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5호 윤지원⁄ 2021.03.02 09:41:15
기아가 친환경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변화를 선언하고, 새로 공개한 준대형 세단 K8에 기아 브랜드의 신규 엠블럼(로고)을 최초 적용하여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2월 17일 외장 디자인을 처음 공개한 K8은 기아의 대표적인 준대형 세단 K7의 후속 모델로, 고객의 삶에 영감과 여유를 제공하는 모빌리티 기업으로 탈바꿈을 선언한 기아의 새로운 지향점을 담은 첫 번째 모델이다.
기아는 K8이 기아의 새로운 세대를 여는 첫 모델이라는 의미에서, 차량 외관 전면부에 알루미늄 소재의 신규 엠블럼을 브랜드 최초로 적용했다.
즉, K8과 신규 엠블럼은 기아의 ‘대변혁’ 의지가 응축된 심벌이라 할 수 있다.
‘기아 대변혁’ 선언과 새로운 브랜드 로고
앞서 지난 9일 기아는 CEO 인베스터 데이 행사를 열고 ‘기아 트랜스포메이션 원년’을 선포했다. 이날 기아 송호성 사장은 “새로운 로고,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사명이 적용된 올해를 ‘기아 대변혁(Kia Total Transformation)’의 원년으로 선포한다”면서, “기아는 이제 차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에서 나아가 고객에게 혁신적 모빌리티 경험을 제공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아는 2021년을 기점으로 완성차 제조업체 기아자동차에서 전기차 및 친환경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 기아로 전면 개편하며 브랜드를 혁신하고 수익성을 확대하고자 한다. 기아는 이러한 계획을 Plan S(이하 플랜 S)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공개한 바 있고, 이날 행사에서는 당시의 플랜 S를 재점검하고 구체화된 사업 전략을 소개했다.
브랜드 로고와 슬로건을 새롭게 바꾼 것 역시 플랜 S의 일환이다. 기아는 지난 1월 6일에는 신규 로고와 브랜드 슬로건을 공개하는 ‘로고 언베일링’ 행사를, 15일에는 ‘뉴 기아 브랜드 쇼케이스’를 열고 새로운 사명과 브랜드 지향점 및 전략 등을 발표했다.
기아 디지털 채널을 통해 진행된 로고 언베일링 행사는 총 303대의 드론이 하늘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새로운 로고를 그리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폭죽과 동시에 발사된 가장 많은 무인항공기’(Most unmanned aerial vehicles (UAVs) launching fireworks simultaneously) 분야에서 기네스북 세계 기록으로 등재됐다.
당시 기아 송호성 사장은 “기아 브랜드의 변화는 단순하게 회사의 이름과 로고 디자인을 바꾼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으로의 확장을 통해 전 세계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며, “이를 위해서는 기아의 모든 임직원들이 새로운 브랜드에 걸맞은 자율적이고 유연한 근무 환경과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규 로고는 지난 201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던 전기차 콘셉트카 ‘이매진 바이 기아’(Imagine by KIA)에 적용했던 엠블럼 디자인을 기반으로 했다.
기아 측 설명에 따르면 신규 로고는 기아차의 새로운 브랜드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균형 (Symmetry)과 리듬(Rhythm), 그리고 상승(Rising)의 세 가지 디자인 콘셉트로 개발됐다.
‘균형’은 기존 사업영역에서의 고객 만족, 미래 지향적 제품과 서비스 제공을 통한 새로운 고객 경험을 제시해 나가겠다는 자신감을 표현한다. ‘리듬’은 새로운 로고의 선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고객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겠다는 자세와 고객에게 영감이 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상승’은 진정한 고객 관점의 새로운 브랜드로 도약하겠다는 기아의 열정을 의미한다.
엠블럼, 왜 진작 안 바꿨나?
기아의 신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관련해 국내외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국내 최대의 자동차 이용자 온라인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에서는 기아 로고 교체와 관련해 수많은 게시물과 댓글이 달리며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졌다.
신규 로고가 많은 장식적 기법을 가미했지만, 기존 로고에서 타원형을 빼고 KIA라는 레터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망했다는 지적이 일부 있다. 또한, 비슷한 이유에서 상금을 걸고 신규 로고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어야 한다며 불만족을 드러내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이곳 게시판에서의 전반적인 반응에 근거해서 본다면, 기아의 신규 로고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로고 교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감돈다.
이런 반응은 그동안 소비자들 사이에 기아 로고와 엠블럼에 대한 불만족이 상당히 팽배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기아가 연간 200만 대가 넘는 해외 판매량을 기록하는 글로벌 대기업이다 보니(2020년 205만 4432대) 그러한 불만은 비단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영어로 ‘KIA EMBLEM’을 검색하면 이와 관련된 추천 검색어가 10개 이상 제시되는데, ‘교체’(replacement), ‘제거’(removal) 등의 단어들과 함께인 항목이 많다.
해당 검색어로 영상들을 검색해 보면, 기아차 모델을 소유한 사람들끼리 기존 기아자동차 로고 엠블럼을 떼어내고 다른 디자인의 엠블럼으로 교체한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내용이다. 한 영상은 조회수가 무려 181만 뷰가 넘는다.
