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C현대산업개발(이하 HDC현산)이 지난 12일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의 우선협상자로 결정되면서 아시아나항공은 30년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됐다. HDC현산 정몽규 회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아시아나’가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가치를 고려해 회사명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HDC현산 관계자에 따르면,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의 로고, 즉 CI(기업 아이덴티티)는 교체하는 것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나항공의 새로운 거취는 올해 재계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기에 이와 관련한 그룹 총수의 발언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집중됐고, 많은 관련기사가 보도됐다. 그런데 새로 인수할 자회사의 CI 교체 문제를 총수가 첫날부터 직접 챙기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어서, 그 배경이 궁금해진다.
‘금호의 날개’는 떼어내야
현재 아시아나항공이 사용하는 CI는 ‘아시아나항공’이라는 짙은 회색의 로고타이프(Logotype)에 빨간색 꺾쇠 모양의 단순한 심벌(Symbol)이 더해진 형태다. 많은 항공사 CI에 달린 날개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나항공의 빨간 꺾쇠 심벌도 ‘윙’(wing)이라고 불린다.
아시아나항공이 매물로 나온 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유력 인수 후보로 거론된 여러 대기업들의 CI를 활용해 만든 가상의 새 아시아나항공 CI가 올라왔고, 누리꾼들의 평가를 받았다. 이들 사이에서 아시아나항공의 기존 CI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윙이 매우 단순한 형태임에도 위로 날아오르는 날개로 보이며, 이것이 항공사라는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런데 이 윙은 아시아나항공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핵심 자회사임을 나타내는 심벌이기도 하다. 금호산업, 금호고속 등 금호아시아나그룹 자회사는 모두 기업명 로고타이프에 윙을 달고 있는 CI를 사용한다.
윙은 이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CI에서 '금호'의 영문 이니셜 'K'의 형태를 변형한 것이다. 이전 CI에도 이 K가 꼬리날개 형상을 하고 있어 항공업을 영위하고 있음이 잘 드러났지만, K때문에 '금호'의 이미지만 강하고 '아시아나항공'의 비중이 작은 느낌이다.
반면 바뀐 CI의 윙은 '금호'의 한글 초성인 'ㄱ'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시아나의 영문 이니셜 'A'로 보이기도 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라는 그룹명이 잘 반영됐다. 즉, 금호아시아나그룹 내 아시아나항공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가 윙에 드러나있는 셈이다.
따라서 HDC그룹 소속의 아시아나항공은 이 CI를 꼭 바꿔야 한다. 2조 이상을 베팅해 인수하는 항공사의 항공기가 예전 소속 그룹의 심벌을 달고 전 세계 하늘을 누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HDC현산 그룹에도 자회사마다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CI 요소가 있으니, 단순히 교체하는 것이라면 일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업계는 인수 절차가 연내 마무리되더라도 새 CI가 온전히 적용되는 것은 내년 1분기 이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한 항공기 80여 대의 외관을 새로 래핑하는 일정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CI 교체 언급은 이를 대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가 전부일까?
아시아나항공의 정체성이 HDC현산 CI와도 어울릴 지는 단순히 CI를 교체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CI는 해당 기업뿐 아니라 소속 그룹의 사업 영역에 관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소통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의 기존 CI는 이러한 정체성이 알차게 함축되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면을 고려해 보면 정 회장이 아시아나항공의 새 CI 문제를 거론한 데는 HDC현산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HDC현산과 아시아나의 시너지, 있을까?
이번 인수를 바라보는 일부 부정적인 시각을 통해 HDC현산의 정체성 고민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것을 두고 ‘승자의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근거는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데, ▲부채가 많은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따른 금전적 부담이 너무 크고 ▲현재 글로벌 항공업 여건이 매우 좋지 않으며 ▲건설업과 항공업의 이질감이 뚜렷해서 기대되는 시너지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 등이다. 특히 세 번째 근거는 HDC현산과 아시아나항공의 CI 문제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발표 이후인 15일, HDC현산과 지주사인 HDC를 신용등급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인수에 따른 유동성 감소 및 차입금 증가로 신용도에 부담을 줄 수 있고, 아시아나항공의 실적 변동성과 국내 항공산업의 부정적인 영업환경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건설업과 항공업의 시너지는 제한적”이라는 부정적인 전망 한마디를 더 보탰다.
또 DB금융투자는 “주택 사업의 부침이 크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이 풍부해진 건설사가 인수합병(M&A)이나 신규사업 진출을 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건설업의 경기 민감도를 낮출 수 있는 산업의 정답이 항공업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부정적인 전망은 HDC현산의 본업이 건설업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는 반면, 긍정적인 전망은 HDC현산의 사업이 건설업 외에도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 있으며, 특히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그 다양성이 더욱 뚜렷해지게 됐다는 점을 근거로 둔다.
‘비 건설업’ 확대하는 HDC현산
정 회장은 12일 기자간담회에서 "국가 기간산업인 항공산업이 HDC현대산업개발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부합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입찰에 참여했다"고 인수 이유를 설명하고, “HDC현대산업개발은 앞으로 항공산업뿐이 아닌 모빌리티 그룹으로 한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 관련 실무를 진두 지휘한 HDC현산 정경구 경영지원본부장(CFO) 역시 배경에 관해 “본업인 건설업보다 항공업의 리스크가 작다고 판단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기존 건설업과 항공업의 시너지’라는 것은 HDC현산이 이번 인수전에 참가하면서 기대한 효과와 상관이 없고, 오히려 항공업체 인수를 통해 건설업 중심의 사업 영역을 벗어날 것을 노렸다.
