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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50주년 아르코미술관, ‘관계’로 미래 50년을 바라보다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서 만난 서로 다른 세대 작가 9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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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2호 김금영⁄ 2023.12.14 08:50:36

전시의 시작점엔 최진욱·박유미 작가의 회화와 영상이 자리한다. 사진=안용호 기자

내년 50주년을 맞는 아르코미술관이 현시점에서 새로운 50년을 바라보며 되새기고자 한 가치는 ‘관계’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의 50주년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가 12월 8일 개막했다.

아르코미술관은 1974년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관해 1979년 현 위치인 동숭동으로 이전했고, 초기 10여 년 대관전 중심의 운영 시기를 지나 1990년 후반부터 간헐적인 자체 기획전을 선보였다. 이후 2002년 마로니에미술관, 2005년 아르코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기획 초대전, 주제 기획전 등 자체 기획전 중심의 미술관으로서 성격을 확립하는 시기를 거쳤다.

 

지난해와 올해엔 오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지나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시대 전환을 맞으며 바뀐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식의 연대를 살피고, 사회적 의제까지 제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이 시대에서 앞으로 미술관이 어떻게 대응하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 속 아르코미술관 이야기를 돌아보는 시도를 담은 기획전들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용백·진기종 작가는 미디어, 설치 작업을 통해 전시장 한켠을 가득 채웠다. 사진=안용호 기자

미술관의 방향을 고민하는 이 기조는 이번 전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앞선 전시에서 ‘연대’에 대해 고민했는데, 연대를 맺기 위한 ‘관계’의 시작에 집중했다. 국내 작가 총 22명이 참여했는데, 총 9팀을 구성했다.

 

특히 본래 작가를 선정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미술관이 권한을 내려놓고, 작가들에게 함께 교류하고 싶은 서로 다른 세대의 작가를 직접 추천받는 형식으로 팀이 꾸려졌다. 이로 인해 서로의 작업을 기존에 알고 흥미가 있었지만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작가들끼리 만나는 상황도 생겼고, 결국 서로 다른 관계성을 지닌 총 9개의 작가 팀이 구성됐다.

사진을 기록화하는 작업으로 아르코미술관과도 연이 깊은 신학철 작가는 1923년 일본군 주도로 벌어진 조선인 학살 기록 사진을 보고 그린 대형 회화를 선보인다. 사진=안용호 기자

전시명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도 관계 이야기를 내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인용한 문구로, 주름이 지닌 과거와 미래의 접점, 즉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기는 여러 흔적과 접촉을 계기로 생긴 다양한 이야기를 전시에서 보여준다. 전시를 기획한 아르코미술관 차승주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현재가 접점의 궤적과 경로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살펴보고, 미술관의 미래가 어떤 접점들로 그려질 것인가 탐구하는 시도”라고 부연했다.

 

전시는 각 작가가 현재 집중하고 있는 신작이나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다른 세대를 경유한 작가들의 만남이 동시대 미술계에 던지는 화두를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기존 작업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당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하고, 서로 소통을 통해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 새로운 결과물을 선보이기도 한다.

관계의 시작에서 꽃피는 연대의 가능성

서로 다른 작업 경향을 지닌 홍명섭·김희라 작가는 오히려 그 대척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사진=안용호 기자

전시의 시작점엔 최진욱·박유미 작가의 회화와 영상이 자리한다. 이들이 주목한 건 ‘여성 어부’다. 박유미는 기존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던 어업에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에 내세우는 작업을 이어왔는데, 본래 작가를 둘러싼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이어온 최진욱이 함께 여성 어부 이야기를 시도했다. 이를 최진욱은 회화, 박유미는 영상 언어로 풀며 다양한 방식을 보여준다.

사람과 역사를 기반으로 작업해 온 서용선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고민하던 지점에서 오브제, 미디어 작업을 하는 두 젊은 작가 김민우·여송주와 이번 전시에서 만났다. 세 작가는 평면을 입체 영상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항일 농민 운동인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리는 작업을 선보인다.

아르코미술관 50주년 기념전은 작가들의 관계성이 돋보인다. 사진은 참여작가 정정엽(왼쪽), 장파. 사진=안용호 기자

이용백·진기종 작가는 미디어, 설치 작업을 통해 전시장 한켠을 가득 채웠다. PC에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오류가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 파란색 화면을 세계와 세계를 관통하는 통로의 문인 포털의 단절로 표현한 이용백의 ‘블루스크린’,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가 사라진 지구에서 방황하는 배의 항해를 담은 ‘항해’가 만나 ‘오류 부호: 포탈’ 합작을 완성했다. 각각의 이야기가 만나 구성한 공간은 지구 종말론적 분위기를 강화하지만, 이 와중 위태롭게 떠 있는 배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기도 하다.

