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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27) 작가 박혜민]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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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39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19.06.03 09:12:55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박혜민의 작업은 따뜻하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작업을 마주하면 항상 온기가 느껴진다. 작가가 진행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며,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 소통, 공유를 위해 박혜민은 꼼꼼히 수집한 자료들을 예민하게 조율하여 현실과 허구, 예술과 일상을 넘나드는 유희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시스템, 예술을 둘러싼 경제적 담론들, 다문화주의와 같은 이슈들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관객들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반응하고 행위하며 이야기를 생산한다. 그것은 다양성과 차이가 받아들여지는 열린 결말을 향하는 이야기다.


“작업의 의도나 의미보다 관객과의 ‘과정’에 초점”
박혜민 작가와의 대화


Q. 작품 ‘HPARK 여행사’(2013-2015)는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인도, 중국, 아프리카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허구의 도시 쑤이(중국), 씨올라(인도), 씨엘루르(아프리카)를 관광할 수 있는 여행상품과 가이드북을 제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상의 도시를 만들었다기보다 서울에서 한국이 아닌 국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여준 것에 가깝다. 작업 중 한국에서 현지화되거나 재해석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일종의 사이 공간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세계 각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실제 장소를 여행한다 해도 해당 국가나 지역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HPARK 여행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A. ‘HPARK 여행사’는 조사를 통해 특정한 국가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그 국가의 특색이 많이 드러나는 국내의 장소들을 찾아간 것이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보유하는 커뮤니티(community)를 방문하고, 경험하고, 공유하는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해당 국가를 잘 이해해보자는 것보다 서울에 이처럼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경험해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문화를 여행이라는 매개를 통해 유희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문화와 문화가 완전히 섞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 공존하는 것이다. 모자이크나 점묘법이 멀리서 볼 때는 모든 색이 섞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각자 자신만의 색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HPARK 여행사 - 걸어서 세계로: 중국 쑤이편’, 10:12min, 2013, ⓒ박혜민

Q. 한국에 다양한 민족성과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궁극적인 목표(이유)는 무엇인가?

A. 원론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유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무언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작업이, 거창하게 말하면 예술이 드라마틱하게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어떤 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지점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지점들을 만들고자 했다. 나의 작업을 재미있어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어느 순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의 문화를 다시 보고, 이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박혜민 작가

Q. 송은아트스페이스의 전시 ‘Brussels in SongEun: Imagining Cities Beyond Technology 2.0’에서 선보인 ‘보통의 국가들’(2016-ongoing)은 워크숍을 통해 참여자들 모두가 살고 싶은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프로젝트다. 현재까지 몇 개의 국가가 만들어졌나?

A. 2016년 오스트리아의 쿨투어 콘탁트(Kultur Kontakt)라는 레지던시에 머무를 때 시작한 프로젝트다. 국내외의 사회정치적인 상황들을 보면서 어떤 것이 정말 이상적인 국가인지, 특히 개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시스템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당시 오스트리아 한인 2~3세인 초등학생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과 각각의 워크숍을 진행했고 현재까지 총 네 개의 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지금은 텍스트와 워크숍 영상뿐이지만 작업이 더 발전하면 다른 방식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HPARK 여행사: 가이드북’, 2013, ⓒTotal Museum Press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Q.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지도 궁금하다. 워크숍 참여자에 따라 국가 시스템의 성격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모두가 살고 싶은 국가이기 때문에 만들어낸 국가들 사이에 꽤 많은 교집합이 생길 수 있다.

A. 오랜 시간 토론을 하다 보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8~10회 정도 진행되는 워크숍의 과정이 꽤 길다. 간단히 설명하면, 첫 워크숍에서는 참여자 개개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 시스템을 구성하여 발표한다. 두 번째 워크숍에서는 개인이 만든 국가 시스템이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원하는 국가 시스템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어떻게 수정, 대처해야 할까? 당신의 국가는 다른 국가의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참여자들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조금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세 번째 워크숍부터는 참여자들끼리의 토론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참여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쉽게 되는 부분도 있고 때로는 격렬한 언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구현된 네 개의 국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을 갖고 있다. 연령대, 지역,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사회문화적 특성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에게는 이상적인 법칙이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두가 매우 흥미로웠다.
 

