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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45)] 객관적 美 찾기 앞서 ‘내 질문’부터 확립해야 美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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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0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3.26 10:24:59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미술 혹은 예술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정답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들은 예술이라 부를만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여가 시간에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을 즐기고 감상한다. 그런데 ‘무엇을 보러 갈까?’라는 질문은 많이 하지만 ‘미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까?’와 같은 생각은 많이 하지 않는 것 같다. ‘즐겁게 감상하고 오면 되지, 굳이 머리 아프게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질문은 소위 전공자들이나 하는 질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본다면 조금은 더 즐겁고 깊이 있는 감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한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전시나 공연 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예술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들과의 첫 수업 주제를 ‘내가 생각하는 예술’로 정하고 토론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1페이지 정도로 정리해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표를 했다. 상당히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고 서로의 의견에 대한 질문과 반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옳고 그름을 떠나- 예술은 남다른 창조의 능력과 결과물, 작가의 내면이나 생각을 담아내는 무엇, 사회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꽤 공통적으로 나왔다.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며,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편, 예술을 명확히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공통적으로 나왔는데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들도 단정 지어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2017 아르코미술관 교육 프로그램 ‘겨울에 머물러도 좋아요’, 도판 제공 = 아르코미술관 

그럼 이제 역사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미술의 정의와 역할을 살펴보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미술은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목적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가장 앞선 시대의 인체 조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는 다산과 풍요를, 선사시대 동굴벽화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주된 해석이다. 이집트 미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 이후 고대 그리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본주의에 근거해 존엄한 인간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것이 미술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당연히 미술의 주인공은 영웅이나 위인, 여신, 귀족 등이었다. 아름다움은 선, 추함은 악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인간을 통해 보편적이고 이상적 미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상적인 미의 중요한 기준은 균형과 조화, 질서, 비율 등이었다. 보편적인 미를 추구하면서도 최대한 설득력 있게 대상을 사실적으로 모방해야 한다는 목표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낭만주의(Romanticism) 미술가들에 의해 미술의 본질은 작가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가면서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고, 쿠르베(Gustave Courbet)처럼 사실을 거짓 없이 정확히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미술가들에 의해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전통적인 미술이라 부르는 작품 대부분은 앞서 말한 특징을 갖는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미술은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미술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기게 된다. 실제로 시대별로 미술 속에 등장한 인간들은 꽤 다양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술에 대한 ‘객관적 답’ 존재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문화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미술도 자율성, 독립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미술이 아닌 다른 장르와는 철저하게 차별화되는 시각 예술로서의 정체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술만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색과 형태는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재현 미술보다는 점, 선, 면과 같은 조형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화면 속의 구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작품 제목은 특정한 인물과 사건이 아니라 무제, 작품 제작 날짜, 번호로 바뀌게 되었다. 오직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식 실험이 중요해진 것이다. 미술가들은 시대를 선도하는 개척자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자신만의 새로운 미술 형식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추상화에는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리고 20세기 모더니즘(Modernism) 미술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현실로부터 벗어나 오직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각적인 경험만을 제공하는 예술만을 위한 공간인 화이트 큐브(white cube)도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이희준, ‘숨 잡기 4’, 캔버스에 유채, 27.3 x 21.2cm, 2016, ‘제3회 뉴드로잉 프로젝트’전(2018.2.13.~2018.4.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도판 제공 = 이희준 작가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고 있음에도 20세기 중반까지의 미술을 보면 ‘미술이란 무엇인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날의 미술에 비하면- 명확하고 확실하다. 또한 시대의 주류라고 불릴만한 특징들이 있다. 그런데 요즘 미술은 ‘미술이란 이것이다’라고 정확히 말할만한 목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때로는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미술관에 전시되었음에도 시각적인 경험을 제공하기보다는 정치, 경제, 과학, 음악적인 작업처럼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한 명의 작가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그 결과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기도 한다. 화가, 조각가라는 명칭 못지않게 작가, 예술가(아티스트)라는 호칭이 사용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규모 자본의 투입으로, 거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전시가 있는가 하면 작고 소소한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시도 있다. 시각적 결과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거나 자신의 작품 그 자체보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관객의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작가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시각적인 형식 실험에 집중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그냥 시대가 변해서 그런 것이라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또한 모든 감상은 나 스스로가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만의 입장 정리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주말에 전시를 볼 계획이 있다면, 전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미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내가 미술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생각해보길 권한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만나는 동안에는 ‘이 작가는 미술을 무엇이라 생각하며 작업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자. 이전보다 조금은 더 흥미진진한 관람이 될 것이다. 

 

(정리 = 최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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