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위기 속 ‘워라밸’ 강조한 이유
5시에 불 끈다지만…판매사원은 딴나라 얘기
▲(왼쪽부터) 서울 중구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 본점 모습. 사진 = 각 사
(CNB저널 = 김주경 기자) 소비침체와 실적악화에도 불구하고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 유통 3사를 중심으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업무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에 더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가 맞물리면서 업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근로시간이 길어야 업무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얘기는 옛말이 되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2017 고용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근로자 한 명당 연간 근로시간은 평균 2069시간으로 집계됐다. 멕시코(2255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많고, OECD 35개국 평균(1764시간) 보다 305시간 더 많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긴 노동 시간은 외려 생산성을 낮춘다고 지적한다. 충분히 쉬어야 일도 잘 된다는 얘기다.
휴식이 생산성을 높인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근무시간 줄이기’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유통업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유통기업 수장들의 신년메세지는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워라밸·욜로(You Only Live Once) 등 트랜드의 흐름을 빠르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고,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직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조직문화 개선”이라고 설명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오프라인 1등 유통기업을 넘어서, 파격·혁신을 통한 세상에 없는 일류기업의 도약”을 천명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를 뿐 하나같이 ‘쉼을 통한 업무효율’을 강조한 것이다.
국회와 정부도 기업들에게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있다. 대형마트에 적용하고 있는 의무휴업을 복합쇼핑몰에도 적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이런 가운데 신세계는 올해부터 주 35시간 근무체제로 개편했다. 대기업 중에서는 처음이다. 5시 정시퇴근을 유도하고자 신세계백화점은 5시 20분, 이마트와 신세계인터내셔널은 5시 30분이면 업무용 PC가 자동으로 꺼지는 ‘PC 셧다운제’를 도입했다.
업무 특성에 따라 유연근무제도 가능하도록 했다. 가령 당직 등의 이유로 새벽 6시에 출근한 사람은 오후 2시에 퇴근한다.
신계계 관계자는 CNB에 “오후 5시 퇴근 분위기가 정착될 수 있도록 임원과 팀장들부터 직원들과 함께 퇴근하고 있다”며 “홍보나 영업부서 등 업무 특성상 등 근무시간이 길었던 부서도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11월부터 PC온오프제를 시행 중이다. 오전 8시 30분에 회사 컴퓨터가 켜지고, 오후 6시 30분이 되면 자동으로 꺼진다. 불필요한 야근을 없애고 업무효율을 높이자는 취지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이 1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최저임금 지키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롯데쇼핑 관계자는 CNB에 “제도 도입 초기에는 직원들이 어색해했지만, 이제는 근무시간 내 업무를 마감하다보니 집중도가 높아졌다”며 “퇴근 이후 출입기자들과 저녁약속이 잦은 홍보부서도 지금은 곧장 퇴근해 개인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는 이밖에도 육아휴직 개선, 연차 확대, 유연근무제 등 다양한 복지제도를 추진 중이다.
현대백화점은 2014년부터 이미 PC온오프제를 시행하고 있다. 본사는 오후 6시, 점포는 오후 8시 30분에 자동으로 PC 전원이 꺼진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 9월 ‘2시간 휴가제’를 업계 최초로 도입한데 이어, 올해부터는 남성직원들도 자녀양육에 적극 동참할 수 있도록 ‘남성 육아 참여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1년간 육아휴직 시 3개월간 통상임금 100% 전액을 보전 받을 수 있으며, 자녀출산시 최대 1개월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CNB에 “일·가정 양립 문화가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부터 ‘워라밸 경영’을 실천해왔다”며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도 행복하다는 ‘사람 중심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체로 긍정…일부에선 잡음도
근로자들은 이런 변화에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근무시간이 1시간 정도 줄다보니 운동이나 어학공부 등 자기계발 할 시간이 늘게 돼 회사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반면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한 유통사 직원은 “근무시간이 짧아져 잠깐 커피 한 잔 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도 눈치를 보게 된다”며 “업무는 많고 일할 시간은 부족해 일거리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노동계 일각에서는 근무시간 단축이 인건비를 줄이려는 꼼수라며 비판하고 있다. 최근 최저임금이 크게 인상돼 야근 수당 등 비용부담이 커지자 워라밸을 구실 삼아 인건비 축소에 나선 것이라는 주장이다.
마트산업노조 관계자는 CNB에 “유통3사들이 실적 하락에다 인건비 부담까지 커지자 워라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며 “더구나 근로시간 단축은 판매직 직원들에게는 먼나라 얘기”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유통기업들은 워라밸과 인건비 문제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한 유통대기업 관계자는 “원래 계약서에 명시된 업무시간이 하루 8시간이고, 이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최저임금 인상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새로운 기업문화가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잡음도 일고 있다. 달라진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함께 관련 제도들이 정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세현 경영컨설턴트는 “유통업계에는 근무시간 단축이 적용되지 않는 판매(영업)직의 비율이 많은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며 “판매직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등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주경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