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사직단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근간이 되는 나라의 중요 시설이었건만 나라 잃은 조선의 사직단은 무기력하게 일제(日帝)에 의해 농단되었다. 일제로서야 조선의 사직단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1920년 이곳을 공원화했다 한다.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침탈된 나라의 역사는 부인되었다. 이제 늦었지만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사직단 뒤쪽 층계를 오르면 종로도서관이 보이고 마을버스가 다니는 구불구불 한적한 포장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좌측으로 향하면 인왕산으로 가는 길인데 잠시 뒤 한 200여m 나아가면 비스듬 언덕길에 황학정(黃鶴亭)이 길을 막는다. 국궁(國弓)을 쏘는 활터다. 혹시나 화살이 날아올까 지붕을 덮은 길로 잠시 오르면 드디어 단아한 한옥과 정자가 자리 잡고 있는 황학정 활터에 닿는다. 친절한 설명문이 붙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5호이며 광무2년(1898년) 고종의 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는데 고종이 자주 와서 활을 쏘았고 일반에게도 개방했다 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헐리고 황학정 자리에 전매국 관사가 들어서면서 1922년 황학정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고종이 활 쏘던 황학정과 명사수 정조
원래 이 자리는 인왕과 북악 주변에 자리 잡았던 5개의 활터(五射亭: △옥인동 登龍亭 △누상동 白虎亭 또는 風嘯亭 △사직동 大松亭 또는 太極亭 △삼청동 雲龍亭 △이곳 登科亭)의 하나인 등과정(登科亭)터였다 한다. 지금도 이 등과정의 표석이 황학정 뒤 인왕산 오르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다. 등과정(登科亭)이란 이름을 보면 그 시대 무과(武科)에 응시하려는 무인들의 과거에 급제하고픈 간절한 열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 황학정에 가 보니 건강과 스포츠로 활쏘기를 즐기는 이들이 사대(射臺)에 죽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세월의 간극(間隙)이 참으로 크구나.
그러면 황학정을 만드신 고종께서는 활을 잘 쏘셨을까? 명사수였는지는 전해지는 내용을 찾지 못하여 알 수 없으나 활쏘기를 무척 즐기셨던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3월에 고종이 창덕궁 영화당 앞에 과녁을 마련하였음을 보도하고 있다. 또 지금도 고종이 쓰던 활 호미(虎尾)가 육사에 있는 육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면 조선의 임금 중 명사수는 누구였을까? 태조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명사수였다는 이야기가 바람결에 전해지는데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고, 임금은 아니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솜씨는 어떠했을까? 난중일기를 검토한 분들에 의하면 적중률이 8할 정도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임금은? 그 중 최고 명사수는 누구였으며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 있다. 정조의 일성록(日省錄)이다. 왕 16년(1792년) 10월에 초계문신 등 신하들과 함께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내가 10순을 쏘아 46발을 과녁에 맞추었다(予射十巡獲四十六矢)’라는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순(巡)은 다섯 발로 10순을 쏘는 것이 룰이었다 하니 정조는 50발을 쏘아 46발을 맞춘 것이다. 그것도 정조는 과녁 큰 것이 싫어 손바닥만한 작은 과녁(掌革, 小革)을 만들도록 해서 쏜 결과이니 특등 사수였던 것이다.
그러면 함께 한 신하들은 어떠했을까? 6명이 각각 50발을 쏘았는데 13발, 5발, 4발, 2발, 나머지 2인은 1발에 그쳤으니 아마 임금 앞에서 속된 말로 오금도 못 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찬탄의 글(箋文)을 올려 부끄러움을 얼버무렸는지도 모르겠다.
빼어나고 기이하옵니다 (以純以奇)
송축할 뿐입니다. 전하 화살의 신묘한 조화를(頌箭紅之神造).
정조의 활쏘기 기록은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정조대왕천릉지문(正祖大王遷陵誌文)의 기록은 더 드라마틱하다.
“활쏘기에 천분이 있으셔서 50발 중에 문득 49발을 명중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된다 하셨다(其於射藝, 得於天分, 五十發輒四十九中, 曰: 物不可盈也).” 이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아마도 50번째 화살은 맞추지 않았던 것 같다. 정조, 여백을 남기는 참 멋있는 사나이였다.
