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0호 김예은⁄ 2025.02.24 17:07:29
밸류업 정책을 위한 법적 제도 장치 마련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주환원 정책에만 초점을 두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밸류업 추진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는 상장기업의 중·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투하한 ‘자본의 수익률’ 개선과 ‘주주환원 확대’라는 양대 기업가치 성장 축이 중장기적 관점에서 주주가 요구하는 수익률과 부합해야 한다.
밸류업 정책 추진 이후 시장에서는 주로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에 초점을 맞춰왔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자본의 수익률’ 개선을 위한 장기적 투자의 관점 역시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삼성전자 10조 자사주 매입 계획의 문제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경쟁력 약화로 -32%의 주가수익률을 기록하는 장기 침체기를 맞았다. 이는 지난 7월 11일 기록한 장중 최고가 8만 8800원 대비로는 40% 이상 하락한 수치다. 그럼에도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서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이라는 주주환원책을 꺼내 들며 증시 부양을 유도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정부가 타깃한 ‘주주환원’ 측면의 기업가치 제고 대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에 맹점이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밸류업 정책 시행 이전부터 3개년 단위로 다른 상장사 대비 꽤 명확한 주주환원책을 운영해 온 기업이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전자에게 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인공지능(AI)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삼성전자에 놓인 미래 성장성의 불확실성이었다. AI 시대로의 전환은 반도체 산업에 큰 변곡점을 초래했지만, 삼성전자는 앞서 연구개발(R&D)이나 자본적 지출(CAPEX) 측면에서 이러한 시장 대응과 경쟁력 확보가 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주주들에게 당장 현금을 쥐여주는 환원 정책보다는, 후자인 '자본의 수익률 확대'를 목표로 적절한 자본 투자를 통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장기 기업가치 제고에 더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정부가 밸류업 정책을 추진하며 기업이 스스로 자본 가치를 평가하고 중장기적 목표를 제시하는 자율성을 부여한 것 역시, 산업과 기업 특성에 맞는 목표를 기업 자율로 판단하고 독립적 경영 전략을 견지하라는 의미다.
삼성전자와 같이 제조업 중심의 자본 집약적 산업에서는 높은 자본적 지출이 요구되며, 이는 단기적으로 ROE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자본 투자에 기한 장기적 경쟁력 확보는 수익 실현 시점부터 ROE를 급성장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실효성 있는 투자안을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ROE를 개선해 가는 방안을 내놓는 것이 자본 집약적 산업에는 더 적합한 대안인 것이다. 또한 이같은 자본 투자 시장을 활성화해 기업 투자와 성장성 제고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 밸류업 정책의 궁극적 목표다.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1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 정책을 발표한 것에 대해 스스로 자충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AI 반도체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자본 투자를 비롯해 경쟁사로 유출된 반도체 인력 복원과 M&A 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10조원의 자본 투자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이보미 연구원은 “밸류업 프로그램의 목표는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에 있으나 기업과 투자자 모두 단기적으로 PBR을 높일 수 있는 주주환원에 지나친 관심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이 투자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주주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주주 활동을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장기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 자본 수익률’ 개선을 위한 중장기 투자 전략에도 주목해야
밸류업 정책의 앞선 사례로 참조하고 있는 도쿄증권거래소의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천 방안’의 추진 배경에도 일본의 상장 기업 중 PBR(주가/주당순자산)이 1 미만인 기업과 ROE(당기순이익/자본총액)가 자기자본비용(Cost of Equity)보다 낮은 기업이 많아 주식으로 자금을 조달하였음에도 자본효율성을 간과한 경영을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PBR이 1보다 작은 것은 주가가 자기자본의 주당 장부가치, 즉 청산가치보다 작다는 것이며, ROE가 자기자본비용보다 낮은 것은 자본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이 자기자본 조달에 드는 비용보다 작다는 것이다.
PBR과 ROE를 개선하자는 것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 자본효율성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정책이지, 결코 이것이 단기적으로 부각되는 성과에 치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PBR 수치가 주요 관심 대상이 되면서 기업과 투자자 모두 자사주의 매입 및 소각, 배당률 제고 등 단기적으로 PBR을 높일 수 있는 주주환원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문제 요소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해 밸류업 모멘텀 발생에 따라 시장에서 단기간에 성장 전환한 은행, 증권사 등 PBR이 낮은 금융회사는 역대 최대의 초과 상승세를 기록했다. 특히 이들 산업의 특성상 적정보통주자본비율(CET1)이 높아 주주환원 확대 기대감이 쏠렸고, 그 결과 CET1이 큰 은행 지주사들이 중심이 되어 주가가 크게 상승했다.
CET1 비율은 자본을 위험가중자산(RWA)으로 나눈 값으로, 금융사가 위기 상황에서 손실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핵심 지표다. 자본비율 수준에 따라 주주환원의 강도가 달라지게 되므로 은행들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서 자본비율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자본비율을 높이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ROE(자기자본이익률) 상승이지만, 은행 산업 특성상 ROE를 큰 폭으로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기업들은 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CET1 산출 시 분모에 해당하는 RWA 조율을 통해 자본비율을 조정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금융당국이 판단하는 충분한 손실 흡수 능력을 갖춘 CET1 비율 기준은 대형 은행 지주사 13%, 지방은행 지주사 12% 수준이다. 이 기준을 초과하는 경우에만 주주환원 확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금융주 특성에 맞는 자본 효율화 방안일 뿐, 이 같은 자본 활용안이 모든 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원 역시 이같이 주주환원의 즉각적인 주가 부양 효과가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투자자의 자금이 오히려 성장성이 낮은 기업에 집중되고, 투자를 통해 성장해야 할 기업까지 주주환원을 우선시한다면 결국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초래하고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는 제고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늘리는 기업이 늘어나고 투자자도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자 도쿄증권거래소가 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거래소는 자본비용을 초과하는 투자 기회가 있는 기업은 투자를 우선시해야 하며, 자본조정을 통해 형식적으로 PBR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지속 가능한 사업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밸류업 프로그램 역시 보도자료와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기업이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추진하고 있는 주주 환원액에 대한 법인세 세액공제, 주주에 대한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의 혜택 강화는 자칫 이같은 정책의 '주주환원'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이 연구원은 “앞으로 밸류업 우수사례 발굴, 표창 기업 선정, 밸류업 지수에서 투자를 통한 기업 성장에 중점을 둠으로써 밸류업 프로그램이 기업 성장을 통한 중장기적 가치 제고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투자자와 기업에 명확히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시장연구원 이효섭 실장 역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이 기업의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향상이 이번 프로그램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사례의 벤치마크를 넘어, 세제 혜택 등 과감한 인센티브, 스튜어드십 코드 반영 등 차별점까지 포함하여 보다 실효성 있는 방안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일본 실증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PBR 1 미만 기업을 맹목적으로 투자하기보다 중장기 수익성·성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투자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