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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 - 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 내가 뛰놀던 유란동에 겸재 태어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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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71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1.22 10:22:43

▲현재의 경복고등학교 자리(그림 오른쪽 아래)부터 서울도성의 북문 격인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한다)까지 이어지는 길을 겸재가 그린 창의문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겸재를 따라가보는 길의 첫 번째는 이 길을 따라 시작된다.


2010~2014년간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칼럼을 연재한 바 있는 옛길 답사가 이한성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가 새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 걷는다. 정선(1676∼1759년)의 그림을 보고 감흥을 느끼지 않는 한국인이 없을 정도로 그의 그림에는 시원함과 선 굵은 미학이 있다. 더구나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대에 그는 몰락 양반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끼니를 건너뛰는 적이 많았지만, 자신은 화가라는 뚜렷한 자각을 갖고 중국화와 차별되는 독특한 한국화풍을 이뤄낸 인물으로서도 의미도 크다. 붓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한국의 선(線)과 미(美)를 창조하며 일세를 풍미한 겸재 정선의 그림을 들고 이 교수를 따라 걷기에 나서본다. <편집자 주>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시작하며

2004년이었던가, 간송(澗松)미술관에서 겸재 전시회가 열렸다. 미술학도들,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 교양에 목마른 이들이 많이 모였었는데 그중에는 그림에 문외한인 필자도 끼어 있었다. 그때 필자에게 더 궁금증을 일으킨 것은 죄송스럽게도 그림의 예술성보다 그 그림들의 배경이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그린 그림들은 처음 보는 그림임에도 낯설지 않았다.

10대 학창시절을 그 두 산을 놀이터 삼아 지낸 나나 우리 친구들에게는 놀던 마당이었으니 그저 그리울 뿐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골짜기에 우리가 모르는 정자(亭子)며 멋진 집들이 300여 년 전에 그렇게 많았다니.

수균이가 살던 윗동네에 청휘각이 있었고, 영수와 석신처럼 쎈 친구들이 바위타기 훈련을 하던 그 바위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배경이라니. 수성동에 기린교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코앞에 살던 규용이가 생각났고, 백세청풍(百世淸風) 청풍계에는 형기네 하숙집이 생각났다. 방과 후에는 때때로 작당을 해서 교칙에 하지 말라는 일도 슬그머니 해보던 그곳이 알고 보니 청풍계였다.

▲겸재의 명작 ‘인왕제색도’의 무대가 되는 인왕산과 경복궁이 표시된 옛 지도. 필자가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렇게 궁금해서 겸재의 그림에 나타난 인왕산과 들어갈 수는 없지만 북악의 변두리를 다니고, 이제는 서촌(西村)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우대(웃대)를 다시 가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간송에 최완수 선생의 겸재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기에 큰 고생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겸재 그림 속 길’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서 시작한 인왕과 북악을 거쳐, 양천팔경(陽川八景)을 중심으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속 그림 길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그려진 임진강을 다녔다. 

불행히도 하양현감(河陽縣監) 시절 그린 그림들이 ‘영남첩’이라 하는데 ‘쌍도정도’ 이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쉽다. 다행인 것은 청하현감(淸河縣監) 시절 그린 동해안의 명승지들을 비롯해, 손자 정황의 작품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의 의미있는 곳들도 다녀보려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금강산이다. 겸재는 3번의 금강산 탐승(探勝)길에 올랐는데 그때마다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아쉽지만 통일을 기약하자.

본 연재는 겸재의 생가터에서 시작하여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잠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방학동, 쌍문동)를 그린 손자 정황(鄭榥)의 그림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에서 끝맺으려 한다. 이제 정선의 그림 속 길을 걷겠습니다. 걷는 이에게 행운이 있으시기를.


① 창의문 길 上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를 출발한다. 그 동안 걸어보지 않던 경복궁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경복궁 담을 끼고 북악산 방향으로 올라가려 한다. 옛지도에는 적선방(積善坊)에서 의통방(義通坊)으로 가는 길이다.

68년까지는 효자동 종점까지 전차가 다녔는데 그때는 이 길이 서울에서 은행나무 가로수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최고의 아베크 길이었건만 68년 김신조 일행이 넘어오면서 민간인은 접근하기도 무시무시한 공포의 길이 되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이다. 동쪽 문이 건춘문(建春文)이니 짝을 맞춘 것이다. 동양에는 오행(五行)사상이 있는데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오행이라 하고, 계절로는 춘하(春夏), 바뀌는 계절(間季), 추동(秋冬)으로 오행을 삼고, 방위로는 동남중서북(東南中西北)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따라서 동(東)은 춘(春)이며 서(西)는 추(秋)가 되어 건춘문 영추문이 되었다.

오늘 첫 번째로 찾아가려는 목적지는 쌍홍문터다.