HDC현산은 토목건축공사업 시공능력평가 10위 안에 드는 우리나라의 메이저 건설업체 중 하나지만, 다른 대형 건설업체들과는 다소 다른 사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 리스크가 많은 해외 플랜트 사업 대신 국내 아파트사업 중심으로 사업을 해 오고 있다.
또 HDC현산은 본사가 위치한 용산역과 그 일대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오고 있고, 현재는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HDC현산은 자신들이 ‘타운 비즈니스’라고 정의하는 ‘거점 중심의 부동산 종합 개발 사업’에 더욱 집중하고 있으며, 이를 본격화하기 위해 지난해 637억 원에 부동산정보회사인 부동산114도 인수했다. 업계 관계자는 ”건설업체가 단순한 시공업체를 벗어나 땅을 직접 고르고, 매입하여 복합 주거시설 개발로 이어가는 ‘디벨로퍼’로 변신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HDC현산은 아이파크몰을 통해 유통 분야에도 진출했고, 2015년에는 신라호텔과 HDC신라면세점을 열며 면세점 사업도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또 서울 강남의 ‘파크하얏트’와 부산 해운대의 ‘파크하얏트 부산’ 등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 8월에는 한솔오크밸리 리조트의 운영사인 한솔개발의 경영권도 인수하는 등 비건설업 분야, 특히 유통·레저 등이 포함된 소비자 상품 사업으로의 확장 노력을 지속해왔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HDC현산이 최근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온 리조트, 호텔, 면세점 등의 사업과 당장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또한, 디벨로퍼의 역량에 따라 유통, 물류, 레저 콘텐츠가 확대되면, 이를 항공업과 연계하는 다양한 사업 모델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한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도약’이라는 비전을 밝혔다. 이를 두고 다수 매체는 정 회장이 아버지 고 정세영 명예회장과 함께 과거 현대자동차를 이끌었던 이력이 있었던 것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했다.
HDC현산은 용산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으며, 광운대역 일대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이들은 부동산 사업일 뿐 아니라 ‘역’을 중심에 둔 모빌리티 인프라 사업이기도 하다. 또한, HDC현산은 현재 부산신항의 지분과 운영권을 가지고 있으니, 또 다른 모빌리티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항공사를 보유하게 되면 철도, 해운에 항공까지 모빌리티 사업 인프라를 다양하게 갖추게 된다.
이처럼 HDC현산의 정체성은 최근 몇 년 동안 변화해 왔고,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다른 차원으로 올라가게 하는 중요한 도약대인 셈이다.
HDC현산 CI의 의미는
그럼, HDC현산의 CI는 어떤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을까? 현재 쓰고 있는 CI는 별도의 이미지 심벌 없이 ‘HDC’ 세 영문자로 이루어진 빨간색 로고타이프를 사용한다.
HDC현산의 설명에 따르면 HDC 로고타이프 디자인은 영어 대문자 I의 형상을 기하학적 뼈대로 삼고 있다. HDC의 첫 글자 H는 I와 I를 연결한 형태이고, 두 번째 글자 D도 I의 형태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I는 ‘innovation’(혁신)의 첫 글자로, 현대산업개발이 1999년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뒤 2000년부터 사용한 CI이다. 아파트 브랜드인 아이파크를 비롯해 아이투자신탁(현 HDC자산운용), 아이앤콘스(현 HDC아이앤콘스) 등 자회사 및 관계사 명칭에도 I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2012년 본사를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기업명을 HDC현대산업개발로 바꿨고, I의 형태를 발전시켜 HDC 로고타이프 CI를 새로 만들었다.
이처럼 과거 독자적으로 CI를 구성했고, 현재 HDC 로고타이프의 핵심 구성요소인 ‘I’의 디자인은 공간 건축의 기초 요소인 기둥과 보를 형상화한 것이다. 즉, 건설업체라는 정체성을 담아 만든 CI이다. 정 회장의 최근 CI 교체 언급에 관해 보도한 매체 중에는 이 로고타이프의 붉은색 H가 건설자재인 ‘H빔’을 연상시킨다는 한 시각다자인학과 교수의 의견을 인용한 곳도 있다.
건설업이라는 사업 영역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I’를 내세웠던 CI는 기존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그룹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 ‘현대산업개발’의 약자인 HDC를 CI와 사명에 도입한 것은 현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HDC 로고타이프 CI에 관해서는 ‘연결’의 의미를 강조했다. 특히 첫 글자인 H가 I와 I를 연결한 형상이라고 설명하면서 “공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 사람과 사람을 이어줌으로써 안락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5월 1일부로 HDC현산은 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새롭게 정비하고, 그룹 CI를 자회사 및 관계사명에 일괄적으로 반영했다. 당시 HDC현산은 이에 대해 ‘그룹 정체성’과 ‘사업 영역 연결’ 강화의 차원이라고 밝혔다.
아시아나항공도 다른 자회사처럼 ‘HDC아시아나항공’이라는 사명과 통일된 CI를 갖출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일부 매체의 지적처럼 HDC 로고타이프 CI에 건설업의 이미지가 뚜렷해서 아시아나항공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이를 억지로 추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회사 중 부동산114와 서울춘천고속도로는 HDC 로고타이프를 사용하지 않는다. 부동산114는 인수되기 전 사용하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되 색상만 HDC현산 그룹 고유의 색상으로 변경했다. 서울춘천고속도로는 그룹 통합 CI의 I 및 H와 시각적인 유사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고속도로 운영사라는 정체성이 드러나도록 디자인된 별도의 심벌을 사용한다.
새 아시아나항공 역시 이처럼 그룹 소속감과 사업 정체성, 그리고 고유의 브랜드 가치를 모두 담은 별도의 새 CI를 디자인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