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4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08.03 10:07:58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 전시 제목이 ‘Green_사라지는 노래, 살아지는 노래’이다. 특별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 전시 주제와 관련된 설명을 부탁한다.
‘초록’이라는 특정한 색을 칭하는 단어를 제시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만약 초록이란 단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초록이라고 부르는 색을 보며 다른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였다. 우리는 배운 대로 세상을 인지한다. 현재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프레임을 새롭게 다시 형성해야 하는 때인 것 같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언어나 지식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지금의 상황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2009년 읽었던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의 ‘코드 그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2008)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환경에 집중하는 시대가 오며, 인간이 저지른 일들이 큰 재난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당시에는 실감할 수 없었는데 지금의 세상을 보면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올해 그 책을 다시 읽었고, 전시 제목을 ‘그린’으로 정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초록으로 둘러싸인 이상원미술관이라는 전시 공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 미술관의 2층과 3층 전체에 작품이 전시되었다. 설치나 작품 선택에 있어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작업의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다. 재료뿐 아니라 이미지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확 달라진 것은 없다. 불안하고, 부서지기 쉽고, 영원하지 않은 재료의 사용을 지속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종이(한지), 공기조형물 작업의 성격이 유리로 이어졌다. 유리는 온도에 따라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소유한 재료이다. 그와 같은 속성이 현재를 번역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선택했다. 현시대가 너무 불투명하고 견고하지 못하다 보니 유리라는 재료가 더 강한 함의를 품은 은유로 다가오는 것 같다.
신작인 ‘코드 그린(Code Green)’(2019~2021)에는 2년 동안의 내 삶이 담겨 있다. 고정된 시스템을 벗어나 삶과 예술의 균형, 작업의 새로운 흐름을 찾고 싶어 시작한 게 유리 작업과 꽃꽂이였다. 그런데 꽃꽂이를 해놓은 꽃이 시들어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시든 꽃들을 말려서 모았다. 이후 말린 꽃들을 유리판에 올린 뒤, 버리는 유리 가루를 갈아 그 위에 뿌려서 굽는 퓨징(Fusing) 기법으로 작업했다. 꽃들은 타서 사라지고 미세한 흔적만 남게 되는데, ‘뭐였을까?’라는 질문과 물음표만 남은 결과물을 보면서 지금의 나는 마치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년 동안 모은 꽃을 다 태우며 스스로 균형을 잡은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사라지는 순간이나 잊히는 시간, 소멸의 두려움도 조금은 사라졌다. 없어짐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한편으로 내가 참 유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쓰임새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이전의 작품인 ‘Trunk Project’(2009~), ‘실크로드(Silkroad)’(2015), ‘엄마의 외출’(2011), ‘여행하는 선인장’(2018) 등도 함께 전시되었다. 이정윤의 상징과 같은 코끼리가 등장하는 신작은 언제쯤 발표할 계획인가?
이상원미술관의 2층은 구작, 3층은 신작으로 채워졌다. 코끼리는 나를 대표하는 상징이지만 그로 인해 규격화된 틀에 갇히는 것 같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의 작업이 한 방향에서만 읽히길 원하진 않기 때문이다. 코끼리 작업은 구체적인 형상이 보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지만 그만큼 의미가 한정될 위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코끼리 작업을 일부러 피하진 않았다. 코끼리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경계 위의 존재라는 점에서 내 작업은 모두 연결된다. 나의 코끼리는 명랑하고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전기 코드만 뽑으면 언제든 주저앉는 풍선이다.