이곳 지명 효자동이 있게 한 유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번 위치는 자하문로 24길 519(효자동 172-1)인데 경복궁 담이 끝나는 곳 400여m 전 지점에서 담을 버리고 길을 건너면 서쪽으로 가는 2차선 정도의 차로가 열려 있다. 이곳에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한 경찰관이 서 있으니 길을 물으실 것. (만약에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통인시장 방향으로 올라왔다면 자수교회 지나 세븐일레븐 골목으로 들어오면 된다)

길 안쪽에는 화이트하우스라는 건물이 있고, 건너편에 성주빌라라는 복합주택이 보인다. 이 빌라 코너에 ‘쌍홍문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이렇게 써 있다.

“쌍홍문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조원(趙瑗, 1544~1595)의 두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내린 한 쌍의 정려문(旌閭門)이다. 효자동이라는 동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아쉽게도 너무 간단해서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궁금증을 누르고 골목길로 들어간다. 옆으로 뻗은 작은 골목 막다른 집에 해공구가(海公舊家)라는 나무판을 붙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사시던 집을 만난다.  

궁정동 그날과 김상헌의 충절이 한 자리에

코흘리기 시절,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사람들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었지.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그 당시는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하는 구성진 노래가 유행을 타던 시기라서 이런 노래가 패러디 되었다.

먹고 살기는 힘들고 자유당 행태는 눈뜨고 보기 힘드니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마음을 달랬다. 이런 마음이 쌓이면 결국은 큰일이 생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길 주장한 청음 김상헌을 기리는 시비와,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사진 = 이한성

이제 골목을 빠져 나오면 무궁화동산이다. 유신 시절, 안가들이 있어 암담했던 땅이다. 유신을 끝맺은 그 어두운 일도 이곳에서 있었다. 이곳이 본래 음침했던 땅이었던가? 아쉽게도 그런 곳이 아니었다. 공원 북서쪽 끝에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 선생의 시조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고 그 분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집터에서 벌어진 유신의 종말을 고한 그 총성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역사적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이 터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청음 김상헌 선생은 정묘호란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명(明)에 원병을 청하러 갔었고,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 항전에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전파(主戰派)의 선봉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후 현장이 된 이른바 ‘궁정동 안가’는 사라지고 이제 공원이 됐다. 역사적 평가는 어쨌든, 역사의 현장은 보존돼야 하는 것 아닌가? 사진 = 이한성

그렇다 보니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는 극심한 대척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김상헌이 죽어서 영원히 살고자 했다면, 최명길은 사직을 위해 살아서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주제를 벗어나 긴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다 청나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럴지라도 만약 우리 시대에 이런 지도층이 이 땅의 미래를 맡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No다.

청음은 청나라에 억류되어 고초를 겪으면서 집 생각으로 한 가닥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그 기록이 청음집에 근가십영(近家十詠: 집 주변를 생각하며 쓴 10편의 시)으로 권11에 전해진다. 목멱, 북악, 인왕, 청풍계, 백운동, 대은암, 회맹단, 세심대, 삼청동, 불암을 노래했는데 그 중 북악산을 읊은 칠언율시의 일부를 읽어 보자. 집이 많이 그리웠나 보다.

임금 가마 때때로 경회 못에 납시는데  
龍輿時出慶會池
천암만학 앞 다투어 기이함을 다투누나  
千巖萬壑爭效奇
나의 집은 바로 그 산 아래 있거니  
吾家住在此山下
그리운 곳 그곳으로 어느 날에 돌아갈고  
願言思之何日歸
(고전번역원 번역을 본으로 해서)

▲효자동이라는 지명을 만들어준 운강 조원을 기리는 운강대 각석 역시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에 있다. 사진 = 이한성

눈 앞에는 청와대 경내로 조선기와 건물들이 보인다. 아들은 임금이 되었건만 후궁이라는 신분 때문에 대접 받지 못하는 7분 후궁의 영혼을 모시는 칠궁(육상궁)이다. 들어갈 수 없으니 방문은 언젠가 청와대 방문 신청을 거쳐 가보기로 하고 골목을 접어들어 경복고등학교로 향한다. 이 학교 교정에는 겸재 정선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畵聖 謙齋 鄭敾의 집터’(화성 겸재 정선의 집터)라고 쓰고 인곡정사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겸재의 자화상 讀書餘暇(독서여가)가 새겨져 있다.

겸재에게는 장동 김씨와 인연이 있었으니

겸재는 유란동(幽蘭洞, 지금 청운동 89 경복고등학교 지역)에서 1676년(숙종 2년) 다 망해가는 한천(寒賤)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한다. 다행히 이웃에 살던 당대 최고 명문 가문 장동 김씨(壯洞 金氏) 김창집 등 이른 바 6昌 집안과는 6창의 고조부 김극효(金克孝)와 겸재의 고조부 정연(鄭演)이 같은 구로회(九老會) 회원이었기에 선대의 각별한 인연에 힘입어 그 문하에서 공부도 하고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한다. 6창은 청음 김상헌의 증손 6형제를 말하는데 청음 때부터 수집한 많은 서화(書畵)를 수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이기도 하였다. 특히 특별한 그림 스승이 없던 겸재에게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좋은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림에 눈뜨고, 벼슬길에 나선 겸재는 곧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에 그려진 그림들이나 인왕 백악을 그린 그림들은 이들 장동 김문과 관련 있는 곳이거나, 함께 공부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벗들과 연관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학교 교정에는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각석들이 있다. 교정에서 교문 쪽으로 잠시 내려오다 보면 雲江臺(운강대)라고 쓴 단아한 해서체의 각석이 보인다. 그 옆에는 이 학교 31회 졸업생들이 1956년 세운 운강대의 내력을 설명한 孝子遺址(효자유지) 비석이 서 있다. 이 지역이 효자동이 된 내력을 알게 하는 중요한 각석인 셈이다.

