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8호 윤지원⁄ 2018.09.27 18:11:53
아모레퍼시픽이 10월 1~5일 서울 용산구 본사 1층에서 ‘향기로 단장하다’전(展)을 진행한다. 이번 전시는 아모레퍼시픽이 발행하는 뷰티 매거진 ‘향장’의 600호를 기념해 열리는 특별전이다.
‘향장’은 1958년 ‘화장계(化粧界)’란 제호로 창간된 국내 최초의 사외보이자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뷰티 전문 매거진이다. ‘화장계’는 1963년 1월부터는 ‘난초’라는 제호로 바뀌었고, 1972년 2월부터 지금의 제호로 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60년 동안의 ‘향장’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60년 화장 문화 이끈 뷰티 매거진
‘향장’은 아모레퍼시픽이 제안하는 화장법이나 최신 제품 정보, 광고 등을 종합적으로 전하는 주된 창구였다. ‘화장계’가 창간되던 당시에는 패션 경향이나 화장법 정보 등은 대중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신문 외에는 대중적인 읽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등장하는 컬러 표지와 다양한 읽을거리를 담아 인기를 끌었다. ‘향장’ 자체의 인기뿐 아니라 아모레퍼시픽이 국내 뷰티 시장에서 60년 넘게 점유율 1위를 유지해 왔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향장’은 우리나라 화장 문화를 이끌어 온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런 ‘향장’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특별전으로,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표지, 광고, 기사 등 대표적인 콘텐츠들을 전시한다. 아모레퍼시픽이 제안했던 화장법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시대별 화장 문화가 어떻게 유행하고,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표지 모델의 변천사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여성 연예인들을 확인할 수 있다.
1958년 8월 창간된 ‘화장계’는 바른 화장법, 제품의 사용법과 보관법, 외국의 최신 유행 정보, 오락 기사 등을 다루었다. 100환이라는 가격이 매겨져있긴 했지만 대개 특약점에서 화장품을 사는 고객에게 무료로 증정되었다.
창간호 표지 모델은 당시 인기 정상의 글래머 영화배우 이빈화였다. 다음 달엔 김지미, 그 다음 달엔 엄앵란, 이어 김혜정 등 인기 여배우들이 잇따라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인기 여배우의 컬러풀한 표지는 스크랩의 대상이었다. 무료로 얻는 이들이 더 많았지만 헌책방에서 50환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였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유엔군 주둔으로 급격히 늘어난 직업여성들을 중심으로 서양식 화장법이 급속히 퍼졌다. 당시엔 짙고 굵게 그린 소위 ‘송충이 눈썹’과 짙은 인조 속눈썹, 새빨간 립스틱 같은 인위적인 화장이 유행했고, 마릴린 먼로의 애교점을 찍는 것도 유행했다.
1959년 발행된 ‘화장계’에 실린 ABC 분백분 광고는 당시 국내 화장품 산업의 현실을 단 한 페이지로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이기도 하다. 당시 국내 화장품 시장은 미군 군부대 매점(PX)에서 흘러나온 외제 화장품이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검증되지 않은 원료로 만든 가짜 화장품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 무렵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프랑스와 기술 제휴를 통해 산업화 초기 단계의 국산 화장품을 내놓았다. 광고에서는 특히 아모레퍼시픽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구축했고, 해외 파견을 통해 선진 기술을 습득한 연구팀을 운영했으며, 서양 여성과는 다른 동양인만의 피부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1만여 명을 상대로 품질 테스트를 진행했다는 사실 등이 드러난다.
화장 변천사에 시대상도 반영돼
윤복희의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던 1960년대 여성들은 두껍거나 아예 밀어버린 눈썹에 홍조를 띈 볼터치와 핑크 펄 립스틱 등 어린 소녀다운 인상을 풍기는 화장에 아이라이너로 눈매를 강조하는 것이 대세였다. 당시 정부는 가짜 외제 화장품이나 밀수품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화장품을 포함한 일부 품목에 대해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법’을 적용, 국내 기업들을 보호하고 나섰다. 덕분에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선진국의 화장품 회사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됐고, 한국화장품·피어리스·유한양행 등이 새롭게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 만한 여건이 조성됐다.
