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최근 “민주당은 중도보수”라고 말한 데 대해 정치권은 물론 보수-진보 언론이 모두 “역풍 우려”(한겨레신문), “몰역사적 월권”(서울경제)이라며 비판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이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중도 보수’도 아니고 ‘그냥 보수’ 정당이라는 사실은 그간 수많은 정치학자와 외국인이 증언해 왔다.
외국 전문가는 어떻게 보나
몇몇 예만 보자. 우선 외국인의 시각이다. 세계적 경제 전문지인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에서 해외언론비서관실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던 다니엘 튜더의 책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2015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중도 진보 정당이 진작 출범했어야 (중략, 이하 중략 부분은 ‘…’으로 표기) 새누리당에 끌려다니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제를 설정하는 정당”(149쪽)
한국에는 중도 진보 정당도 없다는 진단이다. 그는 민주당의 재벌에 대한 행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대기업 총수들도 줄줄이 사면됐다. 모두 민주당이 야당일 때 반대했던 사안들이다.”(70쪽)
민주당이 야당일 때는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보수당의 처분에 극렬 반대했지만, 정작 집권하면 똑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이다.
튜더는 한국에는 진보적 언론도 없다고도 비판했다. “한겨레보다 더욱 합리적인 진보 성향의 신문, 좀더 균형감각 있고 잘한 게 있을 때는 때때로 정부를 칭찬할 줄도 아는 신문이 더 많은 독자에게 어필하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 미묘하게 편향된 주류 언론에 영향을 받는 중도 유권자층을 설득할 수 없다. 진보적이되 합리적이어야 (…) 건강, 생활, 음식 같은 주제처럼 비정치적인 소프트한 내용도 보강해야 (…) 지적이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디어를 지향해야”(65쪽)
튜더는 한국에 진보 언론이 없다면서 ‘합리적 진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치에 맞추는’ 게 합리다. 이치에 맞추려면 이치를 알아야 한다. 먼저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정당 체계는 ‘보수 독점’이라는 게 국제적으로, 학문적으로 상식인데, 이재명이란 유력 잠룡이 그걸 입 밖에 내놨다고 해서 이렇게 비난이 쏠리는 건 참으로 합리적이지 못하다.
정치학자들의 분석은?
한국 정치에 대해 집중적으로 발언해온 학자 그룹으로는 고려대 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들이 있다.
최 교수가 펴내 크게 주목받았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10년)에서 관련된 몇 문장을 뽑아본다.
“한국의 정당 체제는 분단국가를 만들었던 두 중심 세력인 이승만 그룹과 한민당(이후 민국당, 민주당으로 변화)이 (…)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 위에서 경쟁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엘리트 중심 성격이 강하다”
“김대중 당이 갖는 보수적-엘리트적 요소는 (…) 개혁적-민중적 성격과 충돌”
“중요하지만 억압된 이슈들이 정치 경쟁에 들어오게 될 때, 그래서 기존 정당들이 이를 무시할 경우 새 정당이 용이하게 만들어질 수 있게 될 때 보수적 정당 간의 끝없는 저질 경쟁은 멈추도록 강제될 것”
“보수 독점적 정당 체계의 구조 변화가 중요”
이상 네 인용문은 모두 1945년 독립 이후 대한민국의 정당 체제는 ‘보수 only’란 기반 위에서 출범했으며, 보수 이외의 진보 정당은 체제 내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해방 뒤 한국 정치는 ‘미국처럼’ 짜여졌다. 다 알다시피 미국에는 유럽 식의 진보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에서 기민당(기독민주당), 기사당(기독사회당)은 보수 정당으로, 그리고 사민당(사회민주당)은 진보로 규정된다. 하지만 최 교수는 책 ‘7인의 충고’(2016년)에서 “독일의 기민-기사당은 우리나라의 진보 정당보다도 더 진보적인 정당”(47쪽)이라고 분류했다. 독일의 보수당이 한국의 이른바 진보 정당보다도 더 진보적이라니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최 교수의 제자인 박상훈 박사도 ‘정치의 발견’(2011년)에서 비슷한 시각을 드러냈다.
