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3호 김응구⁄ 2022.10.12 19:50:52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그 업에 종사하는 예술인이나 예술단체를 지원하는 일. ‘문화재단’의 사전적 의미에 따른 업무 성격은 그렇다. 이를 위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공들여 키운다. 더 나아가 한국미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한다. 그런 이유로 대기업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문화재단은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일반인의 문화 욕구 충족은 물론 사회 환원까지 그 목적의 다양성이 깨나 넓고 풍요롭다.
기업들은 문화재단의 순기능을 아주 잘 안다. 그 기능을 좋은 쪽으로 이용할 줄도 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는다. 그 기업에는 건설회사도 포함된다. 물론, 일반 기업이든 건설회사든 문화재단은 대개 그룹사 차원에서 운영한다. 그럼에도 굳이 건설회사를 문화재단과 연결 짓는 건, 그 딱딱하고 차가운 사업이 부드럽고 따뜻한 문화·예술과 만나는 일종의 ‘익스트림스 미트(Extremes meet)’ 현상이 주는 가치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문화재단은 대개 미술관을 포함한다. 이를 기업미술관이라고 칭한다. 여러 신진 작가에겐 창작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수준 높은 컬렉션을 기반으로 전시도 기획한다. 기업미술관의 가장 큰 장점이다.
국내 기업미술관은 한국미술의 든든한 허리나 다름없다.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젊은 작가의 성장이 지속되도록 아낌없이 지원한다. 그렇다고 중견 작가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이 계속 전시장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 가운데 기업미술관은 한국미술 수준을 꾸준히 성장시켜 왔다.
아트에 꽂힌 기업임과 동시에 아트가 숙명인 기업인 셈이다.
문화재단 두 곳을 살펴봤다. 차분하고 클래식한 곳과 요샛말로 ‘힙’하고 개성 넘치는 곳이다. 금호문화재단이 앞쪽이고 디뮤지엄이 뒤쪽이다. 이미지가 그렇다는 얘기지 실상 전시 프로그램은 두 곳 모두 차분하고 클래식하며 힙하고 개성 있다.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꾼다, 금호미술관
금호문화재단은 1977년 출범했다. 설립 취지가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다. 45년의 연혁이 주는 무게감도 크지만, 그 당시 ‘영재(英才)’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 재단은 그에 걸맞도록 미술과 클래식이라는 분야에서 영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중 금호미술관은 지금도 젊은 예술인의 발굴과 지원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금호영아티스트’다.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만 35세 이하 작가에게 개인전을 지원한다. 2004년 시작해 올해까지 20회에 걸쳐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배출한 작가만 89명. 안정주, 임자혁, 정재호, 박혜수 등 현재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 공모를 통해 우뚝 섰다. 실험정신과 잠재력을 검증받은 이들의 작업은 한국미술계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금호미술관은 경기도 이천에 ‘금호창작스튜디오’를 마련,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운영했다. 유망한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 이들이 창작활동에 전념하도록 기회와 공간을 마련해주겠다는 취지였다. 입주 작가 전시, 비평워크숍 등을 진행하면서 지금까지 89명의 작가를 성장시켰다. 현재는 창작스튜디오의 문을 닫았다. 금호미술관 측은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할 만한 또 다른 사업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중견 미술인을 향한 애정도 신진 작가 못지않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기회도 꾸준히 제공한다. 최근에는 그간 전시 기회가 많지 않았던 한국 여성 동양화가의 초대전을 기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2020년 5월 15일부터 7월 12일까지 열린 김보희 초대전 ‘Towards(투워즈)’는 코로나19 상황이었음에도 총관람객 수 1만8000명을 기록했다. 전시 기간 하루 최다 관람객 수가 1400명이었을 정도로 관심과 참여가 높았다.
지난해 11월 19일부터 올해 2월 6일까지 열린 강미선 초대전 ‘水墨, 쓰고 그리다’ 역시 일반 관람객이 많이 찾았고, 더불어 많은 매체에 소개되면서 작가의 작업을 다시 조망하는 기회가 됐다.
이쯤에서 금호미술관의 건물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에 아트를 덧입혔기 때문이다. 금호미술관이 처음 문을 연 건 1989년의 일이다. 그때 이름은 ‘금호갤러리’였고 장소는 관훈동이었다. 1996년에 지금의 사간동 시대를 열었다. 사간동 건물의 중심에는 재미(在美)건축가 김태수 씨가 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과 대덕 LG화학연구소 등을 설계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금호미술관은 하나의 조형(造形) 전시와도 같다. 화강암으로 마감한 건물 정면 외벽과 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듯한 건물 상단의 짙은 띠무늬 창문은 마주한 경복궁의 돌담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건물 한쪽 측면에서 벽을 뚫고 나온 삼각형의 창문들은 건물에 리듬감과 재미를 더한다. 경복궁의 돌담을 비롯한 주위 풍경과 잘 어울리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전시실 내부는 미술관의 기본적인 개념에 충실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화이트 큐브 공간은 작품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작가가 이곳에서 전시를 꿈꾸는 이유다.
금호미술관은 현재 한성필과 임준영의 초대전을 열고 있다. 이 초대전은 폭넓은 장르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자 마련했다는 게 미술관 측 설명이다.
