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3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6.25 09:43:59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그 동안 작가 윤진숙은 일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작업의 주인공들은 길 위의 풀과 그것이 머무르는 세계였다. 그런데 올해는 전시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연락을 했고, 작가는 작업실 사진 한 장과 함께 소식을 전해왔다.
윤진숙은 풀의 작가로 익숙하다. 사람들은 그녀의 작업에서 제일 먼저 풀을 보지만, 사실 풀이 전부가 아니다. 풀은 세계와 존재, 존재의 삶, 세계의 섭리를 말하고픈 작가가 선택한 상징물이다. 풀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삶이 떠오른다. 햇빛을 쪼이고, 바람에 눕고, 비에 젖는다. 꽃이 필 때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시들어 노란 잎으로 변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다시 새싹을 피운다. 세상의 이치를 논하기 위해 굳이 저 멀리 있는 거창한 무언가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작가는 일상의 산책에서 세상을 만난다.
사진 찍는 이유는? 눈으로 못 보는 걸 보려고
작가가 매일 걷는 산책길은 엄청난 모험이나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산책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를 걷는 것이다. 급하게 쫓기는 마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조금은 느긋하게 걸으며 세상을 관찰한다. 눈길은 자연스레 낮은 곳으로 향한다. 그러다 시선이 머무는 곳을 스케치한다. 스케치는 대상을 온전히 마주보는 순간이다. 때때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사진 속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사진은 (일상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평범하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 작가조차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거나 습관처럼 주인공을 한정짓는 것을 경계한다. 사진은 전형화되었을지도 모를 시야를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양한지 환기시킨다. 놓친 부분이 확인되면 작가는 현장에 다시 나가 한참을 바라보고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스케치한다.
‘밑그림 아닌 스케치’를 그리는 이유는?
윤진숙은 산책길에서 얻은 스케치들을 놓고 재조합하면서 작업한다. 그러나 스케치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아니다. 형태만 옮기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케치는 (즉흥적으로, 때로는 계획적으로) 변형되고 재조합된다. 여러 장의 스케치가 한 작품에 모두 담기기도 하고, 한 장의 스케치가 여러 작품에 동시에 담기기도 한다. 심지어 스케치와 닮지 않아도 된다. 작가는 어떤 밑그림도 없이 작업한다. 누군가는 ‘밑그림에 활용할 것도 아닌데 스케치를 굳이 할 필요가 있는가? 스케치를 보지 않고 그냥 상상해서 그려도 되는 것 아닌가?’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분명 차이가 있다. 엄밀히 말해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풀 한 포기, 들풀 하나의 외형이 아니다. 풀과 그것을 둘러싼 분위기와 인상이다. 분위기를 오롯이 전하기 위해서는 스케치를 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재조합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냥 머릿속의 기억만을 토대로 상상하거나, 구체적인 대상 없이 막연히 그리게 되면 작품(이 전달하는 분위기)의 밀도가 떨어진다. 숙고의 시간이 쌓여야 한다. 스케치를 통해 더욱 예리하고 감각적인 지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가도, 풀도 자연(세계)의 이치를 따르는(따를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다. 작기에 유의미한 존재다. 그 작은 존재 안에 세상이 담긴다. 이런 이유로 윤진숙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리는 행위는 그저 예술가의 작업이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삶의 과정이다.
- 일 년에 한 번씩 신작을 선보여 왔다. 올해도 전시 소식을 계속 기다렸다. 올해 전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올해는 전시를 안 하는 게 목표다(웃음). 그 동안 너무 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래서 당분간은 일부러라도 느리게 가려고 한다. 익숙한 작업 패턴을 벗어나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숨고르기를 하려 한다.”
- 익숙함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하겠다. 변화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동안 작품의 소재와 형식이 유사했다. 풀을 포한한 자연, 한지 뒤에 먹지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표현 방식은 작가 윤진숙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작가 자신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작가가 아닌 우리들은 모두 비슷한 작품이라 느낄 수도 있다. 우리의 삶과 우리를 둘러싼 자연도 늘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 안에 미미한 변화들을 담아낸다. 자연(세상)을 담아내는 작가이니 그게 맞는 것도 같다.