 

사진을 기록화하는 작업으로 아르코미술관과도 연이 깊은 신학철 작가는 1923년 일본군 주도로 벌어진 조선인 학살 기록 사진을 보고 그린 대형 회화를 선보이는데, 이 작업을 김기라 작가가 오마주하며 영상으로 풀어냈다. 이들은 진실을 기록하는 사진, 그림, 영상의 역할에 주목하며 시대와 예술은 언제나 밀착돼 있고, 시대는 예술작품에 각인되기도, 예술에 의해 다시 발굴되기도 한다고 입을 모아 강조한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류하게 된 채우승·최수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혼용 방식을 시도한다. 사진=안용호 기자

서로 다른 작업 경향을 지닌 홍명섭·김희라 작가는 오히려 그 대척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김희라 작가의 바느질과 봉제에서 발견되는 찌르기, 자르기, 찢기 등 행위 요소들을 고문 메커니즘으로 드러나게 설정해 삶과 파괴, 생성과 침탈 등이 상호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시장에 구현됐다. 이야기는 거칠지언정 전시장 벽과 천장에 불현듯 나타나는 작품들은 오히려 아름다운 이미지로 눈을 현혹시킨다.

2층 전시장에선 정정엽·장파 작가의 작품이 만났다. 이번 전시를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들의 서사는 여성 그리고 회화로 귀결된다. ‘여자들의 세계’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전개 중인 장파 작가는 제주도 설문대 할망의 신화로 대변되는 여성 창조신 이야기를 다뤘는데, 이 계획을 들은 정정엽 작가가 현재 자신이 진행 중이던 나방 시리즈 작업과 연결 지으며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아르코미술관 전시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던 작고 작가 조성묵(1940~2016)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안용호 기자

각각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숙진·이희준 작가는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시대가 다른 데에서 발생하는 시차에 관심을 두고 이를 추상언어로 풀어내며 세대 구분과 지정학적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한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류하게 된 채우승·최수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혼용 방식, 토속 신앙이나 한 사회의 신화적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바탕으로 서로의 작업이 한 공간 안에서 어떻게 서로 침투하고 화답하는지 그 방식을 엿본다.

박기원·이진형 작가는 서로의 작업에 대한 화답, 오마주 회화를 선보인다. 특히 이진형 작가의 신작 회화 세 점과 박기원 작가의 한 점이 이어져 하나의 작업으로 구현된 풍경이 눈길을 끈다. 또한 아르코미술관 전시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던 작고 작가 중 공성훈(1965~2021), 김차섭(1942~2022), 조성묵(1940~2016) 작가의 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유작 및 미발표작을 함께 선보이며 작업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별관에서는 200여 점의 도록, 출판물, 사진, 영상 및 관계자 인터뷰로 구성된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아르코미술관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사진=안용호 기자

이밖에 별관에서는 200여 점의 도록, 출판물, 사진, 영상 및 관계자 인터뷰로 구성된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아르코미술관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약 50년 동안 2000여 건의 전시를 선보여 온 미술관의 지나온 발자취 안에서 향후 미술관의 모습을 그려보고, 미래의 가능한 방향을 유추해 보는 시간이 된다.

다양한 주제들이 이번 전시에 모였지만 그 주제들은 결국 서로의 관계, 소통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관계의 시작에서 비롯된 서사가 얼마나 다양한 미래를 그려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르코미술관 임근혜 관장은 "이번 전시는 1974년 미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연 뒤 현재의 아르코미술관까지의 커리어를 돌아보며 가장 아르코스러운 전시와 앞으로 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사진=안용호 기자

아르코미술관 임근혜 관장은 “50년의 역사는 꽤 긴 시간이다. 이로 인해 미술관의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번 전시는 1974년 미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연 뒤 현재의 아르코미술관까지의 커리어를 돌아보며 가장 아르코스러운 전시와 앞으로 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특히 아르코미술관 커리어의 재도약 지점에 주목했다”며 “동시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이 서사가 미래로 이어지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시에서 드러나는 작가 간 교류의 결과물을 통해 관계의 확장으로 형성되는 예술창작의 방법론을 고찰한다. 이는 50년을 맞이하는 미술관의 다양한 역할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다양한 예술 주체가 교류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는 장소로서 기능해 온 아르코미술관의 과거와 앞으로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아르코미술관 본관 및 공간열림에서 내년 3월 10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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