그러면 조선의 임금들은 활쏘기가 취미였던 것일까? 공자도 활을 쐈듯이 취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나라나 한나라에서는 남자 나이 15, 16세가 되면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한 사람의 인격체(선비 士)가 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 교육의 내용이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였다.
육덕은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를, 육행은 효우목인임휼(孝友睦婣任恤)를, 육예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배우는 것인데 특히 육예는 실용 교육이었다. 에티켓(禮)을 배우고, 음악(樂)을 배우고, 활쏘기(射)를 배우고, 마차 운전(御)을 배우고, 글과 글씨(書)를 배우고, 수학과 천문지리(算)를 익혀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문인이나 무인이나 활을 쏘았다. 지금도 전국에 남아 있는 국궁장(國弓場)은 육예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사직단 지나 단군성전 만나는 길
이제 황학정을 돌아 내려오면 사직단 서북단 위에 단아한 건물이 보인다. 국조 단군을 모시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다. 해방 후에도 사직단이 방치된 것을 보다 못한 이희승, 이숭녕 이런 분들이 현정회(顯正會)를 만들고 국가로부터 국조 단군(檀君)의 표준영정을 승인 받아 봉안한 곳이다. 개천절(開天節)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일깨우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날, 즉 어천절(御天節)을 기리고 있다. 지난 3월 15일에 어천절 제향(祭享)이 있었다. 유일한 단군 할아버지 표준상이 궁금하면 이곳에 들려보자. 사실 단군을 모시는 어느 종교가 있다보니 국조(國祖) 단군 할아버지를 타종교의 교조(敎祖)로 보는 일부 과격한 이들도 있어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였다. 단군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단군성전을 나와 종로문화체육센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지자체에서 구민들을 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운영하는 문화체육센터다. 도로를 면해서는 커피점도 있는데 보통 맛에 가격은 합리적이라서 이 길을 지날 때는 때로 커피 한 잔 하고 가는 곳이다. 잠시 후 편의점을 지나면 사거리길이 나오는데 이곳은 한양도성길이 지나는 길목이다. 좌측 눈 아래로는 연립주택이 보이고 그 뒤로는 오래 된 은행나무가 자리 잡은 모습이 보인다. 이 지역은 이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동(銀杏洞)이었는데 새말(新村)이라 부르던 옥바라지 골목을 포함하여 행촌동(杏村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한다.
설명문에는 수령 420이라 했고, 적어 놓은 때가 1976년이니 이제는 460년이 넘은 나무가 된 셈이다. 나무 아래에는 표석도 있는데 이곳이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집터라는 설명이다. 도원수 생몰연대가 1537~1599년이니 도원수 집안이 심은 나무일 것 같다.
3.1운동을 해외에 알린 알버트의 사랑 집
그러나 이 골목길에서 나에게 아련한 상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다. 언젠가 이 동네에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던 베델(Bethell) 선생의 집이 있다기에 찾아보러 왔다가 그 집은 이미 헐리고 다른 붉은 벽돌집이 있다기에 찾아가보았다. 그때 알게 된 딜쿠샤. 여러 사람들의 무단 거주로 슬럼가(街) 같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집이었다. 초석에 써 있는 Dilkusha 1923도 궁금증을 더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딜큐사는 그냥 건물이 아니라 그 공간에 살았던 젊은 외국인 부부의 이상향이자 행복의 꽃동산이었다.
살면서 어떤 이들이 꿈같은 삶을 살았을 공간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다. 21살 미국인 청년 알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인 아버지 죠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왔다. 아버지는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생기게 한 운산금광의 운영자였다. 1908년 아버지 죠지는 사망하여 조선 땅에 묻혔다. 그러나 아들 알버트는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사업을 이어갔으며 한편으로는 UPI 통신원으로 이 땅에서 활약하였다. 그 사이 그는 일본에 갔다가 만난 부유한 집안의 영국 여배우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제 치하 경성(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첫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 다음날이 바로 3.1독립만세날이었다. 간호사들이 무언가 종이뭉치를 일본 경찰 눈을 피해 숨기는 것을 본 알버트는 그것이 조선의 독립선언문임을 알게 되었다. 급히 아우 빌을 불러 선언문을 아우의 구두 밑창에 숨기고는 일본으로 보냈다. 이로써 조선의 독립운동과 독립선언문은 온세계로 타전되었다. 다음달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학살 사건도 알버트의 손에 의해 파헤쳐졌다.