청바지와 통기타 문화가 주름잡던 1970년대에 가장 인기 있던 여성 스타일은 긴 생머리의 발랄한 여대생 스타일이었다. 눈썹을 뽑아서 정리하기 시작했고, 눈두덩에는 펄이 들어간 아이 섀도를 바르는 것이 크게 유행했었다. 1971년 아모레퍼시픽은 국내 최초로 ‘오 마이 러브’ 메이크업 쇼를 주최하기도 했는데, ‘향장’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기호와 개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컬러 메이크업을 소개하는 장이었으며, 당시 강조한 최신 메이크업 포인트는 둥글고 깊은 눈 화장에 보라색·청색·갈색 아이 섀도로 눈매에 화사한 느낌을 더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는 생활수준과 소비 심리가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증가하면서 여성스러움을 당당히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여성이 미용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더 이상 흉이 아닌 시대가 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패션과 화장이 유행했다. 어깨에 소위 ‘뽕’이라고 부르는 패드를 넣어 입체적인 몸매를 강조하는 패션이 주류를 이뤘고, 남녀를 불문하고 핀컬 파마가 유행했다. 또한 컬러TV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알록달록한 색조 화장이 유행했고, 서양 여성들처럼 얼굴의 윤곽을 살리는 입체 화장이 전성기를 맞았다. 한국의 화장품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고, 피부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고급 화장품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90년대는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유행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스킨 케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기능성 화장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과장되고 진한 화장보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내추럴 메이크업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서구 미인형 얼굴이 아니라 개성 있는 얼굴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가 등장하며 화장품 시장을 크게 확대하는 데 기여했고, 의학과 뷰티 산업이 손을 잡으며 메디컬 화장품과 자연주의 화장품이 화장품 시장을 양분하기 시작했다. 한류 열풍이 일본·중국 외에 동남아시아까지 휩쓸면서 이른바 케이(K)-뷰티 시대가 열렸다.
잡지·출판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
‘향장’은 국내 잡지 및 출판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후(戰後) 한국 사회에 대중적인 읽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화장계’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콘텐츠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신 화장품 제품 정보와 유행하는 화장법, 패션 정보 외에도 국내외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와 관련된 기사 및 트렌드, 각계각층의 전문가 칼럼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함께 담았다.
또한, ‘열망’, ‘능라도에서 생긴 일’ 등의 장편소설과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등의 시집을 낸 이제하 작가는 1970년대 후반 ‘자매일기’라는 소설을 ‘향장’에 연재했고, ‘원미동 사람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등의 장편소설을 쓴 양귀자 작가는 1990년대 ‘작은 배가 있었네’를 연재하는 등 문학 작품이 대중과 만나는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점차 다양한 주간지, 월간 여성지들이 등장한 이후에도 ‘향장’의 인기는 꾸준했다. 1980년대에는 월 200만 부 이상 발간되기도 했다. ‘향장’은 아모레퍼시픽 외에도 LG생활건강의 ‘이자녹스’와 ‘드봉’, 한국화장품의 ‘쥬단학’, 나드리화장품의 ‘나드리’, 쥬리아의 ‘꽃샘’, 피어리스(현 아이피어리스의 전신)의 ‘아미’ 등 여러 화장품 회사들이 발행하는 다양한 월간 사외보가 나오는 발판이 되었고, 이들 잡지들은 오랫동안 공존하며 국내 뷰티 트렌드를 주도했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향장’은 뷰티 정보는 물론 패션 트렌드, 사회 전반에 대한 전문가의 칼럼, 시와 단편소설 등의 문학 작품까지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들을 함께 담아왔다”며 “당시의 라이프스타일과 사회상까지 이번 전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전했다.
‘향장’ 600호 발행 기념전인 이번 ‘향기로 단장하다’전은 무료로 개방된다. 또한 아모레퍼시픽은 ‘향장’ 600호의 일부를 ‘화장계’, ‘난초’ 등의 옛 표지를 씌워 제작한 특별호로 발행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