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이끄는 보수당의 새 이름으로 ‘국민의 힘’이 유력시된다는 말을 듣자 필자는 “아, 그 국민!”이라면서 옛날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8년 전 그와 나눈 대화에서 “국민의 힘”이라는 인상적인 말을 그로부터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2012년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4월, 필자는 김 위원장의 서울 부암동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대화를 일부 소개한다.
최: 지난 총선(2012년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기니 재벌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이겼다고 재벌들이 만세 부를 이유는 하나도 없다. (중략) 그간 재벌들은 정치권을 무시해 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국민의 힘으로 결국 재벌이 무릎을 꿇게 된다.
최: 재벌이 국가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정책으로 재벌을 이길 수 없다는 진단도 나오는데?
김: 1990년대 들어 경제 세력이 정치 세력을 능가했고, 21세기 들어와서는 재벌통치 시대가 돼 버렸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국민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서 국민의 위임을 받으면 대통령이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진보의 주장을 보수가 미리 선점하지 않으면 (국가) 유지가 안 된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지론은, ‘진보적 의제를 보수가 선점해 보수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재벌개혁 등 진보적 과제를 보수당이 밀고 나가되 정 안 되면 국민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김종인 위원장의 입에 붙어 있는 "국민의 힘으로"
미래통합당의 당명이 ‘국민의 힘’으로 확정된다면, 2012년 대화를 돌이켜볼 때 김 위원장이 이 당명을 소신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2012년이라면 김 위원장이 ‘경제민주화’라는 선명한 기치를 들고나와 당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해다. 경제민주화란 개념에 대해 당시 새누리당 관계자 중에는 “경제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개념”이라며 폄하하기도 했지만, 당시 김종인판 경제민주화는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물론 경제민주화 구호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아니 이미 당선되기 이전부터 이미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싹 지운 듯 했지만….
선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 위원장이지만, 선거 뒤 경제민주화가 ‘아주 찬밥’이 됐을 때 그의 행적을 돌이켜본다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민주화가 선거용 구호가 아니라 그의 지론이었다면, 박근혜정권 집권 뒤 경제민주화가 헌식짝처럼 버려질 때 김 위원장이 조용히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정권 당시 진영 복지부장관은 국민연금 제도가 복지부장관의 의견을 묵살한 채 이상한 형태로 변형되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후 민주당 행을 택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 리더로서 소신 주장을 펼친 뒤에 정당한 주장이 부당하게 내팽개쳐지면 발설자-주창자로서 뭔가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게 바로 ‘선비 정신’이다. 그러므로 당시 김 위원장이 박근혜정권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실상 폐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조용히 있었기에 필자는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는 해야 하지만 안 되면 할 수 없고 정도의 개념이었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힘'이 '선거용 좌파 의제선점'에 머물지 않으려면
‘국민의 힘으로 하면 된다’는 김 위원장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김 위원장의 이런 과거 행적을 떠올리면, “이번의 ‘국민의 힘’이란 당명 역시 선거용 ‘진보 의제 선점’ 차원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여권에선 벌써 그런 의심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의 이낙연 신임 당대표는 1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김종인 미래통합당의 좌클릭’에 대해 묻는 김어준 사회자의 질문에 “(좌클릭은 양당 사이의 논의의 토대를 넓히기에 반갑지만) 광주에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서도 5.18 진상규명에는 협조하지 않고, 기본소득을 주겠다면서 증세에는 반대한다면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며 경고를 날렸다. ‘말로만 그치는 김종인 표 좌클릭’에 대해 평가절하 또는 사전경고를 한 셈이다.
필자는 ‘국민의 힘’이란 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2012년 4월 부암동에서의 인터뷰에서 그가 “안 되면 국민의 힘으로 하면 된다”고 한 발언은 상당히 ‘혁명적’ 색채까지 띈다. 제도권 정치로서 안 되면 국민의 힘으로 뭔가를 이룬다는 건 대단히 근본적이면서도,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구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직전 대통령에 대한 평화적 탄핵도, 결과로서는 평화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밝혀진 국군 기무사의 일부 비밀문서 대로 ‘무력진압과 친위 쿠데타’가 실행됐다면 광화문 일대에 피가 흘렀으리라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힘’, 영어로 ‘피플스 파워(People’s Power)’를 엘리트 또는 사회 리더가 거론하는 현상을, 필자는 ‘서울대 출신이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장면으로 바꿔 연상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서부터 현재 한국의 망국병이랄 수 있는 ‘학벌주의’의 핵심에 바로 “서울대 최고” 상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서울대를 어떤 식으로든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 특히 서울대를 전국 국립대 시스템의 하나로 바꿈으로써 망국적 학벌주의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는 타당성-정당성이 있다.
그런데 서울대 폐지론(유일무이한 최고 대학으로서의 서울대를 없앰으로써 학벌주의를 없애자는 주장)은 타 대학 출신이 하기엔 좀 그렇고(질투로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서울대 출신이 주장하고 밀고나가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자동적으로 생긴다. 서울대를 국립대 중의 하나로 시스템화하자는 주장이 당위론으로뿐이 아니라 실제로 가시화-현실화됐을 때 서울대 출신들이 정말 가만히 앉아만 있겠냐는 소리다.
“국민의 힘”이라는 엘리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힘이 정말로 현실화된다면 여태까지 특권을 누려왔던 엘리트는 상대적 피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발설자는 그런 가능성, 즉 자신이 겨눈 칼날이 자신의 가슴을 향하는 상태까지 상정하면서 발언하고 그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막상 칼날이 자신과 자신의 계층을 향하면 “이건 아니지”라고 주장을 돌이킨다면 그 사람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한 ‘입심좋은 허풍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통합당은 한국의 최고 엘리트, 부자들이 모인 정당이다. 그런 정당의 이름이 ‘국민의 힘’이 된다면, 그 이름에 걸맞게 국민에 힘이 되도록 봉사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의 엘리트주의는 그대로 놔둔 채 명칭만 ‘국민의 힘’ 당이 된다면, 그건 마치 전두환 시절에 관청의 민원실을 ‘위민실(爲民室: 민을 위하는 실)’로 바꾸면서 마치 민(民)을 위한 행정을 하는 듯한 시늉만 하는 꼴이 재현되고 말 것이다.
링컨이 말한 대로 민주주의의 요체는, 민을 위하기도(for the people) 해야지만, 민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기도 하고(by the people), 민의 것(of the people)이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People은 귀족의 반대요, 민의 한자 民은 ‘포로의 눈을 찔러 멀게 함으로써 피가 흐르는 모양’의 상형문자라는 해석이 있다(이중톈 저 ‘중국사 2 – 국가’ 12쪽 참조). 그만큼 people과 民은 낮은 개념이었다. 최고 엘리트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people과 民은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중요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런 민에게 최고 힘을 부여하겠다는, 그래서 그 힘에 굴복하겠다는 ‘국민의 힘’이란 명칭이 보수당으로서는 그만큼 파격이고, 이런 당명을 택한다면 ‘선거용 말로 하는 의제 선점’이 아니라는 점을 행동과 정책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명(名)과 실(實)이 어긋나지 않는다. ‘김종인 표’ 국민의 힘 당명이 확정된다면, 앞으로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