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3호 윤지원⁄ 2021.02.08 09:33:22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내연기관차에 연료를 채우는 공간인 주유소의 운명도 달라졌다. 최근 현대자동차와 SK네트웍스는 기존의 주유소를 전기차 전용 충전소로 탈바꿈시킨 ‘모빌리티 라이프스타일 충전소’를 서울 강동구에 선보였다. 문화경제가 이곳을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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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자리에 충전소 들어서다
지난 1월 21일 서울 강동구 길동에 문을 연 첨단 전기차 충전시설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과 이에 딸린 휴게 시설 ‘길동채움’은 자동차의 원동력이 '화석연료 → 전기'로 바뀌는 전환기에 에너지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상징하는 장소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충전소는 현대차의 350kw 급 고속 충전설비 ‘하이차저’(Hi-Charger) 8기가 설치돼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올해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토대로 개발된 첫 3세대 전기차 ‘아이오닉5’가 곧 출시되는 등 전기차 대중화의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길동채움과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이 먼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본래 SK 직영 셀프주유소였던 곳으로, 기존의 주유소가 주유설비를 모두 철거하고 전기차 충전설비로 교체, 설치해 전기차 전용 충전소로 변신한 국내 첫 사례이기도 하다.
스치듯 잠시 머무르던 주유소와, 긴 충전시간을 ‘때워야 하는’ 전기차 충전소는 특성이 다른 만큼 관련 풍속도가 다르다. 주유소 문화는 과거가 되고 있는 반면, 전기차 충전소는 새로운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사라진 주유 문화와 새로운 충전 문화
출퇴근용 등 자동차를 일상적으로 운행하면 대중목욕탕보다 자주 찾게 되는 곳이 주유소다. 주유소는 동네마다 가장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주유소 습격 사건’이라는 영화가 나올 만큼 친숙하며, 현대인의 삶과 자동차 문화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주유소의 운영 및 이용 행태에는 자동차와 관련된 그 시대 사회상의 한 면이 묻어난다.
주유소에 진입할 때 활발한 손짓과 큰 목청으로 차량을 안내하며 인사하는 주유원들이 익숙할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유원은 흔히 만날 수 있는 직종이었다.
노련한 주유원은 멀리서부터 차종과 유종, 주유구 위치 등을 알아보고 가장 편리한 동선으로 고객을 안내한다. “만땅이요” 아니면 “2만 원어치요”라고 주문하면, 주유를 시작한다. 주유되는 동안 주유원은 카드나 현금을 받아들고 사무실에 다녀온다. 돌아올 땐 영수증 외에 서비스 휴지, 자동세차 쿠폰 등과 함께다. 떠나는 차 뒤로 깍듯한 배꼽 인사가 따라온다. 주유원이 있는 한 고객은 차에서 내릴 일이 아예 없다.
그런데 2010년 전후로 주유소 급증이 경쟁 심화를 낳고, 인건비 부담까지 커지자 셀프주유소가 대세가 되었고, 주유원은 사라지는 직업이 됐다. 불문율인 줄 알았던 서비스 휴지는 언제부턴가 물티슈나 생수로 대체되더니, 그나마 요즘 셀프주유소에서는 서비스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충전소, 고객의 ‘시간’ 채워줘야
한편, 전기차가 늘어나면서 전기차 충전과 관련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제까지 전기차 충전 문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들은 대부분 긴 충전시간과 충전 인프라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집이나 직장 등 주요 차고지에서 일상적으로, 안정적으로 충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큰 불편이 없다. 일정한 충전 거점이 없는 전기차 차주는 수시로 공용 충전 인프라를 이용해야 하는데, 충전에 걸리는 시간을 다른 일로 활용할 방안때문에 고민이다. 업무나 집안일이 아니라면 쇼핑, 외식, 엔터테인먼트 활동 등 소비 활동과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 ‘오래 걸리지만 불가피한’ 전기차 충전이 하나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되었으니, 이 시간의 활용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부족한 공용 충전 인프라에 대한 수요는 그간 온라인 유통업체와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에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기존에 보유한 대형마트, 백화점의 대규모 주차장에 전기차 충전기를 다수 설치하여 충전 여건에 목마른 전기차 이용자들을 매장으로 유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마트는 지난해 말 기준 전국 119개 점포 주차장에서 급속충전기 375기와 완속충전기 155기 등 총 530기의 전기차 충전시설을 갖추고 있다. 롯데마트도 이미 100개 이상의 점포에서 전기차 충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뒤이어 홈플러스도 지난 1월 19일 서울 강서점 도입을 시작으로 2023년까지 140개 전 점포에 충전소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스타필드 하남은 국내 테슬라 1호 대리점이 입점한 곳이면서, 테슬라 슈퍼차저라는 급속 충전기를 갖추는 등 개점 전부터 전기차와 관련된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최근에는 테슬라 슈퍼차저 6기 외에도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의 급속충전기 ‘해피차저’ 2기와 포르쉐의 HPC 초급속 충전기 2기를 추가 설치하는 등 변화된 전기차 시대를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충전 요금 저렴해 다른 수입원 필요
주유소 특유의 유리한 입지 활용해야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처럼 기존의 주유소를 대체하게 될 ‘전기차 전용 충전소’들은 이 ‘불가피한 시간의 활용’에 누구보다 주목해야 한다. 전기차의 충전 요금은 화석연료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므로, 가장 성능 좋은 초고속 충전기를 설치한다고 해도 충전소가 충전 요금만으로 높은 수익을 내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유소와 달리 전기차 전용 충전소는 충전소 자체보다 카페와 같은 부대시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SK네트웍스가 길동채움을 유명 카페와 브랜드 전용샵 등을 품은 4층짜리 복합 문화공간으로 기획한 이유다.
