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항상까기 한국 언론 1: 부동산은 원래 이상한데 ‘비꼬는 언론’까지
(문화경제 = 최영태 편집국장) ‘살인하지 말라.’ 기독교 십계명 중의 여섯 번째다. 흔히 이 명령을 인도주의적 명령, 즉 어떤 사람도 죽이면 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원래 의미는 ‘(유대인끼리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구약 연구가인 존 하퉁(John Hartung)의 해석을 들어보자.
십계명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이교도에게는 적용 안 된다. 신의 명령 가운데 종족 학살은 도덕성만큼이나 중요한 사항이었다. 여호수아가 한나절 동안에 2천 명의 이교도를 죽이고 신에게 감사드리기 위해 ‘너희는 서로 죽이지 말라’는 구절을 포함한 십계명을 바위에 새길 때 그는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 같은 전통에 물들어 있는 (중동 기원의) 종교들은 보편적 도덕성을 가르칠 수 없다. (매트 리들리 저 ‘이타적 유전자’에서 재인용)
기독교와 함께 서구 문명의 또 다른 큰 줄기는 그리스-로마 전통이다. 그리스-로마에서는 어땠는지를 라틴어 전문가인 수원대 김동섭 교수의 책 ‘라틴어 문장 수업’에서 읽어보자.
자유민에게는 고문을 가할 수 없다는 원칙이 로마법의 출발점이었는데 (193쪽)
로마는 자유민과 노예로 구성됐다. 노예나 이민족에게는 고문을 가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조선시대의 양반에 대한 주리틀기 같은 고문은 로마의 자유민 사이에서는 금기시됐다는 얘기다.
연면히 이어지는 “우리끼리는 죽이지 마”주의
우리 편을 죽이면 안 되고, 고문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현대 미국, 유럽,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큰일이 터지면 신기하게도 대통령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연출한다. 예컨대 아들 부시 대통령 때 이라크를 쳐들어가면서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됐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전쟁 상태에 들어가자 평소 부시에 적대적이던 민주당 의원들 거의 전원이 전쟁 개시에 찬성표를 던지는 신기한 행태를 보였다. 애국주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유럽이 유럽연합(EU)을 결성한 것도, 소련 패망 뒤 세계를 접수해버린 미국의 절대적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힘은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미국이 약해지면 유럽이 어떻게 다시 한번 세계를 새롭게 지배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게 유럽이다.
일본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문재인-바이든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5월 24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의 힘을 빼고, 중국이 힘을 잃게 되면 일본의 국익, 국격, 국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국을 직접 때린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라라는 걸 중국은 알고 있다”. 한국은 매 맞지 않을 궁리에 바쁘고, 일본은 때릴 궁리에 바쁘다는 소리다. 물론 일본의 자가당착일 순 있지만 생각의 틀이 다르다는 얘기다. 지배해본 나라와 지배해본 적이 없는 나라의 생각의 틀 차이다.
우리끼리는 죽이지 말라는 전통은 중국 고대에도 있었다. 예불하서인 형불상대부(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예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 올라가지 않는다), 즉 지배층은 형벌이 아닌 예의로 바로잡고, 서민은 예의가 아닌 매서운 형벌로 다스린다는 가르침이다. 이 원칙을 후대의 법가(法家)가 깨뜨리면서 귀족에게도 형벌이 가해졌고, 이런 원칙으로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지만, 예형(禮刑)의 분리, 즉 지배층에게는 예를 가르치고, 서민층에는 벌을 준다는 원칙은 공자의 유교를 통해 연면히 내려온다.
중국의 예에서든, 그리스-로마든, 기독교든, ‘우리끼리 서로 죽이지 말라’는 원칙은 결국 지배를 위해서다. 타민족에 대한 지배이든, 자민족에 대한 지배이든 지배층끼리 서로 뒤통수를 쳐서야 지배를 이룰 수 없는 까닭이다.
지배해본 자들은 이렇게 지배의 방식을 개발해 놨다. 반대로 지배를 줄곧 당해온 자들은 어떨가?
지배를 경험한 나라와, 피지배에 이골이 난 나라의 차이
앞에서 정세현 전 장관이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고민 중”이라고 했듯이, 피지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외부의 공격이 발생하면 습관적으로 내부투쟁부터 한다. 주화파와 주전파가 갈리면서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적은 공격을 시작할 필요도 없이 겁을 주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이루기 쉽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이제 세계 10위고,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듯 세계 1위 강대국 미국도 필요로 하는 나라다. 나라는 이렇게 컸고 부자가 됐지만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내부총질에 익숙하다. 그것도 ‘적’으로 분류된 정권에 대해서만이다. 선택적 정의다.
‘우리 편 뒤통수 까기’는 2019년 일본 아베 정권의 느닷없는 반도체 소재 수출금지 때 여실히 드러났다. 못된 짓을 시작한 건 아베였는데 당시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도대체 문재인 정부가 어쨌기에 이런 공격을 당하나. 일본에 사죄하지 않으면 나라 경제가 거덜난다”는 논조를 펴댔다. 그리고 사태의 결말을, 즉 자칭 보수 언론들의 '이제 다 거덜난다' 주장이 얼마나 無근거였는지를 현재의 우리는 다 안다.
이번 문-바이든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44조를 투자하고도 겨우 백신 55만 명분’ ‘기자회견장에서 문 대통령이 한국 여기자에 망신 줘’ ‘기업이 이룬 성과인데 대통령이 숟가락 얹어’ ‘대만 언급으로 중국이 화나서 큰일났다’ 등으로 뒤통수 까기에 바쁘다.
여태까지 한국인은 강한 외국인에 주로 당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강한 외국에 기댄 기회주의자들이 거의 항상 승리하고 부자가 됐다. 그러나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은 더 이상 강한 외국에 기대서만은 살 수 없다. 선두에 나서면 강한 앞바람을 내가 헤쳐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지 않아도 이제 세계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이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좀 ‘우리끼리는 살인도 고문도 말라’ ‘형불상대부’라는 지배의 원칙부터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 적장과 담판 중인 대장의 뒤통수를, “지금이 정권교체 찬스”라는 단견으로 원칙도 없이 공격한다면, 자신이 먼저 죽거나 아니면 공멸 말고는 답이 없다.
'어떻게 깔까'만 상시 궁리하는 언론들에게 하고 싶은 한 마디는 이거다. 근거 있는 비판은 옳고 필요하다. 그러나 오직 깎아내리기만을 위한 비꼬기는 추악하거나 자칫 무식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비꼬기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