‘밥 먹고 가세요’, 퍼포먼스, 수봉다방, 2015 ⓒ박혜민

Q. 제목이 왜 ‘보통의 국가들’인가?

A. 제국주의 시대 때, 제국주의 국가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보통의 국가(ordinary nation)이다. 누구도 강제적으로 지배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국가를 생각했고, ‘보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Q. 많은 작업에서 관객 혹은 대중의 참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식 재료가 그려진 그림들을 관객들이 가져온 실제 음식 재료와 교환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밥 먹고 가세요’(2014~15)나 이케아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그려진 그림을 실제 상품의 가격으로 판매한 ‘이케아(IKEA) 프로젝트’인 ‘이케아 한국’(2012), ‘이케아 런던(London)’(2010)도 그렇다. 특히 ‘이케아 프로젝트’는 예술의 창조(생산), 경제적 가치, 판매 등과 관련된 이슈들을 생각하게 한다. 당시 제일 비싼 작품의 가격은 얼마였나?

A. ‘이케아 프로젝트’의 경우 전시된 작품(드로잉)과 그것을 판매하고 사는 행위까지 모두 작업에 포함된다. 그래서 작품 정보에 퍼포먼스라 기재한다. 사람들은 이케아의 상품이 그려진 드로잉을 정말 다양한 이유로 구매한다. 컬렉터에 따라 그것이 하나의 작품일 수도 있고, 장식품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술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이처럼 다양한 층이 공존하는 게 재미있다. 당시에 제일 싼 작품은 900원이었고, 제일 비싼 작품은 400만 원이었다. 작품의 가격이 비싸다고 작품이 크거나 오래 그린 것은 아니었다. 모두 이케아에서 판매하는 가격 그대로였다.
 

‘보통의 국가들’, 프로젝트, 설치 전경(KF gallery), 2018, ⓒ박혜민

Q. 작업이 다정다감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작업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는 작업의 경우에도 따뜻함이 느껴진다. 의도한 것인가?

A. 의도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나의 작업 대부분이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에서부터 시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매체를 선택할 때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대화하기 쉬울까?’라는 생각을 우선시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질문이나 이야기를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이 돌아오는 상황들을 경험할 때,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
 

‘IKEA(Korea)’, 캔버스에 펜, 퍼포먼스, 12.5 × 12.5cm(each), 2012, ⓒ박혜민

Q. 한 작가의 작업을 아우르는 통일된 이야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혜민의 작업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혼종성, 다문화, 탈식민주의, 국가, 시스템, 공공성, 상호소통, 예술과 일상의 경계 해체와 예술 자체에 대한 고민 등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매체로 담아내고 있다. 본인의 작업 기저에 깔린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A. 나의 작업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마주하는 상황(환경)에 영감을 받아 시작된다. 이 경우 다소 즉흥적이다. 예로 런던과 베를린에서 진행했던 'Clearance Exchange'(2012, 2016)를 들 수 있다. 이 작업은 내가 해당 도시를 떠나면서 한국에 가져가지 않는 물건과 그것을 그린 관객들의 그림을 맞교환한 것으로, 꽤 오래 머물렀던 장소를 떠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보통의 국가들’이나 ‘HPARK 여행사’처럼 계획에 기반해 긴 호흡으로 가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특징으로 실재와 허구를 오가면서 현재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관계 맺기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기억과 경험들을 공유하는 순간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작업은 내가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내 작품은 나의 발언이다. 사실 나는 작업을 설명할 때 작업의 의도나 의미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들이 자유롭게 읽길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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