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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장’ 역사는 ‘싸전거리’서 시작됐다… 아산 정주영 일대기

신당동 쌀가게서 배달원으로 시작…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하며 車와 인연… 1975년 국산 고유 모델 자동차 ‘포니’ 론칭… 造船 강국으로 만든 일등공신… 서울 중구, ‘싸전거리에’ 정주영 조형물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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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5호 김응구⁄ 2024.01.22 10:34:24

아산 정주영은 영면에 들기 전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사진=현대건설 공식 블로그

지금은 북녘 땅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집에서 네 번째 가출을 했을 때 정주영(鄭周永)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인천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했고 부천 농가에선 품앗이 일꾼으로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선 신축 공사장과 엿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종착지는 신당동 쌀가게였다. ‘복흥상회’의 배달원이 됐다. ‘연봉’은 쌀 열두 가마니. 배달 자전거에 익숙지 않아 밤잠 안자고 연습했다. 쌀가마니를 균형 있게 싣는 방법까지 터득하고 나니 동네 최고 배달꾼이 돼 있었다. 사장은 6개월 만에 장부정리까지 그에게 맡겼다. 그 정도로 정주영을 신뢰했다.

2년이 지났을 쯤, 복흥상회 사장은 그에게 가게 인수를 제안했다. 1938년 1월, 단골을 모두 물려받은 정주영은 새로 ‘경일상회’를 설립했다. 그때 나이 스물넷. 이후 부지런히 새 거래처를 뚫으며 쌀가게를 키워나갔다.

문제가 생겼다. 당시는 일제강점기 시절.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쌀 배급제를 선포했다. 이 때문에 전국의 쌀가게가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경일상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판을 내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에게 논 2000평을 사드리고, 면장(面長)의 장녀와 결혼도 했다.

아산 정주영은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를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바꿔놓은 인물이다. 서울 계동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현대건설 공식 블로그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하며 본격 사업 시작

1940년 봄, 정주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기회를 맞는다. 쌀가게 시절 단골손님이었던 자동차 기술자 이을학 씨의 권유로 아현동의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첫날부터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 기쁨도 잠시. 문을 연 지 20일밖에 안 됐는데 공장에 불이 났다. 수리 중이던 트럭과 승용차가 모두 불에 탔다. 잿더미는 빚더미가 됐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았다. 평소 신용이 좋았던 정주영은 빚을 얻어 이번엔 동대문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웠다. 손님은 다시 몰렸지만 위기도 다시 찾아왔다. 1943년 일본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강제로 다른 기업과 합병됐다. 그래도 그 당시 자동차의 모든 기능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이해하게 됐다.

해방이 됐다. 1946년 4월, 정주영은 미 군정청(軍政廳)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중구 초동의 200평 땅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다. 간판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를 박아 넣었다. 현대(現代)를 지향하며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의미다.

단순히 차량 수리만 했던 건 아니다. 1.5t(톤) 트럭의 중간을 이어 덧붙여 2.5t짜리 트럭으로 만들어 내거나, 휘발유 차를 목탄차로 개조하기도 했다. 소문이 번지자 전국의 자동차 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처음 30명이던 직원은 1년 만에 80명까지 늘었다.

1947년 5월, 정주영은 ‘현대토건사’를 세웠다. 3년 후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하나로 합쳐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건설업 진출을 선언했다. 얼마 후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시 속에선 미군 긴급공사에 뛰어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 탈환 후 미군 발주 공사는 현대건설이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휴전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 사회간접자본시설 복구공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도로, 항만, 교량 등 여러 토목건축공사를 수행하면서 현대건설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957년 단일 공사로는 전후(戰後) 최대 규모인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르러 대한민국은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사업들을 활발히 진행했다. 그중 선행됐던 게 국가 기간(基幹)시설 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은 호남비료공장·한국비료·충주비료공장을 차례로 건설했다. 삼척·영월·군산·인천·평택에는 화력발전소를 지으며 기술력을 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수력발전소인 춘천댐과 다목적댐인 소양강댐 건설까지 이어졌다. 소양강댐은 부족한 시멘트와 철근을 대체하기 위해 콘크리트댐이 아닌 자갈·모래를 이용한 사력(砂礫)댐으로 완성시켰다.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였던 ‘경부고속도로’

정주영이 주도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였다. 공사 기간은 처음엔 3년이었다. 당시 기술 수준과 건설 장비로 그 기간에 428㎞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건 모험에 가까웠다. 그는 기계화를 통한 공기(工期) 단축을 해법으로 냈다. 그리고선 천문학적 금액인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중장비가 1400대 정도였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들여온 중장비는 1900대였다. 마침내 1970년 7월 7일, 착공 2년 5개월 만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이 같은 결과는 농업과 경공업 등 1차 산업 일색이던 산업 구조를 변화시킨 동력이 됐고, 결국 대한민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됐다.