수십 년 동안 로고 및 엠블럼 디자인에 큰 변화를 거의 주지 않은 메르세데스-벤츠나 아우디를 검색해봤을 때는 주로 엠블럼 형태의 조명장치에 관한 관심이 반영된 추천 검색어가 대부분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양쪽 엠블럼을 대하는 소비자의 태도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로고 디자인, 브랜드 정체성 담아야
기아의 기존 엠블럼은 타원 안에 KIA라는 영문 브랜드명이 적혀 있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1994년에 기존의 ‘깃발’ 로고를 대체하기 시작하여 이번에 교체되기까지 27년간 사용되었다.
이 디자인에서 타원은 ‘지구’를 상징하며, 별다른 장식이 없는 서체는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도약 의지와 잠재력”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기아 측은 밝혔다. 차량에 부착될 때는 글씨와 테두리는 크롬 색, 바탕은 검정이고, 간판이나 문서 등에 사용되는 로고는 빨간색 테두리와 글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타원 + KIA’의 디자인은 소비자들로부터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 의미, 역사에 관한 상징성이 없는 데다, 조형적인 멋도 느껴지지 않는 밋밋하고 안일한 디자인이라는 비판을 꾸준히 들어왔다. 형제 회사인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처럼 ‘타원에 기업명 영문 레터링’으로 디자인된 다른 국내 기업의 브랜드 로고에 대해서도 비슷한 취지의 비판이 꾸준히 일고 있기도 하다.
비판을 위한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글로벌 브랜드들이 있다. 특히 원과 선 같은 기초적인 도형의 단순한 조합만으로 디자인된 로고로 브랜드 정체성을 굳건히 유지하는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BMW 같은 독일 명차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브랜드의 로고에는 쉽게 교체할 수 없는 의미와 역사와 상징성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메르세데스-벤츠 로고 디자인의 핵심인 ‘삼각별’은 항공기, 선박, 자동차 등 하늘과 바다와 땅에서 최고의 엔진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기업 창사 이념이 반영된 것이므로, 그 디자인이 곧 100년이 넘는 기업의 역사를 상징한다. 아우디도 4개의 기업이 합쳐져서 생긴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을 모태로 한다는 기업의 역사가 반영된 디자인이다.
BMW는 오랜 세월 동안 몇 차례 브랜드 로고 디자인을 바꾸었지만, 파란색과 흰색이 번갈아 가며 칠해진 안쪽의 4분할 원과 바깥의 동심원이라는 고유한 콘셉트는 거의 언제나 유지되고 있다. 이것 역시 회사의 연고지인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깃발 디자인이 담긴 것이다.
폭스바겐, 아우디, BMW, 미니 등 많은 자동차 브랜드가 최근 디지털 시대에 맞춰 고유의 로고 디자인을 바꿨다. 하지만 3차원 입체 느낌을 주기 위해 가미한 회화적 기법을 빼고 2차원 평면의 가느다란 선으로 바꾸었을 뿐 로고를 구성하는 기본 도형의 요소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고급화 전략’ 없어도 도약 가능할까?
기아와 마찬가지로 기업들이 기존 인지도를 일부 희생하면서도 로고 변경을 시도하는 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달라진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펼치고, 더 크고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폭스바겐아우디, BMW 등 오랫동안 자동차 시장에서 군림해온 독일 완성차 업체들이 그렇다. 이들이 최근 약속이라도 한 듯 로고 디자인을 일제히 전동화 및 디지털 시대에 맞게 바꾼 것도 최근 디젤 엔진의 시장 지배력이 부쩍 약해지면서, 비교적 늦게 뛰어든 전동화 시장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내연기관 시대의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탈피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가 낮은 수익률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벗어난 타계책의 하나가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였다. 그랜저, 쏘나타 등 세단 위주의 사업을 고집하다가 SUV 상승세라는 트렌드를 놓쳤다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졌다. 현대차는 뒤늦게 SUV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늘리며 대응에 나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출범 10년도 되지 않은 제네시스가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현대차의 수익률 개선을 이끌고 있다.
이번 기아의 변화를 둘러싼 여러 반응 가운데, 기아도 제네시스와 같은 프리미엄 시장 전용 서브 브랜드를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는 “기아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하나가 됐고, 스팅어처럼 월등한 성능과 수준 높은 디자인으로 인정받은 프리미엄 자동차도 내놓았지만, 다른 브랜드에 비해 싸고 대중적인 차라는 이미지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디자인과 상징성보다 회사 인지도를 높이는 게 유일한 목적으로 보이던 기존 엠블럼은 이 이미지를 고착시킨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기아 내부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현대차의 제네시스, 토요타의 렉서스 같은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 출범을 검토했다는 것은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기아는 신규 프리미엄 브랜드 출범 대신 기존의 기아 브랜드로 스팅어를 비롯한 신차들을 잇달아 내놓고 글로벌 시장에서 연이은 호평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친환경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대변혁을 선언하고 새로운 도약을 기도하면서도 기아는 브랜드명에 담긴 역사성을 유지했다. 브랜드 로고도 KIA라는 알파벳 세 글자 구성을 유지하는 대신 그 안에 균형, 리듬, 상승의 콘셉트를 담아 좀 더 세련되고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신차 세단의 이름도 기존 K시리즈의 헤리티지를 계승한 K8이라고 정했다.
시대 요구에 맞춘 대대적인 변신을 선언하면서도 기존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택하는 대신, 브랜드가 지켜온 프라이드를 재정립하고 스스로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