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7호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2019.02.18 09:17:07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조각’이란 단어를 마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대 그리스 시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피에타(Pietà)’(1498-1499),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로댕(Auguste Rodin), 실존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인체상, 작품과 좌대의 본질적 경계와 상관관계를 탐구했던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셀 수 없이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생각난다. 동시대로 오면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과 설치미술(installation art)도 빼놓을 수 없다. 누군가는 가소성 있는 재료를 붙여나가고, 단단한 재료를 깎고, 주조(casting)하는 기본적인 작업 방식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런 방법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동시대 작품들에도 사용되는데, 마크 퀸(Marc Quinn)의 ‘셀프(Self)’(1991-present)는 캐스팅으로 제작되었고, ‘임신한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 Pregnant)’(2005)는 대리석 조각이다.
‘무한주’는 조각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조각의 핵심인 입체와 공간에 대한 탐구를 지속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전시에 참여한 권오상, 김인배. 이동욱은 그 형식과 재료, 개념에 있어 전통적인 조각(미술)의 범주를 벗어나거나 경계를 넘나들며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엄격한 장르의 경계가 해체된 시대를 반영하듯 조각의 규칙을 과감히 깨뜨리면서도 조각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이들의 작업은 매력적인 역설을 보여준다. 분명 조각이지만 조각이라고만 한정 지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권오상의 ‘데오도란트 타입 매스패턴스(Deodorant Type Masspatterns)’는 흙덩어리를 붙이듯 사진(이미지) 덩어리를 붙여나간 작품이다. ‘붉은 셔츠와 휘슬, 칼더의 서커스(Red Shirt and Whistle, Calder s Circus)’(2018)는 모빌을 연상시키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움직임이 아니다. 양감이 사라진 이미지 조각(piece 혹은 sculpture)들은 바닥 위의 좌대를 벗어나 천장에 매달렸다. 한편 이번 전시에 소개된 ‘릴리프(Relief)’에서는 형상과 형상이 오려지고 남은 판형이 중첩되어 조각을 둘러싼 공간성을 환기시킨다. 과거 ‘리포에틱(Leepoétique)’과의 인터뷰에서 “조각 감상은 작품이 놓인 공간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라고 말했던 작가는 상대적으로 평평한 작품에서도 실재하는 공간을 구현해 냈다.
전통적인 인체 조각의 흔적을 지우면서도 남겨두는 김인배의 조각은 예민한 균형감을 선사한다. 로댕의 파편화된 신체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부분으로 전체를 상상할 수 있다. 지워진 부분은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유기적인 추상 이미지는 독립된 조형 요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실존을 사유하는 인간의 초상을 은유한다.
이동욱은 사실적 재현이라는 미술의 고전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인체 조각은 이상적 인간상을 벗어나 있다. 오브제와 결합된 신체 부분들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혼성을 담아낸다. 포스트휴먼(post human)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들은 완결된 순수한 정체성에 질문을 던져 왔다.
미술(예술) 장르의 경계가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조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작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유동적으로 반응하며 조각적 실험을 지속해 왔다. ‘무한주’의 작가들 역시 그 실험의 길에 자신만의 지점을 만들어 간다.
‘무한주’ 참여 작가 이동욱과의 대화
“전율(나에겐 아름다움) 주는 작품 만든다”
Q. ‘무한주’는 세 명의 작가가 함께 하는 전시다. 개인전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다.
A. 권오상, 김인배 작가는 같은 시기에 아라리오갤러리에서 함께 했던 작가들이다. 일반적인 그룹전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한 전시에서 다양한 작업들을 볼 수 있으니 관객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다.
Q. 이동욱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조각의 부피와 무게감을 벗어났다. 개인의 취향을 공적 영역에 끌고 들어왔고, 미시적 영역에서 거시적 내러티브를 찾아낼 수 있게 했다. 보편적인 미를 벗어난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점은 조각(미술)의 범주를 해체, 확장시켰다. 덧붙이자면 다양한 오브제와 결합된 인체는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혼종을 연상시킨다. 혼종성은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다. ‘숲(Forest)’(2018)에서는 현대인과 세상의 연결고리인 인터넷망이 생각나기도 했다.
