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손정호 기자) ‘초대형 투자은행(IB) 증권사’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초대형 IB가 ‘어음 발행 사업’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벤처기업에 샘물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자본시장연구원 주최로 열린 세미나는 금융계의 이런 ‘블루프린트’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5월 31일 NH투자증권이 두 번째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사업자로 지정되면서 자본시장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초대형 IB가 벤처기업에 혁신금융을 제공하게 되면, 한국 경제에 활력이 될 수 있다는 것.
금융당국은 작년 11월 자기자본 4조원 기준을 맞춘 미래에셋대우와 삼성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KB증권을 초대형 IB로 지정했었다.
하지만 ‘노른자위 사업’인 발행어음은 한국투자증권에만 허락해, 초대형 IB가 반쪽자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이 있었다.
발행어음 사업은 자기자본 200% 내에서 만기 1년의 어음을 발행해 이윤을 남기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10억원짜리 어음을 연리 3%로 발행해 자금을 유치하면, 이를 다시 연리 5%로 기업 등에 빌려줘 2%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증권사는 이 과정을 통해 충분한 투자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NH투자증권의 경우 3월 말 기준 자기자본(4조7811억원)의 2배인 약 10조원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한국투자증권(자기자본 4조2157억원)은 8조6000억원까지 모을 수 있다.
이렇게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면, 초대형 IB는 기업공개(IPO)와 인수합병(M&A)에 이어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벤처캐피탈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증권사의 성장과 더불어 자본시장 활성화, 국가 경제의 리스크 관리, 벤처기업 육성 등 순기능을 기대할 수도 있다.
실제 NH투자증권은 3개월 내 1조원, 연말까지 1조5000억원의 발행어음 판매 목표를 세웠다. 우선 이 자금은 기업 대출, 회사채 등에 집중하고, 이후 벤처캐피탈, 사모투자펀드(PEF) 등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한국투자증권은 3월 말까지 2조2000억원의 발행어음을 판매했다. 이를 통해 유입된 자금의 50%를 기업에 투자하고, 30% 정도를 부동산에 투입하고 있다. 두산인프라코어, 한라(건설사)의 BBB급 회사채를 매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초대형 IB의 발행어음 사업은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KB증권은 옛 현대증권(KB금융지주가 인수한 회사)의 금융감독원 제재가 오는 27일 끝난다. 불법 자전거래와 대주주 신용 공여 등 금감원 제재 사안이 불거지자 사업 신청을 스스로 철회했는데, 곧 다시 신청할 전망이다. 미래에셋대우와 삼성증권은 각각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몰아주기 조사, 대주주(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 문제로 심사가 보류됐지만, 시간차를 두고 승인받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지난 12일 한국증권학회와 자본시장연구원이 주최한 ‘혁신기업과 자본시장의 역할’ 세미나는 금융권의 이런 기대감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조웅기 미래에셋대우 대표는 이날 세미나에서 초대형 IB의 향후 과제로 ‘인수합병(M&A) 활성화’를 꼽았다. 그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신생기업들은 대부분 기업공개(IPO)를 통해서 활로를 찾는데, 미국 실리콘밸리의 젊은 창업자들은 M&A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다.
조 대표는 “초대형 IB가 혁신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벤처캐피털을 지원하고, 젊은 기업가들이 대기업과의 M&A로 성공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초대형 IB는 성장성이 높은 기업들이 제값을 받는 M&A가 될 수 있도록 자본시장 생태계의 중심에 서겠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해 핀란드 모델을 벤치마킹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핀란드는 신생기업을 키우기 위해 벤처캐피털 등 4개의 관련 정부기관이 ‘팀 핀란드’라는 이름으로 한 건물에서 일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산재한 기관들을 묶어서 민간과 협조하는 비슷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초대형 IB가 정부기관 및 민간 벤처와 함께 협력해야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다.
4차 산업혁명과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이 증권사와 벤처기업의 윈윈 기회일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쳐졌다.
조 대표는 “우리 경제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넛크래커 신세인데다, 인구 고령화로 저성장이 진행 중이라 우려가 많다”며 “하지만 생각을 달리 하면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상당히 좋은 기회이고, 서울에서 3시간 거리에 14억명(중국)이 살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와이파이가 잘 설치돼 있어서 가상현실 게임과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자동차 등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이 자리잡기 좋은 환경”이라며 “14억명의 사람들이 서울을 자주 찾아오게 하면 좋은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IT와 바이오, 게임 등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망 사업으로 꼽았다. 이중 엔씨소프트는 2010년 시가총액 2000억원이었는데, 스마트폰이 보급돼 모바일게임이 증가하면서 현재(6월 18일 종가 기준) 7조8213억원으로 크게 성장했다는 것. 게임업종의 전체 시총은 당시 1조원에서 현재 40조원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초대형 IB가 이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가능성이 크지만 자금이 부족한 ‘4차 산업혁명 유망주’들을 발굴, 캐피탈과 회사채 등 다양한 형태의 투자를 통해 초대형 IB와 해당 기업이 동시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금융권의 이런 ‘청사진’에 대해 정치권도 긍정적인 모습이다. 정무위원회 소속인 최운열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세미나에 참석해 금융위의 적극적인 발행어음 사업자 확대를 주문했다.
최 의원은 “은행은 자금 운용을 보수적으로 하기 때문에 혁신·모험기업에 자금을 제공하기 힘들다”며 “혁신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는 자금을 제공해줘야 한다. 지금 발행어음 사업자가 2곳인데, 금융위가 더 지정해서 경쟁시키고 감독 시스템을 만들라”고 말했다. 사실상 세 번째 발행어음 사업자를 허용하라는 뜻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