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터 시작된 시선은 좀 더 고개를 들어 하늘로 향한다. 일몰 때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듯한 하늘은 이내 어둠을 끌고 오지만, 다시 해가 떠오를 때 세상을 밝히는 경관은 절로 감탄을 일으킨다.
갤러리현대가 정주영 작가의 개인전 ‘그림의 기후’를 연다. 그는 ‘산의 작가’로 불린다.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산의 풍경을 캔버스로 옮겨 그렸다.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산수화 일부를 차용해 대형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으로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 등을 테마로 삼아 산의 일부나 봉우리, 바위의 면면을 캔버스에 담았다. 2017년 갤러리현대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도 북한산의 풍경이 돋보였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맥락은 이어진다. 지하 1층부터 시작되는 전시 출발점엔 ‘알프스’ 연작이 놓였다. 작가는 국내의 산뿐 아니라 해외의 산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2006년 답사를 갔던 기억을 바탕으로 2018년부터 알프스 연작을 제작해 왔다.
특히 석회암으로 이뤄진 거대하고 뾰족한 봉우리들과 빙하가 어우러진 알프스 일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지각변동과 침식작용 끝에 생겨난 절묘한 형상과 마그네슘, 칼슘, 철 등이 함유돼 붉은색을 띠는 암석을 그려 왔다.
이 과정에서 단순 산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의 원형적 풍경에서 사람의 얼굴과 손, 다리 등 신체의 일부를 연상하도록 그림을 그려, 보는 이가 인식과 감각의 전환, 나아가 내면을 투영하도록 안내했다.
작가는 “바위들 면면에서는 얼굴이, 커다란 산 자체에서는 몸통이 보인다. 신체는 자연만큼 오묘하다. 산을 4~5년 그리다보니 무감각해지고 지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던 내 왼손에서 산의 봉우리, 계곡의 선이 보이더라”며 “알프스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단층이 전형적이면서도 어디를 가도 잘 보였는데, 우리나라 산과 달리 빙하와 초목이 공존하는 모습이 독특했다. 사람의 근육과도 같은 힘도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시선을 하늘로 높이면서 이야기가 더 다양해졌다. 알프스에서 마주한 웅대하고 낭만주의적인 하늘 풍경은 ‘기상학’을 주제로 새롭게 선보이는 ‘M’ 연작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전시의 부제인 ‘메테올로지카(Meteorologica)’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기와 물, 땅에 관한 여러 기후 현상들을 관찰하고, 이를 자연철학적으로 기술한 책 ‘기상학(Meteorology)’에서 따 왔고, 연작의 제목은 여기서 이니셜 ‘M’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 속 하늘은 계절과 시간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다.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감각은 예민해졌고, 날씨 변화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지난여름엔 극심한 온도 변화가 이뤄지며 비가 한창 쏟아지다가 거대한 먹구름이 하늘에 나타나기도 했다.
매일 해는 일출과 일몰을 반복하는데 볼 때마다 강렬했다”며 “자연스럽게 기상학에 관심을 가졌다. 과거 기상학이 신화 영역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한 인간으로서 직접 몸소 체감한 이야기들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하늘이 그린 교향악 악보는 ‘일몰’의 순간
전시장 1층엔 일몰의 순간들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됐다. 새빨간 해를 연상케 하는 빨간색과 눈이 부시게 밝은 노란색부터 밤을 끌어오는 짙은 파란색, 회색까지 다양한 색이 화면에서 춤을 추듯 어울린다.
작가에게 일몰은 하늘이 그린 교향악 악보와도 같다. 그는 “일몰은 매일 반복된다. 지극히 평범한 현상이지만, 각각의 일몰이 조금씩 다르고, 유독 장엄하며, 아름다워 매번 큰 울림을 준다. 꼭 화성을 쌓아올린 장엄한 교향악을 듣는 느낌이기도 하다”며 “지난 전시 땐 형태가 정해진 산을 그리면서 색을 억제했다면, 이번엔 열려 있고, 그 형태를 한계 지을 수 없는 하늘이기에 다양한 색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작업은 색을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보니 어쩔 때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색으로 지우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집약적인 색칠의 결과는 몽환적이다. 계속 형태를 바꾸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는 하늘의 풍경들은, 수많은 색의 레이어가 쌓인 다채롭고 몽환적인 색채의 그러데이션으로 재현된다.
이어지는 2층 전시장엔 변화무쌍한 구름이 가득하다. 작가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시시각각 흘러가는 모호한 존재로, 동서양회화 모두에서 특별한 소재로 사용돼 왔다”며 “구름은 내겐 산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와도 같다”고 말했다.
이중 ‘M40’과 ‘M41’은 작가가 독특한 형상의 거대한 먹구름에서 인체의 형상을 떠올리고 표현한 작품이다. 왼쪽 화면은 얼굴의 측면, 오른쪽 화면은 다리를 포개고 반대편을 보고 누워있는 사람 모습을 연상케 한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 먹구름의 어두움을 표현하기보다는 레이어를 겹친 삼원색을 혼합해 먹구름이 지닌 탁하지만 깊이 있는 질감과 긴장감 있는 회색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1층에서 졌던 해는, 2층에서 떠오른다. 일출 풍경 한가운데에 선 작가는 “간간이 흐린 구름이 있긴 하지만, 작품의 채도가 한결 높아지고 선명해져 이번 전시에서 가장 밝은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얼핏 보면 지하 1층의 일몰과 비슷해 보이지만,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색과 느낌이 바뀌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이번 전시는 지하에서 1층, 2층까지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산에서 구름, 하늘로 시점이 상승해 마치 하늘을 부유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개별 작품들은 크기 상관없이 동등한 간격으로 벽에 설치됐는데, 작품 크기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하늘의 풍경을 담은 각각의 작품들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작가의 의도다.
갤러리현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정주영 작가가 산과 바위에서 물과 안개, 구름과 하늘의 영역으로 회화의 공간을 확장해 나간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고정된 대상에서 끊임없이 재현 불가능한 기후를 그리며, 그림의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제시한다”며 “그의 풍경 연작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 일상인 동시대 수많은 사람에게 다시금 불가해한 하늘의 공간을 보게 함으로써, 가장 원형적인 풍경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적인 시간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3월 2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