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손정호 기자) 우리나라 금융투자업계의 ‘큰 손’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기관투자자의 주주권을 상징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이 속도를 내면서 재계는 국민연금이 가져올 ‘나비효과’에 긴장하고 있다. 5월 24일 열린 국회 토론회는 이들의 운명을 가늠할 ‘전초전’이었다.
‘스튜어드십 코드(SC·Stewardship Code)’란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율 지침을 이른다. 집안일을 맡아 보는 집사(스튜어드·steward)처럼 기관들도 고객 재산을 선량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에서 생겨난 용어다. 투자한 기업의 경영진에 대한 감시, 실적과 배당 향상 등을 목표로 한다.
보건복지부는 4월 18일 조직문화 및 제도개선 위원회를 통해 산하기관인 국민연금이 오는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시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이달 중으로 최종안을 복지부에 제출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조만간 행동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이 제도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지난 2016년 12월 처음 국내에 도입됐지만, 이를 적용하는 기관투자자는 극소수였다. 국민연금은 여전히 ‘주총 거수기’였다.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2015년 7월)에 국민연금이 정부 압력에 의해 찬성표를 던진 사실(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된 이후에야 적극적인 실행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이 강력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실행할 경우, 기업 주주총회와 지배구조 등에 큰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요 은행, 증권사, 대기업의 주요주주(5%이상 지분 보유)다.
CNB가 3월말 기준 국민연금의 투자(지분) 현황을 조사한 결과, BNK금융지주(11.19%), KB금융지주(9.62%), 하나금융지주(9.61%), 신한금융지주(9.55%), 기업은행(9.41%), 우리은행(9.29%) 등의 ‘큰 손’이었다.
삼성증권(12.43%), 미래에셋대우(10.40%), NH투자증권(9.76%), 한국금융지주(한국투자증권 지주사·9.50%) 등 증권가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에서는 신세계백화점(13.48%), 현대건설(12.22%), SK케미칼(11.98%), 한진칼(11.91%), 현대백화점(11.25%), CJ제일제당(10.94%), 포스코(10.79%), CJ(10.57%), 효성(10.16%), SK하이닉스(9.94%), 삼성전자(9.46%), LG전자(9.34%), 현대자동차(8.44%), 한화(6.91%), 기아자동차(6.52%), 삼성물산(5.70%) 등의 주요주주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국민연금이 제대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재계에 상당한 파장이 일 전망이다. 다른 기관투자자들에게는 ‘투자 기업’ 감시와 견제를 강화하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금융권에서는 은행지주 회장의 ‘셀프 연임’과 ‘낙하산 인사’ 등 방만한 경영, 대기업에서는 적은 지분을 가진 총수일가의 ‘황제 경영’ 문제가 일정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5월 24일 이 문제를 다룬 국회 토론회는 ‘핫’했다. 토론회는 이학영·이용득(더불어민주당)·채이배(바른미래당) 의원, 금융산업노동조합, 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주최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주제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토론회: 스튜어드십 코드를 중심으로’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정치권과 금융위원회, 학계, 금융계 인사 6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토론회 시작 30분 전부터 세미나실을 꽉 채우고 활발하게 대화를 나눴다. 취재·방송카메라·사진기자도 20여명이나 몰렸다.
연단에 나선 채이배 의원은 차분한 어조로 논리를 펼쳤다. 그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배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의 합병안을 주총에 상정하려했지만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등의 반대로 무산됐다”며 “이후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주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등이 나설 경우, 코리안 디스카운트로 불리는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오너십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의원들 “국민연금이 목소리 키워라”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권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들이 자금의 주인에게 투자 내용을 투명하게 보고하라는 것”이라며 “2008년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 이후 투자한 기업의 리스크를 사회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지배주주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기업에 대한 시장과 제도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외이사와 감사위원도 독립적이지 못하다”며 “이에 따른 오너 리스크와 주주들의 손실 때문에 이 규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앞으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이를 지키면서, 기업의 지배구조가 적절한지, 회장이 횡령과 배임 등 주주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면서 주총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권 교수에 따르면, 현재 금융당국에서 살펴보고 있는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수탁자 책임 정책 제정과 공개 △이해 상충 방지 정책 제정과 공개 △투자 회사 주기적 점검 △수탁자 책임활동 내부지침 마련 △의결권 정책 제정과 공개 △의결권 행사 내용과 이유 공개 △의결권 행사 내용의 주기적 보고 △이를 위한 역량 향상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센티브에 대한 방안도 눈길을 끌었다. 손영채 금융위 공정시장과 과장은 “기관투자자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잘 행하려면 기업 이슈에 대해 분석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주총 분산 개최와 통지기간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는 일정 지분율과 보유기간을 지키면 감사인을 지정해서 신청할 수 있고, 연기금이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때 도입한 곳을 우대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향후 개선방안도 나왔다. 이시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기관투자자들은 분산 투자한 기업들에 대한 주주권을 잘 행사하기 위해서 의안분석 서비스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며 “이를 적용하거나 공시하도록 하는 것은 실효성이 낮아 규제당국의 역할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