길동채움에 대규모로 입점한 카페 ‘테라로사’는 강원도 강릉 본점이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커피와 뛰어난 인테리어 콘셉트로 명성을 얻으면서 크게 성장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다. 설립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고, 카페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지도도 높지만, 매장은 길동채움을 포함 전국에 단 16곳, 서울에 7곳뿐이다.
매장을 우후죽순으로 열면서 사세를 확장하는 대신, 제주 쇠소깍,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등 소수의 비범한 입지에만 공들여 지점을 내는 희소성으로 프리미엄을 더하기도 했다.
그런 테라로사가 서울 강동구 길동에 대형 매장을 신규 오픈한 것이다. 그동안 강남·송파나 서울 중심부에 비해 프리미엄 문화의 혜택에서 다소 소외됐던 서울 동쪽 지역에서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할 전망이다. 문화경제가 취재하던 날도 전기차와 무관하게 카페 테라로사를 방문한 고객들이 전기차 관련 방문객들보다 월등하게 많았다.
또 이곳 테라로사는 충전소 건물의 1층 일부와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데, 하이차저의 상부 원반 구조물에 LED 표시 장치가 달려있어, 카페에서 느긋한 티 타임을 갖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자기 차의 충전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길동채움에서 전기차 시승센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3층에는 SK매직의 브랜드샵이 입점하는 등, 대중의 다양한 관심사에 어필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향후 탄생할 전기차 충전소는 세차 서비스, 오락 시설처럼 전기차 차주의 ‘시간’을 겨냥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더해질 전망이다.
특히 전기차 충전소는 기름 냄새와 매연이 연상되던 주유소에 비해 위생적이고 화재사고 등의 위험도 현저히 적어서 식당이 들어서기에도 부족하지 않고, 어린이·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시설도 공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유소들은 본래 해당 지역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아, 주유소의 전기차 충전소 전환은 향후 부동산 개발 시장에서 주목 받는 아이템으로 부상할 여지가 크다.
미래 모빌리티/에너지 산업에 역할 커져
한편, SK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향후 전기차 전용 충전소는 렌터카와 같은 차량 공유 사업의 거점으로도 활용될 예정이어서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실제로 정유업계가 기존 주유소의 입지와 널찍한 땅을 활용해 공유형 자전거나 전기스쿠터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있으며, GS칼텍스의 경우 미래형 주유소 ‘에너지플러스’의 향후 비전에 드론 택시 스테이션으로의 활용에 관한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머지않아 개인이 남는 전기를 필요한 곳에 공급할 수 있는, 개인 간 전력거래(P2P)가 허용될 전망인데, 이러한 민간 전력 거래 시장에서 전기차를 통한 거래 비중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2015년 전력전자학회지에 발표된 ‘전기자동차용 급속충전기 기술과 개발 동향’(정도양 피앤이시스템즈 대표이사 저)에 따르면, 훗날 국내 전기차 보급 대수가 1백만 대에 달하게 되면, 이들 전기차들로부터 거래될 수 있는 전기에너지는 2GWh 수준으로, 국내 원자력발전소 2기가 발전하는 전력량에 해당한다. 개별 전기차들의 남는 전력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원전 2개를 짓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규모가 큰 전기자동차 전력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력망의 안정화를 유지하면서 체계적으로 전기 입출력을 제어할 수 있는 전용 설비가 필요하다. 급속충전, 초고속 충전 기술과 함께 양방향 전력 변환 기술이 고속 충전기에 구현된다면, 전기차 전용 충전소가 민간 전력 거래 활성화를 이끌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충전 인프라 확대, 정부 역할이 중요
현대차그룹과 SK그룹, 또 여러 유통업체 등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충전 인프라를 민간 영역에서만 확충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정부 정책 또한 새로운 전기차 충전 문화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마침 우리 정부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충에 적극적인 편이다. 지난 2월 1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제4차 혁신성장 BIG3 추진회의를 열고 “전기차 보급 확대에 맞춰 편리한 충전 환경을 조성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라며 “‘주유소보다 편리한 충전 환경 조성’을 목표로 올해 전기차 급속충전기 3000기를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2280기를 설치하고, 민간사업자가 구축하는 289기에 설치비 절반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그린뉴딜정책에서는 2025년까지 급속충전기 1만 5000기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전국의 전기차 급속충전기는 지난해 말 기준 9805기가 구축되어 있었으니, 이번 부총리의 발표에 따라 목표 달성 시점이 급격히 빨라지게 되었다.
특히 홍 부총리는 “충전 시간을 1~9시간에서 20분으로 대폭 단축하는 초급속 충전기를 올해 공공 부문에서 최초로 43기 설치할 것”이라며 “자동차 기업이 자체적으로 80기 이상 설치할 수 있도록 전력, 부지 확보, 건축 등을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현대차가 이번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을 개소하면서 올해 전국 주요 도심에 120기 이상의 하이차저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하는 발표다.
전기차 판매량이 늘고, 전기차 충전 인프라와 전기차 전용 충전소들이 많아지는 데 따른 문화 변화 중 가장 고무적인 것은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의식 수준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라진 인식이 일상생활의 여러 습관에서 변화를 이끌고, 시장 트렌드의 변화가 기업과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영향을 주면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온실가스감축으로 이어져 지속가능한 사회를 영위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