알버트와 메리는 1923년 이곳 행촌동 은행나무 언덕 앞에 이 땅에서 영원히 꿈꾸며 살 이상향 딜쿠샤를 지었다. 그들의 신혼 여행지였나? 인도 러크나우(Lucknow)에 있는 궁전 이름을 땄다 한다. 그들은 비록 일제하에서 핍박은 받았지만 금강산을 비롯하여 이 땅을 사랑하며 행복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일제는 이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 거부한 그들에게는 극심한 핍박이 가해졌고 이듬해 1942년에 강제 추방되었다. 이 땅에 돌아올 것을 믿었던 알버트는 불행히도 1948년 세상을 떠났고 알버트의 유언을 따라 메리는 그의 유해를 가져와 아버지 죠지 옆에 묻었다. 이들 테일러 부자는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서 이 땅을 사랑하며 잠들어 있다.
이 땅에서 낳고 자란 아들 브루스(Bruce)는 우리 방송국 특집방송 촬영 차 1942년 떠났던 한국을 2007년 방문하였다. 한편 부인 메리의 딜쿠샤에서 살았던 그 시절 기록은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알베트와 메리가 도쿄에서 만났을 때 알버트가 준 선물이 호박(琥珀)목걸이 줄이었기 때문에. 난민촌처럼 관리 밖에 있던 딜쿠샤도 내년(2019년)에는 정비된다고 한다. 언제나 그곳에 가면 알버트와 메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알터, 알뫼, 알바위 등으로 불리는 성혈
딜쿠샤를 돌아나와 성벽길로 나온다. 이제부터 인왕산을 향해 전진. 성벽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이 길은 4월에는 꽃동산을 이루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은 설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잠시 올라 전망대에 닿기 전 널찍한 바위들이 우측으로 보인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고 그런 바위이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흥미진진한 바위이기도 하다. 그 바위들 위에는 성혈(性穴)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성혈은 바위 위에 구슬치기 놀이 할 때처럼 구멍을 새겨 놓은 것이다. 지식사전을 찾으면 cup-mark라 하고 알터, 알뫼(알미), 알구멍, 알바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땅에 묻혀 있던 고인돌에서도 나온다 하니 청동기시대부터는 시작된 행위다.
그렇다면 기원전 1, 2천 년 전부터 바위에 구멍을 새기는 성혈 파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목적은 다산(多産)과 기자(祈子)였다는 설명이다. 필자나 필자의 길동무들은 언제나 산행이나 답사를 떠나면 큰 바위를 살피는 것이 습관화된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많은 성혈을 만났고 많은 경우가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혈(性穴)보다 성혈(星穴)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성혈을 판 시기도 청동기 이후 근세까지 계속되어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혹시 감은사지 석탑에 새겨진 많은 성혈을 보신 적이 있는지? 고려시대 탑에 새겨진 성혈을 보신 적이 있는지? 이 인왕산 길에서 만난 성혈도 별자리를 그려 넣은 것이다. 시대는 가늠하기 어려운데 오래 오래 전 이곳 인왕산 아랫마을에 살던 이들이 하늘님께 간절한 소원을 빈 흔적이 역역하다. 바위 위에는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북두칠성(칠성님), 북극성, 삼태성(三台星)을 그려 놓은 것은 아닐까?
북극성(北極星)은 자미대제(紫薇大帝)인데 곧 하늘을 관장하시는 대왕이시다. 그런 분이니 하물며 인간사 부탁쯤이야 간절히 원하면 거절하시겠는가? 북두칠성(北斗七星)은 칠성님인데 우리의 명(命)을 관장하신다. 어떻게 얻은 귀한 자식인데…. 빌고 빌어 그 목숨 오래 오래 살도록 하려는 어미, 아비 마음이 오죽 했겠는가. 어느 명창이 뽑아내던 회심곡 한 가락 살펴본다.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는가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부님 전 뼈를 빌고 어마님 전 살을 빌며
칠성님 전 명을 빌고 제석님 전 복을 빌어
이 내 일신 탄생하니…
횡성의 회다지소리에는 이런 것도 있다.
