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4호 윤지원⁄ 2020.04.20 09:28:42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과 그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기조에 따라 자동차 마케팅의 세계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수만 명의 관람객을 한 데 불러 모으던 초대형 국제 모터쇼가 취소되고, 기업 1년 밥벌이를 책임질 신차 발표회 일정마저 꼬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무대와 전시장을 떠나 온라인 공간에서 펼치는 ‘언택트 마케팅’(Untact Marketing)에 집중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혼다, 아우디 등은 자사의 오랜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이나 유서 깊은 생산공장에서 시행하던 견학 프로그램을 온라인 무대로 옮겼다. 또 페라리, 람보르기니, 맥라렌 등은 구글맵의 실내 스트리트뷰 서비스를 통해 전시장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보며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편히 누운 채 손바닥 위에서 세계적인 명차 전시장들을 간편히 둘러볼 수 있다니, 집에 갇혀 보내는 시간이 마냥 단조롭지만은 않다.
폭스바겐 가상 모터쇼 “2020년 기술 맞나?”
이달 초 폭스바겐 그룹은 취소된 제네바 모터쇼를 대신해 사이버 공간에 폭스바겐만의 대규모 모터쇼 부스를 가상 현실로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버추얼 모터쇼’(Virtual Motor Show)라고 이름 붙인 이 쇼는 4월 3일부터 17일까지 2주간 공개됐다.
사용자는 마치 모터쇼 전시 부스처럼 배치된 버추얼 모터쇼 무대를 이곳저곳 다니며 폭스바겐에서 출시된 모든 차량을 인터랙티브 디지털 방식으로 구경할 수 있다. 게다가 실제 모터쇼에서는 불가능한 온라인 가상 세계만의 마법도 체험할 수 있다. 전시된 차량의 색상이나 휠 구성을 사용자 취향대로 바꿔 적용해볼 수 있고, 나아가 별도의 등록 페이지를 통해 개별 견적과 제안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아쉽게도 2020년에 어울리지 않게 심하게 떨어지는 기술적 완성도는 문제가 많다. ‘정글북’, ‘라이언킹’같은 동물 애니메이션을 실사 극장판으로 제작할 정도의 시대에, 버추얼 모터쇼 공간의 형편없이 떨어지는 그래픽 품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실제 자동차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불편함만 느껴진다.
카메라 시점 이동의 조작감과 반응 속도마저 형편없다. 1990년대 컴퓨터 게임보다 못하다, 폭스바겐의 IT 기술 수준이 의심될 정도다. 차라리 사진과 동영상을 평범하게 모아놓지 왜 이런 시도를 했을까 싶다. 소비자를 위한 새로운 서비스가 아니라 기만하려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신차 발표회, 온라인에서 담백하게
한편, 완성차 업체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신차 발표회 풍경도 바뀌었다. 포르쉐는 3월 3일 신형 911 터보 S를 포르쉐 뉴스 홈페이지 및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온라인 생방송으로 신차 발표회를 열었다. BMW도 콘셉트 i4를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공개했다.본래 3월 5일 개막 예정이던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할 예정이었던 신차들은 이처럼 급히 온라인 신차 발표회로 돌아섰다.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차, 기아차, 제네시스도 각각 신형 아반떼와 4세대 쏘렌토, 올뉴 제네시스 G80 등 신차들의 월드 프리미어 행사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캐딜락코리아도 XT6의 국내 론칭 행사를 온라인을 통해 진행했다.
먼저 캐딜락코리아는 3월 16일, 공식 홈페이지와 유튜브 등 SNS 채널을 통한 온라인 생중계로 대형 SUV XT6를 공개했다. 국내 일일 확진자 증가 수가 100명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기다.
행사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캐딜락 하우스에서 열렸다. 캐딜락코리아의 주요 행사가 늘 열리던 곳이다. 열한 달 전에는 플래그십 세단 ‘리본 CT6’ 론칭 파티가 열린 장소다. 그땐 젊은 연예인들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게스트, 기자단, 관객이 모여 시끌벅적한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다.