운강(雲江)은 조선조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선조 때 이조 좌랑과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호(號)이다. 이곳이 그가 살던 집터였기에 누군가가 운강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글자가 운강대인 셈이다.

효자동 이름에 얽힌 사연

운강 조원에게서 비롯한 두 가지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효자동의 내력에 관한 것이다. 

선조 연간에 임진란이 일어났다. 운강의 아내는 전의 이씨인데 판서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이준민은 남명 조식의 외조카이니 명문 집안의 규수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난리가 나자 큰아들 희정과 둘째 희철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왜적을 만나 큰 아들은 즉사하고, 둘째도 큰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두 효자를 기려 두 개의 정려문을 내렸으니 이것이 바로 쌍홍문이다. 이런 내력으로 이곳이 쌍효자골 또는 효자골로 불리다가 효자동이 되었다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조원과 그의 소실 옥봉(玉峯)에 관한 것이다.

옥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의 한 사람으로 옥천군수 이봉지(李逢之)의 얼녀(孼女: 천민에게서 난 딸)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에게 사랑 받았으며 글을 배우면서는 총명함이 뛰어났다. 그러나 신분상 양반집 정실이 될 수 없어 아버지 이 군수는 딸의 좋은 배필을 구하려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인품 있고 학식 있는 운강 조원을 알아보고 딸을 소실로 받아 주기를 청했으나 운강은 거절하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소실을 두는 일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에 옥봉의 아버지는 조원의 장인 이준민에게 청하여 옥봉을 조원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다. 결혼은 힘들었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던 것 같다. 특히 조원이 외직 삼척부사로 나갔을 때는 옥봉도 따라갔는데 그 때 지은 시를 보면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도 한 순간의 실수로 사라져 버린다.

이웃에 사는 어떤 여인이 남편이 억울하게 소도둑으로 몰렸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느라 시 한편 써서 들려 보냈다. 여인은 이를 고을 원님께 가져 갔는데 이 글을 읽은 원님이 그 남편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제목 : 爲人訟寃 위인송원: 
남의 억울한 송사를 위하여)​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낯을 씻으며 대야를 거울로 삼고
梳頭水作油 (소두수작유)  
머리를 빗으며 물을 머릿기름으로 씁니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제가 직녀가 아니니
郎豈是牽牛 (낭기시견우)  
남편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

제가 직녀가 아닌데 어찌 제 남편이 견우(소 끌고 가는 도둑)이겠느냐? 재치있게 결백을 주장한 것이다.

이 일이 조원에게 알려졌다. 마침 벼슬길에 다시 돌아간 상황에 있던 조원은 나라의 송사에 소실이 끼어든 것이 알려지면 당파싸움에 빌미가 될 위험성이 농후했던 것을 알았기에 옥봉은 내침을 당해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녀는 다시는 운강을 만나지 못했고 임진란 중에 사망했다 한다.

빼어난 여류시인 옥봉을 기리는 전설

이런 그녀의 삶과 빼어난 시는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하여 전설이 되었다.

조선의 스토리텔러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옥봉의 전설이 각색되어 전해진다. 아마도 그 시절에 떠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이옥봉 시집이었다. 옥봉은 부친 조원의 첩.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 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임진란 중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빼어난 여류시인을 그리워하니 아마도 전설이 되었나 보다.

허균은 시화집(詩話集) 성수시화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許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 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또한 맑고 씩씩하여 지분(脂粉: 여자 느낌)의 태가 없다. 

家姊蘭雪一時 有李玉峯者 卽趙伯玉之妾也 詩亦淸壯 無脂粉態”고 했다. 

조원의 현손 조정만(趙正萬)도 선대의 문집을 엮으면서 소실 할머니 옥봉의 시 32편을 모아 부록을 엮었다. 운강대 앞에서 그 시대를 살다간 한 여인이 짠하게 마음속에 파고든다.(다음 편에 계속)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걷기 코스: 경복궁역 ~ 영추문 ~ 쌍홍문터 ~ 무궁화 동산(김상헌 집터) ~ 경복고 ~ 경기상고 ~ 백운동천 ~ 자하동 ~ 창의문 ~ 한양도성 ~ 해골바위 ~ 기차바위 ~ 홍지문 ~ 옥천암/보도각 백불.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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