먼저, 한성필 초대전 ‘표면의 이면(Inverted Surfaces)’은 작가 한성필이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촬영한 세 개의 연작 ‘Façade(파사드)’, ‘Ground Cloud(그라운드 클라우드)’, ‘Polar Heir(폴라 에어)’를 선보인다. 한성필은 재현과 환영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문명과 지구 환경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임준영은 ‘그 너머에, 늘 Steps to Nature’를 선보이고 있다. 뉴욕 도시인의 바쁜 움직임을 물줄기로 표현한 ‘Like Water(라이크 워터)’ 연작과 뉴욕자연사박물관 내부의 관람객들을 포착한 ‘Museum Project(뮤지엄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금호미술관 관계자는 “전시를 기획하고 선보이는 것 외에도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 연계 프로그램 등을 진행함으로써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대중의 이해 폭을 넓히고, 아울러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호미술관의 전시 흐름을 보면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트렌드와 작가들을 알 수 있다. 그렇듯 한국 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한다. 그 책임감이 더 무거워질수록 한국미술은 금호미술관을 더욱 든든한 조력자로 대우할 것이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 디뮤지엄
대림문화재단의 시작은 1996년이다. DL그룹(옛 대림그룹)이 설립했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처럼 대중이 일상에서 예술을 즐기도록 하자는 게 모든 기획의 중심이다. 그런 만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전시나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대림문화재단은 1997년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한림미술관’을 대전에 개관했고, 2002년 5월 서울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대림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이후 현대사진과 디자인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형식을 소개하며 감각적인 전시와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관람객들과 소통하고 있다. 2012년에는 대림미술관 10주년을 맞아 한남동에 디프로젝트 스페이스(D Project Space) ‘구슬모아당구장’을 개관했다.
2015년 12월, 대림문화재단은 또 한 번 도약했다. 2016년 설립 20주년을 앞두고 한남동에 ‘디뮤지엄’을 개관했다. 기존 대림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콘텐츠를 더 확장된 공간에서 더 많은 관람객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제시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왔다. 특히, 전시뿐만 아니라 공연과 교육이 강화된 복합문화센터로 그 기능을 확장시켰다. 올해 3월에는 한남동 시대를 접고 성수동 서울숲 근처로 보금자리를 새롭게 마련했다.
디뮤지엄은 일상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디뮤지엄이 아트를 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곳은 현재 특별전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를 전시 중이다. 사랑의 다양한 순간과 감정을 여러 장르의 예술작품으로 재조명한다. 모두 스물세 명의 아티스트가 300여 점의 사진·만화·일러스트레이션·설치 등으로 관람객과 만난다. 국내 만화계의 거장부터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1980~1990년대 출생의 포토그래퍼 군단,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와 설치작가가 참여한 대규모 기획전시다. 한 편의 순정만화를 보는 듯 관람객 입장에선 무척 설레는 경험이다.
디뮤지엄은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풋내기들의 철없는 사랑이라며 밀어낼지 모르는 순정만화의 스토리를 이렇듯 기획하고 작품화한다. 어렵지 않으니 또 다른 일상을 기대하게 하고, 그것을 또 현실로 만든다.
디뮤지엄의 ‘일상의 예술’은 성공적이다. 일반인의 일상에 잘 스며들고 있다. 그래서 매회 기대를 갖게 한다. 대단한 힘이다.
예술에 ‘실적’이라는 표현이 우습지만, 어쨌든 이 전시는 대중에게 ‘합격’ 판정을 받았다. 지난 3월 16일 시작해 10월까지 예정됐지만, 얼마 전 11월 27일까지 전시 기간을 연장했다. 그와 함께 새 작품도 공개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만화가 신일숙의 1997년 연재작 ‘프쉬케’의 한 장면을 애니메이션화한 스페셜 영상이 그것이다.
대림문화재단은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학력, 경력, 활동 영역과 상관없이 자신의 창의성을 맘껏 펼치도록 창작활동을 지원한다. 구슬모아당구장이 그 역할에 앞장섰다. 한남동의 폐점 당구장을 전시 공간으로 개조한 것부터가 새롭고 창의적이다.
새로운 작가들과 설치·다원예술·미디어아트·사진·건축·패션·애니메이션·영화·문학·음악 등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색다른 전시를 선보인 것은 물론, 그런 작가들이 안정적인 수입원을 창출하도록 공동으로 굿즈를 개발하고 판매 수익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지원한 작가만 100여 팀에 달한다.
아쉽지만 디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 광화문지점은 올해 6월 운영을 종료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으로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디뮤지엄 건물 외벽에 마련한 국내 신진 작가들의 일러스트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그 일환이다. 연말에는 또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대림미술관, 디뮤지엄, 그리고 구슬모아당구장은 ‘미술관은 어렵다’는 인식을 깨고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전시장 내에서의 사진 촬영을 허용한 것도 대림문화재단이 처음이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잠재고객과 신규고객을 발굴하려는 노력도 가장 앞섰다. 그 결과 전시마다 전체 관람객 중 최초 방문객이 60%가 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점수로는 100점 이상이다.
어디 금호문화재단과 대림문화재단뿐일까. 이 시대 관람객들과 소통하려고 조금이라도 더 어깨와 허리를 낮추고 마주하려는 이 땅의 문화재단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