화려한 조명, 드라이아이스 연기, 소개 영상 등을 총동원한 무대 연출은 그때나 이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터스포츠 감독이기도 한 가수 겸 방송인 김진표가 무대에 올라 직접 차의 디자인과 실내공간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만, 파티가 없고, 게스트와 관객이 없고, 축하와 기대에 찬 박수가 없는 점이 예전과 달랐다.
‘유튜브’ 적극 활용한 현대·기아차
기아자동차도 원래 제네바모터쇼에서 4세대 쏘렌트를 공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터쇼 취소로 장소도, 일정도, 프로그램도 모두 사라지게 됐다. 기아차는 대신 3월 17일 오전. 포털사이트 네이버,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생중계로 4세대 쏘렌토를 공개했다.
무대가 아닌 방송이라는 점을 감안한 듯 평범한 신차 발표회와는 달리 토크쇼 형식으로 짠 구성이 독특했다, 사장이나 디자이너 등 고위급 임원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대신 방송 전문 MC인 공서영 아나운서와 개그맨 김재우 등이 진행을 맡은, 팟캐스트나 ‘보이는 라디오’ 형식, 또는 버라이어티 TV 예능을 연상케 하는 토크쇼였다.
기아차 고위급 임원은 출연하지 않았다. 대신 국민대학교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권용주 교수와 카레이서 강병휘 선수 등이 패널로 배석했고, 김택균 외장디자인 2팀장, 이동열 국내마케팅팀장, 서하준 국내 상품운영팀장 등 실무자들이 자세한 정보를 설명했다.
특히, 프로그램 내의 한 코너처럼 강병휘 선수의 시승 영상도 삽입됐는데,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시승영상처럼 제작된 것이 독특했다. 다만, 코너의 분량이 짧았는데도, 주행 성능보다 새로운 편의 사양 소개에 치중한 편으로, 실시간 시청자들은 "시승기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적지 않게 했다.
기아자동차는 또 ‘기아 Play AR’이라는 신규 앱을 통해 4세대 쏘렌토를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 앱은 증강현실과 정교한 3D 그래픽 기술을 이용한 것으로, 스마트폰을 이용해 원하는 장소에서 차량을 실물 크기로 소환해 외관과 실내, 트렁크, 엔진룸 등을 구석구석 자세히,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이 앱은 스마트폰용 인기 자동차 레이싱 게임인 ‘CSR2’에 포함된 AR 기능을 따로 추출한 것처럼 비슷한 느낌이다. CSR2의 해당 기능은 실내 인테리어나 시트의 질감까지 전달될 정도로 정교한 고퀄리티 그래픽으로 호평받고 있다. 기아차는 이 앱이 출시 5일 만에 누적 다운로드 1만 건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무대 일정 취소 대신 무관중 생중계
쏘렌토 토크쇼가 공개된 다음 날인 18일에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LA 할리우드에서 신형 아반떼(수출명 엘란트라)의 월드 프리미어 이벤트를 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무렵은 미국 내 누적 확진자가 막 1000명을 넘긴 시기였기에 대규모 오프라인 이벤트를 강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아반떼는 현대차의 오랜 수출 효자 모델이며, 이번에 나온 올 뉴 아반떼는 5년 만에 완전변경된 7세대 모델이다. 이에 현대차는 공개 날짜와 장소, 프로그램 구성 등을 굳이 바꾸지 않았다. 같은 무대에서 발표회를 진행하되, 무관중 형식으로, 현대차 홈페이지 및 유튜브 채널을 통한 온라인 생중계로만 공개했다.
대형 콘서트장 규모의 무대에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이자 미주권역담당 호세 무뇨스 사장이 올라 신차를 소개하고, 다수의 무용수가 현란한 와이어 쇼를 펼치고, 차량·출연진과 한치 흐트러짐 없이 어우러진 정교한 프로젝션 매핑까지 동원되는 등 수억 원대 예산이 투입된 대대적인 신차 발표회였다.
하지만 평소라면 관중석에서 기대 및 흥분에 찬 박수와 환호, 플래시 세례를 쏟아낼 수천 명의 기자단 및 업계 관계자들은 없었다. 발표자들의 목소리는 텅 빈 극장 안에서 메아리쳤으며, 잠시 침묵하는 틈에 공연에 사용된 무대장치를 철수하는 소음이 섞여 들리기도 했다.