“풀(자연)이라는 소재를 좋아하고 몰두하다보니 항상성이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전시를 매해 진행하다보니 관객들이 볼만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시를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앞으로 변하겠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인위적인 행동을 하거나 과도한 노력을 쏟는 것을 싫어한다. 내 작업에 거창한 의미를 담고 싶은 욕심도 없다. 게을러지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그저 지금은 최근 머릿속에 맴도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다. 조금 더 여유로운 태도로 구체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 그러고 보니 도시에서 그나마 자주 마주하는 자연은 풀과 나무다. 작업이 변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소재가 바뀌거나 확장될 수도 있는 것인가? 신진 작가라 불리던 시절에는 조금 더 다양한 이미지들을 그렸다. 도시가 연상되는 풍경도 있었고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빌딩도 있고, 자연도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자연 자체가 사람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어차피 자연의 일부이다. 굳이 사람을 그려 넣는 것도 인간으로서의 우월 의식이 발현된 것일 수 있다. 풀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도시에 대비되는 자연, 도시 속 자연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런 식의 이분법적인 구도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사실 나는 풀만 그리지 않는다. 풀을 마주보고 이미지화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둘러싼 분위기, 즉 세상에 관심이 많다는 말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풀이 흔들리는 풍경, 바람이 피부에 닿는 느낌, 풀숲에서 감지되는 향기 같은 것들을 담아내는 것이 내 작업이다. 나의 작품에 배경처럼 등장하는 풀을 둘러싼 시공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까지 전달하고 싶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려진 것을 통해 그려지지 않은 것까지 그려내고 싶다. 물질적인 것을 통해 비물질적인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풀을 둘러싼 것들에 조금 더 주목하고 있다. 첨언하자면, 나는 풀이든 풀을 둘러싼 배경이든 주인공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무언가에 자꾸 시선이 간다. 주류가 아닌 곳에서도 여전히 어떤 이야기들, 삶의 모습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나는 자연의 현상을 빌어 그것들을 세심한 눈길로 이해하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 분위기를 그려내겠다는 작가의 목표는 일정 부분 성공한 것 같다. 윤진숙의 작업에서는 분명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한 분위기가 전달된다. 그런데 모든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는 태도는 본인이 기독교인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자연을 중심에 놓고, 자연과 하나 됨을 지향하는 동양적 세계관의 영향인 것인가? 여기에는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것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
“모두에서 영향 받았다. 성경에서는 소외된 존재, 낮은 존재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아직도 여전히 주류라 불리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주류와 비주류는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주류라 불리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건 고정관념일 뿐이다. 내 기준에서 현대인들은 외부의 힘에 너무 휘둘리며 살고 있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워낙 자연을 좋아한다.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개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들 중에도 자연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화를 전공했다고 모두 자연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단, 동양화의 표현 방식이 인공물보다는 자연물을 그리는 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곡선, 움직임을 담아내는 동양화의 선들이 자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 동양화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매체)인 먹과 한지를 이용하지만 그리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먹지 위에 한지를 올린 뒤 도구를 이용해 꾹꾹 눌러 뒤에서부터 먹선이 올라오게 하는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판화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어떤 작업은 일본 목판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앞으로도 먹과 한지라는 재료를 고수할 생각인가?
“재료를 바꾸지 못할 이유는 없다. 때로는 표현의 한계에 봉착해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러다 내가 표현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 재료적 한계인지, 작가로서 내 역량의 한계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업을 시작할 때 매료되었던 동양화 재료의 특성도 아직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 내 능력의 최대치까지 가보고 싶다.”
- 현재 작업을 하면서 가장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무엇인가?
“관찰력을 더 높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순간들을 포착할 수 있는 예리하고 섬세한 작가가 되고 싶다. 더 나아가 나의 삶을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흘려보내고 싶다. 작업과 삶은 연결된다. 회화라고 해서 완성된 작품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뿐 아니라 작품이 완성된 후 이어질 새로운 과정까지 매우 중요하다. 작업을 위해 산책을 하고 현장에서 스케치하지만, 산책과 스케치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만약 작업을 잠시 쉰다고 해도 산책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스케치도 마찬가지다. 작업을 통해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게 지속되는지, 때로는 어떻게 변화되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작가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