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이란은 적” 발언에 대해 이란 측이 강하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대통령실에선 이 문제 해결에 나설 움직임이 별로 감지되지 않고 있어 우려된다.
우선 크게 우려되는 점은, 대통령실의 ‘귀’가 현재 닫힌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간 용산 대통령실에서 거의 매일 실시되던 이재명 부대변인 주재의 일일 브리핑이 지난 12일(목) 마지막으로 열린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니 용산 대통령실에서 특별히 할 말이 없을 수는 있어도, 중동의 양대 맹주(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중 하나인 이란과의 외교 문제가 불거진 마당에 대통령실의 이런 잠잠함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을 수행 중인 김은혜 홍보수석의 수행 기자단에 대한 브리핑 내용을 보면 더욱더 이례적이다. 김 수석은 이번 순방 기간 중 거의 항상 서면 브리핑으로 대면 브리핑을 대체하고 있으며, 어쩌다 한 번 대면 브리핑을 할지라도 전할 말만 전하고 질의를 받지 않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윤 대통령의 뉴욕 유엔본부 방문 당시 김 홍보수석이 활발하게 수행 기자들에게 사안을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더구나 당시 벌어졌던 이른바 ‘바이든 대 날리면’ 시비에 비한다면 이번 이란 사태의 크기는 ‘울트라’ 급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기괴하다. 바이든 대 날리면 시비 당시 미국 백악관은 “문제 안 된다, 신경 안 쓴다”로 일관했다. 반면, 현재 이란 정부는 한국 측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며, 테헤란 주재 한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면서 “한국도 핵 개발을 하겠다고 대통령이 그러던데 그것도 해명하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용산 기자실에서도, 대통령 수행단에서도 ‘질문을 받고 답하는’ 브리핑을 하지 않겠다면 이는 그냥 아무 구체적 행동 없이 뭉게고 넘어가겠다는 태도인가?
“실수라면 홍보수석이 나설 텐데 그럴 생각 전혀 없는 듯”
여기서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발언이 들린다. 안보 전문가인 김종대 전 의원(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18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이명박 정부 당시 2010년 바라카 원전 공사를 한국이 따내는 과정에서 ‘UAE 유사 시 한국 군의 자동개입’을 약속하는 비밀 군사협약을 당시 이명박 정부가 비밀리에 맺었다”며 “이번에 UAE가 3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제안이 둥둥 떠다니니까 윤 대통령이 비밀 협정 내용을 입 밖으로 떠들어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전 의원은 하루 앞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대통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실수라면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나섰을 것인데 윤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거나 해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썼다.
말 실수이고 잘못 알려진 점이 있다면 김 홍보수석이 적극 나서 설명-해명-반박할 텐데 말 실수가 아니라 진실을 말해버린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실 전체가 유감을 표명하거나 해명할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게 김 전 의원의 진단이다.
이런 상태라면 정말 곤란하다. 말 문제를 말로 풀지 못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손발이 움직이는, 즉 행동을 통해 해결하려는 수단이 이란 쪽에서 나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발언의 근거는 ‘한-UAE 군 자동개입 비밀 각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12월 UAE와 한국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겨 당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UAE에 비밀리에 급파돼 봉합한 적이 있다. 그 임 전 실장은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는 금번 중동 방문에서 일어난 실언 파문을 신속히 성의 있게 수습해야 한다. 결코 말로 대충 얼버무릴 사안이 아님을 인지하고 물밑 외교에 최선을 다해주길 충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얼버무리지 말라는 당부다.
임 전 비서실장의 UAE 급파 뒤인 2018년 1월 9일자 중앙일보는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명박 정권)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여기서 김 전 장관은 “UAE에 군사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한국 군이 UAE에 와 주는 군사 비밀 양해각서를 내가 책임지고 비공개 상태에서 맺었다”고 실토했다.
‘UAE 유사시 한국군 자동 개입’ 비밀 양해각서를 뒷받침하는 담보의 하나로서 한국군 아크부대(‘아크’는 형제라는 의미)가 2011년 이후 줄곧 배치돼 있다.
김 전 의원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없는 ‘자동개입’ 조항이 들어간 이 협약으로 인해 한국은 졸지에 UAE의 비밀 동맹이 되고 말았다. 멋모르는 윤 대통령이 아크부대에 가서 이를 마구 떠들고 말았다”며 “비밀 유지는 UAE가 한국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이란 정부와 언론이 우리에게 항의하고 해명을 요청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는 요지로 페이스북에 썼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 역시 17일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자신의 UAE 방문 경험을 토대로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우리 상선들도 피랍 조심해야 한다. 우리 외교부도, 또 우리 대통령실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대화를 잘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윤 정부 들어선 뒤 계속 해결을 촉구해온 이란 정부
이란 정부는 윤 정권 출발 초기부터 한국 정부에 닦달을 해왔다. 새 정부 출범 한 달 뒤인 작년 6월 20일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의 새 정부가 이란에 대한 빚(동결 석유 대금 70억 달러, 약 8조 8천억 원)을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아직 이란은 문제 해결을 위한 유효한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새 정부가 동결 자금 문제를 위한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볼 것”이라며 발표했다.
이어 6개월이 지난 9일엔 또 한 차례 “한국 내 동결 자금 문제는 이란의 진지한 요구 중 하나이며, 우리는 여전히 한국 정부가 이와 관련한 약속을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동결 자금 해제는 양국의 다른 현안과 무관한 문제이며, 이란 정부는 자금 동결을 풀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해 왔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이란이 한국 쪽을 계속 노려보는 와중에 한국 대통령의 “적은 이란” 발언이 나왔다. 이란은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겠다는 자세다. 대통령실의 귀가 언제 열려 이 문제를 풀어나갈지, 용산 쪽만 쳐다봐야 하는 국민들은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