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0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8.13 09:56:43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서점 진열대의 책들을 보면 사각의 기본 형태를 지키면서도 정말 다양한 자신만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책의 표지는 책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함축하는 시각적 결과물이다. 동시에 북 디자이너의 조형적 실험을 담아내는 하나의 작은 화폭과 같다. 표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지의 글씨체와 크기, 여백, (만약 수록된다면) 도판의 크기와 위치 등,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시각적 선택의 순간이 필요하다.
읽는 것뿐 아니라 조형적 결과물로서 감상하게 만드는 책들도 있다.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많은 북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들 덕분이다. 또한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미술가가 표지나 삽화 작업에 참여한 책들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필자의 책꽂이에도 읽기보다는 보기에 가까운 감상을 하게 하는 책들이 있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사진이 수록된 ‘핏처의 새(Fitcher’s Bird)’(1992),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그림이 가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2), 그리고 서세옥의 수묵화가 실린 그림책 ‘즐거운 비’(2006) 등이다.
책의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전문가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근현대 미술가들이 북 디자이너와 삽화가로 활동했다. 그들은 자신의 글이 실린 책이나 정기간행물뿐 아니라 이태준의 ‘달밤’(1934), 손소희의 ‘그날의 햇빛은’(1962),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등과 같은 문학 작품들의 출간 작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예술적 동료인 문학가의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미술가로서 형식적 실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성북구립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이 참여했던 책의 표지 장정(裝幀/裝訂)과 삽화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 ‘책 속의 화가’(2018년 7월 19일~9월 9일)를 기획했다. 함께 전시된 회화 작품들은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실제로 미술관에 전시된 책들을 보다 보면 누구의 작업인지 금방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미술가들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의 표지를 통해 화가의 화풍 변화가 확인되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다. 전자책(e-book)의 출현이 많은 것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독립 서점과 북 카페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책을 큐레이팅한다’는 표현도 익숙한 것이 되었다. ‘책 속의 화가’전은 분명 후자의 분위기에 가깝다. 실제로 존재하는, 보고 만질 수 있는 책, 그와 연결 지점을 갖는 작품을 직접 봤을 때 경험하게 되는 운치와 여운의 깊이는 남다를 것이다.
- 최근 책과 관련된 전시와 행사들이 증가하고 있다. 전시 ‘책 속의 화가’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무엇인가?
“제일 큰 차별성은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연구하는 미술관에서의 기획 전시라는 점이다. 미술사적인 흐름과 미학적 가치를 집어보기 위해 책만 전시하지 않고 삽화와 긴밀한 연관관계에 놓이는 작품들을 함께 전시했다. 책은 인쇄물이고 2차적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자체로도 연구가 가능한 예술적 의의를 갖는다. 표지든 내지의 삽화든 예술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단순히 2차 인쇄물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예술을 완전히 아우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전문적인 북 디자이너가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80년대라 한다. 그 이전에는 주로 화가들이 오늘날 우리가 북 디자인이라 부르는 작업에 참여했다. 문인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 작가들이 삽화 및 디자인에 참여한 책들은 그 책이 출간된 시기 해당 작가의 작업 세계를 유추할 수 있는 조형적 실험의 장이었다. 원화 역시 책의 크기 그대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과 같다. 때로는 미술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의 단초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김용준, 김환기, 정현웅 등이 대표적인 작가라 하겠다.”
- 삽화를 위해 그린 원화 중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이 있는가?
“잡지사나 출판사에서 원화를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박고석 작가의 경우 신문사 편집진이 삽화 원화를 모아 두었다가 작가에게 전해준 것들도 있으며, 백영수, 우경희, 송영방, 윤중식 등 일부 작가(혹은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원화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 벽이 진한 주홍, 파랑, 노랑으로 일대 변신을 했다. 화이트 큐브의 공식이 깨진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강렬한 색 대비의 공간을 만들려면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성북구립미술관의 이전 전시들에 비해 밝고 명랑한 느낌이다.
“첫째로, 전시에 생생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전시된 책들이 오래된 과거의 물건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냥 책이 아니라 작가들의 열정이 담긴 작업의 연장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오래된 책들을 전시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현재, 우리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전시된 책의 삽화를 그렸던 작가 중 지금도 작업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활동하는 작가, 현대 미술의 주축을 차지하는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강한 색채의 벽을 시도했다. 둘째로, 송영방, 장욱진, 백영수, 이만익, 우경희처럼 실재 많은 근현대 작가들이 교과서나 동화책처럼 어린이와 관련된 책의 삽화를 많이 그렸다는 데에 착안했다. 예를 들어 동아출판사에서 출판된 ‘그림나라 100’에는 당대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화가들이 참여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작가들이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에 대한 전시를 중점적으로 선보이는 미술관의 전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드는 생각이다.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싶었다면 삽화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오늘날의 작가들을 전시에 포함시켰어도 좋았을 것 같다. 실제로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 중에서 책에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실었거나 북 디자인에 참여한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보았었다. 그런데 지금 전시되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만으로도 미술관 공간이 가득 찼다. 그래서 성북 지역과 관련성이 높은 작가로 한정했다. 성북구에서 진행되는 전시인 만큼 지역과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후에 ‘책 속의 화가’ 2부와 같은 전시를 기획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 성북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한국의 대표적인 근현대 작가들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의 삶과 연결된 전시를 상당수 기획했다. ‘그 시간을 걷다(2011)’와 ‘두 예술가를 만나다(2011)’에서부터 최근의 ‘성북의 조각가들(2017)’ ‘정릉시대(2018)’에 이르는 대부분의 전시가 지역과 연결된다. ‘성북구립미술관’이니 당연한 일이다. 전시와 관련해 특별히 주의하는 부분이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혹자는 성북 지역과 관련된 전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전시 기획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 아니냐 질문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성북 지역은 한국의 근현대 문화예술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전시를 기획하고 연구를 진행할수록 성북에 기반한 예술가들의 활동, 문인들과 화가들 사이의 개인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교류가 갖고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의미 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성북구에 머물렀던 근현대 작가들을 연구하다보면 한국근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현재까지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는 근대 작가인 경우에도 그들이 실제 살았던 공간, 그들이 물리적으로 남겨놓은 흔적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잊혀진 공간을 보존하고, 전시를 통해 그들의 흔적을 현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 지점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북구에 위치한 구립미술관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전시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전시와 관련된 예술가의 공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 미술관에 근무하면서 미술사 책에 등장하는 원로 작가들을 실제로 만나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필자도 성북구립미술관에 전시를 보러왔다가 미술관 안팎에서 원로 작가들과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다. 압도적인 아우라에 두근거린 적도 있었고 혼자 뭉클했던 적도 있었다. 그분들을 가까이에서 뵙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다.
“좁게는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 넓게는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온 분들이다. 아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눈물이 날 정도로 울컥할 때도 있었다. 창작에 대한 예술가들의 열망, 세상의 어떤 풍파도 꺾지 못한 예술혼을 느낀다. 책의 삽화 작업도 그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힘들었던 시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나의 통로였다. 후대의 연구를 위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그분들의 말씀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할 때마다 구술 채록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