이어 세계 2위 경제 규모 도시임을 실감한다. 도쿄 역에서 모리오카(盛岡) 행 신칸센에 탑승하여 후쿠시마(福島), 센다이(仙台)를 지나 이와테 현(岩手県) 키타카미(北上)에 도착한다. 487km를 달려왔다.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파랗다. 한 시간 후 키타카미 선(北上線) 단칸 로컬 열차로 바꿔 탄다. 모든 역마다 정차하니 답답할 수 있으나 신칸센 고속열차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여유와 낭만이 있어서 좋다.
▲벼가 익어가는 아키타 들녘. 아키타 쌀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사진 = 김현주
디젤 동차의 추억
디젤 동차의 경쾌한 엔진소리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서울 근교 일영, 송추에 갈 때 탔던 서울교외선 열차 소리 바로 그것이다. 느린 열차는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의 산촌 풍경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열차는 곧 험준한 산악 지대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강원도 오지보다 더 깊은 산중이다. 요코테(横手)에서 또다른 로컬 열차로 환승하여 아키타(秋田)를 향하여 오늘의 마지막 여정을 이어간다.
열차는 쌀이 익어가는 너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질 좋은 토양과 넉넉한 물, 그리고 큰 일교차 때문에 맛있기로 소문난 아키타 쌀이다. 열차 밖 풍경은 한국과 너무 비슷해서 순간순간 한국의 어느 시골 산하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일 두 나라는 이렇게 비슷한데도 서로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아키타 도착, 숙소에 체크인하여 고된 장거리 항공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푼다.
2일차 (아키타 → 니가타·조에쓰묘코 환승 → 도야마)
지루할 틈 없는 철도 여행
비오는 아침이다. 내 몸에 익숙한 습도 높은 여름 날씨를 만나니 미국 서부의 건조한 사막 날씨에 까칠해졌던 피부가 윤기를 되찾는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출근하는 시민들과 마주친다. 여성들의 용모가 눈길을 끈다. 미인의 고장으로 유명한 아키타 아닌가?
이나호(いなほ) 특급열차에 올라 니가타(新潟)로 향한다. 열차는 곧 동해(일본해)를 만난다. 여기서 저 바다를 곧장 건너면 아마도 북한 땅 함경남도 어디쯤 도달할 것이다. 동해를 오른쪽에 끼고 야마가타 현(山形県)을 종단하여 계속 남서진한다. 우리나라 영동선, 묵호-강릉 구간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니가타까지 273km, 3시간 40분이 지루할 틈이 없다.
▲니가타 부근 동해 바다. 저 바다 멀리쯤에 북한 함경남도 지역이 있을 것이다. 사진 = 김현주
사연 많은 니가타
니가타는 인구 81만, 일본 서해안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다. 쌀과 사케로 유명하고, 우리에게는 북송선이 떠났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제 말기 강제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은 평소 다녔던 부산-시모노세키 항로 대신 원산-니카타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항로에서도 번번이 일본 경찰의 물샐 틈 없는 그물망에 걸렸다는 얘기를 김준엽(金俊燁) 선생의 ‘장정’(長征, 2003, 나남출판)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와 여러모로 얽힌 도시임에 틀림없다.
5대 개항지
1858년 미일수호통상 조약으로 강제 개항한 5개 도시(하코다테 函館, 니가타 新潟, 요코하마 横浜, 고베 神戸, 나가사키 長崎) 중 하나로서 개항 이후 급격히 발전했다. 볼 것 많은 도시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조에쓰묘코(上越妙高) 행 열차로 서둘러 바꿔 탄다. 열차가 뜸한 이곳에서 다음 열차는 서너 시간 후에야 있기 때문이다. 조에쓰묘코에서 호쿠리쿠(北陸) 신칸센 열차에 탑승, 40분 걸려 110km를 달리니 오늘의 숙박지 도야마(富山)다.
시간 정확한 일본 열차
참고로, 여기쯤에서 일본 혼슈 일주 열차 여행 기획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일본 철도는 매우 합리적인 스케줄과 그물망 노선으로 대도시와 전국 구석구석을 이어준다. 이번 일주 여행은 일본 열차 검색사이트(www.hyperdia.com)에서 검색한 결과를 바탕으로 나만의 여정을 만들어 실행 중이다. 지금 일주하고 있는 일본 서해안은 워낙 오지이다 보니 직통으로 연결되는 구간이 거의 없어서 자주 환승을 해야 하는 것도 이번 여정의 특징이다. 당초 계획을 짤 때는 5분 미만의 빡빡한 환승 스케줄이 가끔 있어서 걱정도 했으나 거의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일본 열차는 신칸센부터 벽지 단칸 열차까지 출발과 도착이 매우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국민성이기도 하거니와 시스템의 우월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시스템은 연륜과 노하우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실감하며 일본 시스템에 새삼 놀란다.
▲도야마 역 앞. 도야마는 화학, 약품 공장이 많아 2차 세계대전 때 철저히 파괴됐다. 지금은 징그러울 정도로 말끔히 복구됐다. 사진 = 김현주
여름 저녁 지방 소도시 풍경
숙소에 여장을 풀고 도야마 도시 탐방에 나선다. 일본의 알프스로도 유명한 도야마는 화학, 약품 공장이 많아 2차 세계대전 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어 깔끔한 도시로 거듭났다. 현청(県庁)앞 공원을 지나 조시(城祉) 공원을 찾는다. 어디를 가도 징그러울 정도로 깨끗한 일본… 이 깨끗함, 이 정돈감을 어쩌란 말인가? 태어나서부터 이런 문화에 익숙한 일본인들이야 불편할 것 없겠으나 한국인인 나에게는 꼭 편리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고즈넉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조용한 여름 저녁, 지방 소도시 풍경을 차라리 즐긴다. 이따금 지나는 트램만이 도시의 유일한 소음이다. 진즈(神通川) 강가에서 도시 산책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