“민주화 이후 체제는 구체제에 기원을 둔 보수적 정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 등장 (…) 사회적 요구 사이의 괴리는 계속 (…) 한국 정치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독점적 정당 체제의 다른 얼굴이다. (…) 선거 때마다 정치 엘리트 교체율은 세계 최고이고,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의 등장-소멸이 반복됐지만 구조와 제도로서의 정치의 보수성은 그대로”(115쪽)
이런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도 있지 않은가? ‘기득권 양당’이라는.
최상류를 대변하는 제1당과 그 아래 주류를 대변하는 제2당
심리학자로서 한국 정치에도 상당한 분석력을 과시하는 김태형은 저서 ‘싸우는 심리학’(2022년)에서 민주당에 대해 이렇게 썼다.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극소수 상류층에서 소외된 나머지 주류층의 이익을 대변한다. (…) 진보정당이 약진할 때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연합하여 펼친 종북 공세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178쪽)
명칭은 여러 번 바뀌어 왔지만 통틀어서 ‘새누리당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보수(국제적 기준으로는 극우) 정당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공화당이 ‘육법당’(‘육’사 출신과 서울 ‘법’대 출신이 주축이라는 의미)일 때부터 시험 성적 최상층인 1급 엘리트들로 구성됐다. 반면 민주당 계열은 그에 저항하는 1.5급 엘리트로 구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의 제도권 정치인들은 엘리트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따라서 사회 기층의 목소리에는 처음부터 귀 기울일 생각이 극히 약하다. 그래서 진보 정당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할 듯하면 두 기득권 정당이 힘을 합쳐 분쇄해 왔다는 게 김태형 소장의 분석이다.
진보 정치인들은 어떻게 보나?
민주당이 얼마나 ‘반(反)진보적’인지는, 현재 민주당 정치인 중에서 가장 왼쪽에 서 있다고 할 수도 있는 추미애 의원에 대한 진보 정당 쪽 입장에서도 드러난다.
진보 정치인으로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섰던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당대표는 저서 ‘진보를 복기하다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2016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2009년 7월 노동조합법 개악 (…)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민주당 소속 추미애 위원장이 상임위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그고 한나라당 의원들만 참석시킨 채로 한나라당 안을 일부만 고친 ‘추미애 중재안’을 날치기로 처리해 버렸다. (…) 한나라당 안이 대부분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 이유다.”(32쪽)
한국은 산업재해 사망자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다. 이런 비극은 바로 노동자를 안중에 두지 않는 기득권 양당의 국회 지배 결과라는 게 진보 정치인 이정희의 지적이다.
위에서 검토했듯, 외국인이 보나, 정치학자가 보나, 진보 정치인이 보나, 민주당은 기껏해야 보수 중도에도 못 미치는 그저 보수 정당이라는 게 결론이다.
‘왕따의 정치학’은 영원한가?
이재명 대표는 “나 자신이 중도보수”라고 말한 게 아니라 “민주당은 중도보수”라고 말했다. 널리 인정되는 상식을 한 번 더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보수-진보 언론이 입을 맞춘 듯 비난한다.
조기숙 정치학 교수는 저서 ‘왕따의 정치학’(2017년)에서 당시 트위터에 돌아다녔던 다음 문구들을 소개했다.
새누리당이 잘못하면 정치권 전체의 잘못,
국민의당이 잘못하면 야권의 잘못.
정의당이 잘못하면 정의당 잘못,
민주당이 잘못하면 민주당 잘못
새누리당이 잘못해도 문재인 잘못,
국민의당이 잘못해도 문재인 잘못,
민주당이 잘못해도 문재인 잘못
이 트위터 문구의 최신판을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국민의힘이 잘못하면 정치권 전체의 잘못 또는 이재명의 잘못,
민주당이 잘못하면 이재명의 잘못
누가 잘못했건 일단 이재명 또는 민주당을 공격하고 보는 습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사람의 급수를 나누는 학벌 사회라서 그렇다. 시험에서 최고 성적을 받은 1급 엘리트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전지전능적 지배층인 1급들을 공격하면 심각한 반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래 단계인 1.5급 엘리트들은 공격을 받더라도 반격을 거의 않거나 아니면 반격의 정도가 약하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