칠성님 전 명을 타고,
삼태성에 복을 빌어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얻어…
사람이 태어날 때 복은 삼태성이나 제석(帝釋)님께 빌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왕산의 성혈은 별자리 신앙이 민간에 퍼진 이후에 생겨난 것일 것이다.
관리들이 쉬는 날 그린 인왕제색도
설명문 달면서 일제시대 왜곡 한자 쓰다니…
또 다른 성혈은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성벽길을 따라 인왕산으로 향한다. 인왕제색도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려 한다. 잠시 후 무학동에서 오르는 길을 만나는데 포장길이다. 앞쪽으로는 성벽을 따라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포장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이 길은 인왕산 자동차길인데 인도는 인왕산자락길이라는 이름의 산책길로 잘 가꾸어져 있다. 잠시 후 황금빛 호랑이 상을 만난다. 어째 좀 어설프다. 쓰여 있는 글귀도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다. ‘서울시민을 지키는 호랑이’라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잠시 후 수성동에서 오르는 길을 만나고 길 건너로는 석굴암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석굴암 오르는 길은 계단길로 길게 뻗어 있다. 이 지역을 경비하는 경비소 앞에는 만수천약수로 갈라지는 길이 갈려나간다. 인왕제색도에서는 중앙부에 정상이 있는 주봉(338m)과 우측에 있는 봉우리(312m)가 있는데 만수천약수길은 312봉 능선 초입을 감돌아 가는 길이다. 층계를 걸어 석굴암으로 오른다. 인왕제색도의 정중앙 계곡길(정상이 있는 봉우리와 기차바위가 갈려 나가는 우측 312m 봉우리의 사잇길)이다.
오르는 길 간간히 돌아보면 사대문 안 서울 시내가 꿈결 같이 내려다 보인다.
아, 잠시 사이에 저곳 티끌세상을 떠나왔구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바위 틈 사이를 막아 조성한 석굴암은 아예 건물이 하나도 없다. 법당도 요사(寮舍)도 모두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앉았다. 겸재 시절에는 아예 석굴암이 없었거나 아니면 법당이나 요사가 바위틈이다 보니 인왕제색도에는 석굴암이 그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 그친 가파른 계곡에 계곡수가 가득차서 흘러내린다. 이런 날에는 아예 이 길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인왕제색도 화제(畵題)에는 그림 그린 날자가 辛未閏月下浣(신미윤월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신미년(1715년 영조 27년)에는 윤달이 5월밖에 없으므로 겸재는 구지 윤오월이라 쓰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서 하완(下浣)이란 무슨 말인가? 완(浣)이란 빤다(wash)는 뜻인데 당나라에서는 관원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을 주었다. 관복이 많을 리 없는 관원들이 이 날은 관복도 빨고 쉬기도 하란 뜻이었기에 빨래하는 날이 완(浣)이었다. 이것이 열흘에 한 번이다 보니 상순, 중순, 하순처럼 상완, 중완, 하완이란 말도 사용하였다. 혹은 같은 뜻으로 상한(上澣), 중한(中澣), 하한(下澣)도 사용하였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그린 위치가 육상궁(칠궁) 위 북악산 기슭이라고도 하고, 옛 경기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인 정독도서관 마당이라고도 한다. 정독도서관 앞마당에는 문화부가 세운 조형물과 설명문도 세워져 있다. 내용은 이렇다.
“謙齋 鄭歚(1616~1759)은 아름다운 우리 山川을 獨創的인 筆法으로 그려 우리의 그림을 大成하였다. 그를 기려 이 자리에 碑를 세우니 비 온 뒤 갠 날 이곳에서 보는 仁旺의 모습은 仁旺霽色圖처럼 예나 이제나 새롭고 아름답다. 1992년 6월 문화부 세움”
기왕 세우는 것이라면 겸재가 화제에 쓴 ‘仁王霽色’이라고 썼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일제 때 자주 등장했던 仁旺을 쓴 것은 부주의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한편 의문이 생긴다. 인왕제색도는 정말로 정독도서관 앞마당에서 보고 그린 각도가 맞는 것일까?
(정리 = 최인욱 기자)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