아반떼 ‘언박싱’과 제네시스 신차 영상 공개
4월 7일에는 국내 출시를 맞아 디지털 언박싱 영상도 공개했다. 새로 배달된 물건의 포장을 풀어보며 그 설레임을 공유하고, 관련 정보를 전하는 언박싱 리뷰는 유튜브 등 온라인 영상 플랫폼에서 매우 익숙한 포맷이다.
그런데 현대차의 이 영상은 타이틀만 언박싱이고, 구성은 기아차 4세대 쏘렌토 공개 영상의 토크쇼와 닮았다. 영상에는 자동차 전문 블로거, 카레이서, 현대차 디자이너 등이 출연해 문답 및 체험 형식으로 다양한 내용과 정보를 전했다.
제네시스도 G80의 7년 만의 완전변경 모델을 내놓았다. 본래 대규모 신차 발표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역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3월 30일 디지털 월드 프리미어 론칭 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오프라인 론칭 행사를 대신했다.
1분짜리 광고 영상으로 시작하는 G80 론칭 영상은 현대자동차 디자인 센터장인 이상엽 전무가 디자인을 직접 소개하고, 연구개발본부장인 알버트 비어만 사장이 상품성을 직접 소개하는 게 전부인, 군더더기 없이 간단한 구성의 약 11분짜리 영상이다.
앞서 쏘렌토, 아반떼 신차 발표회와는 달리 무대도, 생방송도 없이 사전 제작한 영상만을 공개했고, 미디어 및 고객과의 실시간 소통은 없었다. 어찌 보면 신차를 내놓을 때마다 늘 만들던 프로모션 필름과 큰 차이가 없는데, 어차피 온라인 생중계라고 해도 실제 현장 행사에서와 같은 생동감과 흥분 등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바에야 군더더기 없는 이런 형식이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도 속 소통 부재 아쉬워
쏘렌토 ‘보이는 라디오’ 토크쇼와 아반떼 언박싱 영상은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이용자들에게 친근한 포맷이다. 새로운 마케팅 무대에서 새로운 소비자층을 만나는 만큼 기업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기업의 고민과 실제 시청자 사이에는 뚜렷한 온도차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영상에는 “대본 읽는 티가 심하다”, “회사가 써준 대로 하려니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카레이서의 시승 리뷰가 일반인 리뷰보다 못하다”라는 등 시청자들의 비판 댓글이 적지 않게 따랐다. 유튜브에 익숙한 이용자를 배려하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어설픈 따라하기라는 평가를 받는 데 그친 것이다.
차량 화제성에 비해 행사 영상의 화제성도 떨어졌다. 신형 아반떼의 광고 영상들은 150만 회, 220만 회나 조회된 데 비해 디지털 언박싱 영상은 공개 후 열흘가량 지난 4월 16일 기준 조회수 15만 5천 회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자동차 전문 유튜브 채널의 신형 아반떼 리뷰, 시승 영상 중 같은 기간 20만 회 이상 조회된 영상이 국내에만 18편이나 되며, 50만, 60만 회 이상 조회된 영상들도 다수다. 신차 정보를 얻는 창구로 제조사보다 유튜브 리뷰어들이 신뢰받는 현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유튜브 콘텐츠는 광고처럼 포장된 정보, 뉴스처럼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보다 해당 채널 및 크리에이터의 주관과 개성이 더욱 중요하고, 무엇보다 시청자와의 긴밀한 소통이 중요하다”며 “온라인 라이브는 많은 소비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귀한 기회인데 업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 준비된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데 치중했다. 그건 유튜브 화법이 아닌, 홈쇼핑 화법”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했다.
최근 완성차 업체들의 온라인 이벤트는 코로나19라는 재난에 따라 급조된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어도 언택트 비즈니스의 세계는 급속도로 확장되는 추세다. 세계적인 모터쇼들의 관람객 수 역시 해마다 줄어들고 있었음에도, 새로운 트렌드와 미래에 대한 자동차 업계의 대비가 얼마나 미흡했는지가 이번 판데믹 사태로 드러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