A. 혼종성을 생각하며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숲’의 경우 처음부터 숲을 만들고 인간을 넣어야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나무의 형태 그 자체가 흥미로웠다. 나무 단위 하나하나가 매력적이었다. 두 개를 결합해도 하나, 세 개를 결합해도 하나의 구조물이 되었다. 나무의 형태에 집중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엉킨 나무 속에 인간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미술이 다수에게 보편적 아름다움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시선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라 이 주제에 대해 말하다 보면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A.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의 형상이 누군가에게 기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작품의 형태, 색, 공간 구성 등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나의 기준을 정확히 언어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전율이 인다’거나 ‘멋지다’는 느낌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작업을 할 때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으니 조금 덜 불편하게 바꿔야겠다’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면 전시를 하지 않으면 된다. 작업 당시에 충분히 몰입했는지, 결과물이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지가 우선이다. 공포스럽거나 잔인한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나는 전율이 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작업할 뿐이다. 결과물이 나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기대와 상상이 작업을 시작하고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Q. 2012년의 개인전, ‘러브 미 스위트(Love Me Sweet)’(2012)에 소개된 ‘지켜야 할 영광과 지우고 싶은 과거(Engraved Glory Indelible Past)’(2012)에서는 케이지 안에 살아 있는 새와 트로피가 함께 넣어졌다. 전시 기간 중 트로피는 새의 배설물로 더럽혀졌다. 흐르는 시간, 역사, 생성과 소멸 등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현재 이 작품은 어떤 상태인가?
A. 새의 배설물은 석회질에 가깝기 때문에 특별히 습도가 높지 않다면 부패하지 않고 화석처럼 굳은 상태로 보존된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현재 안전하게 잘 보관 중이다(웃음).
Q. ‘트로피(Trophy)’(2018), ‘부족한 결합(Insufficient Combination)’(2018) 같은 작품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결합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신작에서는 시각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했는데 각각의 형상이 상징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개별 형상들이 독립적으로 담아내는 의미는 없는가? 관객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별개로 작가의 입장을 듣고 싶다.
A. 이분법적으로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오브제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지만 모든 오브제에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개별 형상들에 심각하게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지만 허투루 들어온 형상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 나약한 인간, 괴로운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특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 그것이 담아내는 이야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하고 감상해줬으면 좋겠다.
Q. ‘부족한 결합’, ‘완벽한 결합(Perfect Combination)’(2018)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시각적으로 ‘부족한 결합’은 오브제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완벽한 결합은 상대적으로 통일된 덩어리라는 느낌이 든다. 획일화된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하다. 일상에서 ‘부족한’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가치를 담아낸다.
A.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결합’이란 단어다. 많은 작품의 제목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앞의 형용사는 각각의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부족한’이란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고, 결합의 종류를 표현한 거다.
Q. 신작인 ‘결합을 위한 결합(Combination for Combination)’(2018), - 특히 - ‘브릭(Brick)’(2018)과 같은 작품은 SF적인 느낌이 든다. ‘브릭’에서는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의 ‘기계적 두상 - 우리 시대의 정신(Mechanical Head - The Spirit of Our Age)’(1919)이 연상되기도 했다.
A.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그와 같은 분위기가 풍기게 되었다. 브릭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형상과 형상을 서로 연결시키는 도구의 역할을 생각하며 작업했다.
Q. 이동욱의 작업은 극사실적인 인간 형상을 다루고 있음에도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크지 않음에도 공간을 압도한다. 이번 전시 ‘무한주’에 소개된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관련해 두 가지 질문을 하겠다. 본인을 극사실주의 작가라 불러도 괜찮을까? 혹시 작품의 물리적 규모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는가?
A.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싫지는 않다. 내 작업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다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사실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로만 한정 짓는 것은 싫다. 그러면 공허해진다. 인체를 잘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움과 만족을 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술력 자체에 집중하면서 작업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 예술이다. 나의 작품에 관념적 인간이 아니라 현존하는 진짜 인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와 같이 표현했다. 익숙한 전통적 인체상에 반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한편 작품이 커질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개별 오브제가 커질 수도 있을 것이고, 개별 오브제들의 크기는 유지한 채 그것들의 결합(군집)이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성은 늘 열어놓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