- 이번 전시에도 대중들이 참여한 작품이 발표되었다. ‘Green: 내가 만난 초록’(2021)은 온라인으로 사람들이 보내준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조은영 작곡가의 음악도 함께 했다. 다른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이정윤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Green: 내가 만난 초록’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초록’의 이미지(사진)를 공유해달라고 부탁해 진행했는데 인물, 사물, 빛, 음식, 건축,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그 범위를 열어두었다. 약 150여 명이 이미지를 보내주었다. 온라인으로 옷장 속의 넥타이 기부를 부탁해 진행했던 ‘실크로드’와 같은 방식이다. 다른 사람들은 초록이란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궁금했다. 초록이란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서로의 머릿속에는 정말 다양한 생각과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이미지가 많았지만, 포장 용기, 의류, 전시회 등 다양한 사물과 장소에서 초록색이 발견되었다. 서로 다른 프레임으로 초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편적 의미를 전한다고 믿어지는 언어로 소통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전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조은영 작곡가에게 곡을 의뢰할 때도 ‘당신이 생각하는 초록은 무엇인가?’라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다음 사람들이 보내준 초록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초록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풀어내달라고 부탁했다. 조은영 작곡가는 애니메이션 ‘Traveling Trunk & Dreaming Cacti’(2018)의 음악을 의뢰하면서부터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 ‘실크로드’가 드디어 벽에 걸렸다. 이전부터 궁금했고, 상상했던 장면이다.
그동안에는 바닥에 펼쳐 사람들이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했지만, 나 역시 세로로 길게 걸린 ‘실크로드’를 보고 싶었다. 이상원미술관의 신혜영 학예실장님과 전시 계획을 짜는데 이 작품을 걸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미술관 1층 라운지에서 맞은편의 경사진 벽을 발견했다. 사선의 벽을 작품에 어울리게 회색으로 칠한 뒤 ‘실크로드’를 마치 천장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처럼 걸었다. 넥타이를 기부한 사람들이 지나온 시간이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다. 나아가 단일한 작품 하나로 읽히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내 작업을 모두 함유하고, 내가 말하려는 것을 한 자리에 강하게 담아내는 길처럼 보였다. 한편 천장에는 ‘마법사모자가 있는 상상정원’(2020)을 설치했다.
- 앞선 답변에서도 말했듯 유리 작업을 약 2년 전부터 시작했고 이번에 그 결과물이 전시되었다. ‘Green.zip’(2021)은 유리로 만든 구조물이다. 벽에 설치한 ‘코드 그린’은 회화적 성격이 강해 보인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아직도 예술이란 견고한 프레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회화든, 입체든 결국 예술처럼 보이는 형태를 만들어놓았다. 지금의 나는 이정윤의 작업, 나아가 시각예술은 이렇게 보여줘야 한다는 프레임을 해체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그리고 이번 신작이 시작점인 것 같다. 계속 조금 더 틀이 없는 상태, 그래서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상태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코드 그린’은 마치 한 점의 그림을 구성하듯 104점의 유리판을 결합한 작품이다. 또한 ‘코드 그린’은 마치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가마를 떼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2년 동안 여러 종류의 유리를 실험하고, 만들고, 데이터를 맞춰가면서 작업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정직한 시간의 기록이자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작품 설치를 위해 그동안 작업한 300여 장의 유리판을 미술관에 가져와 펼쳐놓자 지나간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품 설치에 3박 4일이 꼬박 걸렸는데, 마지막 날 노래하는 안정아와 무용하는 박연정이 전시장을 찾았다. 안정아의 노래 ‘꽃이 있다’가 ‘코드 그린’의 구상 초기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안정아가 ‘Green.zip’ 안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는 상상을 하며 작업을 했었는데, 설치가 끝난 작품 안에서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예술이 어떤 언어보다 강한 소통을 끌어낸다는 것을 느꼈다.
- 전시 ‘Green_사라지는 노래, 살아지는 노래’와 관련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번 전시를 보고 작업이 많이 바뀌었다거나 이제 코끼리 작업은 안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나도 앞으로 내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현재로는 ‘Green.zip’이 더 진행되어 위태로운 또 다른 입체 구조물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물론 이것도 확정된 것은 아니다. 작업은 내 삶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사건, 환경들이 맞물려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는 것이다. 억지로 이정윤다운 작업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이번 전시를 통해 고정된 프레임을 벗어날 용기를 많이 얻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