조선(造船) 강국의 신화를 만든 것도 정주영이었다. 1960년대 말 한국의 선박 건조 능력은 최대 10만300톤이었다. 최대 건조실적은 미국에서 수주한 1만7000톤짜리가 전부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수십만 톤 규모의 조선소를 건립하는, 다소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1971년에는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영국에 갔다. 차관(借款) 때문이었다. 정주영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돈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보여줬다. 우리나라 조선 기술의 역사와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억 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했고, 이에 더해 조선소 하나 없이 그리스로부터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수주했다.

그는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建造)를 동시에 진행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2년 만에 조선소 완공은 물론 유조선 두 척을 만들어낸, 세계 조선사상 유례없는 신화를 썼다.

아산 정주영은 자동차가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마침내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다. 사진=현대자동차그룹

1975년 ‘포니’ 론칭… 세계 5위권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

정주영은 자동차가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달리는 국기(國旗)’이자 그 나라 산업의 척도로 생각했다. 그런 끝에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다. 이어 미국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생산 협약을 맺고 합작회사 형태로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만족할 그가 아니다. 국산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기로 맘먹었다. 1975년 12월, 그렇게 ‘포니(PONY)’가 탄생했다.

제2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불황에 빠진 1980년대 초에는 ‘X카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리 힘으로 전륜구동(前輪驅動) 고유 모델을 개발해 자동산 산업의 본고장인 북미 시장에 진출하려는 목적이었다. 국내 첫 전륜구동 승용차인 ‘포니 엑셀’(1985)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자동차 수출국 대열에 올랐다.

1983년에는 ‘신(新) 엔진 개발 계획’을 세웠다. 연구소를 설립해 국내외 인재를 모으고 해외로 기술 연수를 보냈다. 그때부터 현대자동차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며 현대자동차와 함께 전 세계로 생산법인을 넓혀나갔다. 그렇게 전 세계 5위권에 들어가는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로 도약했다.

“기업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의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종업원 공동의 것이요, 나아가 국가와 사회의 것이다.”

정주영은 생전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강조했다. 그런 신념을 바탕으로 1977년 공익재단인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를 위해 당시 보유했던 현대건설의 개인 주식 50%를 출연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라는 분명한 사회공헌 철학 아래 처음부터 의료시설이 열악한 농어촌지역을 방문해 무료 진료 사업을 펼쳤다. 이후에는 전국에 걸쳐 대규모 종합병원 8곳도 건립했다.

대한민국을 조선(造船) 강국으로 만든 인물도 아산 정주영이었다. 사진=현대자동차그룹

“모든 걸 가능하다 생각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신념의 바탕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한 사람일 뿐이다.”

2001년 3월 21일, 아산(峨山) 정주영은 영면에 들었다. 향년 86세.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정주영 선대회장 쌀가게 있었던 중구 ‘싸전거리’

서울 중구의 신중앙시장 ‘싸전거리’는 정주영 선대회장의 첫 직장이었던 쌀가게 ‘복흥상회’와 이를 인수해 새롭게 세운 ‘경일상회’가 자리했던 곳이다.

싸전거리는 1950~6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양곡(糧穀) 도·소매시장이었다. 당시 서울시민이 먹었던 쌀의 70% 이상을 유통했을 정도로 번성했다. 1958년에는 쌀가게만 44곳에 달했다. 지금은 몇 곳만 남아있다.

싸전거리는 ‘황학가구거리’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황학동 만물시장’으로 부른다. 이곳 역시 과거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이 오갔고, 그 수보다 훨씬 많은 중고품이 여기저기 쌓였다. 하지만 오늘날 황학동은 많이 달라졌다. 구경꾼과 소비자는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깨끗이 포장한 도로와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들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5년 전부터는 쌀 창고로 쓰던 공간을 개조해 만든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고 있다.

오늘날 황학동은 ‘주방거리’와 ‘가구거리’가 중요한 상권이다. 그중 가구거리는 현재 영업용 가구를 주로 판매하며, 외식업·인테리어용 의자를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많다. 중고품으로 이름난 황학동이지만 의외로 새 가구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이곳에는 목재상과 함께 문짝과 창호를 다루는 ‘창호목재거리’도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중구는 신당동 황학가구거리 입구에 싸전거리 안내판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사진=중구청, 김응구 기자

중구는 ‘힙당동’(힙한 신당동)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정주영 선대회장의 ‘삶과 도전’을 소개하고자 지난해 12월 26일 싸전거리에 안내판과 조형물을 설치했다. 2호선 신당역 1번 출구에는 싸전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두었고, 싸전거리 바닥에는 정주영 선대회장의 어록을 새긴 쇠판 네 개를 박아놓았다.

김길성 중구청장은 “현대자동차의 역사가 신당동 싸전거리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흥미롭고, 또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며 “근면과 성실이라는 ‘기본’에서 출발해 자수성가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중구의 작업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청년들에게 힘이 돼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중구는 현재 운영 중인 ‘광희문 달빛로드’ 해설사 도보 투어에 3월부터 신당동 싸전 거리를 추가할 예정이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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