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위기 넘었지만 이제는 제도화된 회복력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 양극화와 권력 집중이라는 구조적 병폐에 직면하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가 제기됐다.
19일 최종현학술원(이사장 최태원 SK 회장)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인도태평양민주주의포럼이 공동 주최하고,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열린 ‘민주주의미래포럼’에서 정치권과 학계 인사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후퇴의 흐름에 놓여 있으며, 정치 양극화와 경직된 권력 구조가 지속되는 한 장기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주의 도전과 과제’를 주제로 한 이번 포럼에서는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해 세계적 베스트셀러 ‘역사의 종언’으로 저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인도태평양민주주의포럼(IPDF) 소속인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 이숙종 성균관대 특임교수, 김선혁 고려대 교수, 기요테루 츠츠이 스탠퍼드대 교수, 허성욱 서울대 교수, 이선우 전북대 교수, 디디 쿠오 스탠퍼드대 프리먼-스포글리 국제문제연구소(FSI) 센터 펠로우가 참여했다. 사회는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과 강원택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원장이 맡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지난 6개월간 세계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주목했고, 감탄했다”며 “비상계엄에 맞서 헌법을 지키려는 국민의 열망과 헌법기관의 책임 있는 대응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평가했다.
우 의장은 이어 “극심한 양극화와 불공정, 불평등, 무한경쟁의 질서는 시민적 참여와 관용의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며, 민주주의와 민생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강조했다. 우 의장은 “오늘 이 포럼이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를 넘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통찰을 제공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는 개회사에서 “이번 포럼은 단순한 정치 담론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진단하고, 실질적 제도 개혁의 방향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민주주의는 타협과 견제라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며, “이번 포럼이 우리 모두에게 민주주의의 미래를 다시 성찰하고, 새롭게 써 내려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 제도와 역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는 영상 축사를 통해 “한국은 계엄 시도를 저지하고, 시민사회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이뤄내며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뤘다”며 “제가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방문해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그곳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처럼, 한국의 젊은 세대가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이를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는 것”이라며,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 연대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극단화된 팬덤 정치, 민주주의 기반 흔들어”
“다당제·정치적 타협 구조 마련해야”
이날 포럼의 중심 의제는 ‘정치 양극화’였다. 이숙종 성균관대 교수는 “2021년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의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국민 90%는 ‘서로 다른 정당 지지자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다’고 응답했다”며 한국의 정치 양극화가 선진국은 물론 아시아 주요 국가들과 비교해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 등 정치적 격변이 진보와 보수 진영 간 갈등을 극단적으로 고착화시켰으며, 유권자들은 상대 진영에 대한 깊은 불신과 감정적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중도층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양당 중심의 선거 구조가 유권자들을 극단적인 진영 선택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정당들은 팬덤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약화되고, 허위 정보 확산과 국가기관 불신으로 민주주의 기반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다. 이 교수는 승자독식 ▲선거제 개편 ▲다당제 활성화 ▲정치적 타협 구조 마련 등 실질적 제도 개혁을 통해 탈양극화 전략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민주주의, 양극화·경제 불평등·편향 콘텐츠 확산 속 후퇴”
“한국이 직면한 문제와 유사”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소셜미디어의 콘텐츠 편향성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소셜미디어는 소수의 미국 기업들이 운영하며, 이들의 알고리즘은 민주주의나 사회 안정이 아니라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사용자에게 더 많이 노출되도록 설계된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플랫폼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유럽은 국가가 콘텐츠를 규제하지만 이 또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양쪽 모델 모두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대안으로 후쿠야마 교수는 ‘미들웨어’(middleware) 개념을 제시했다.
“콘텐츠 조정 기능을 거대 플랫폼이 아닌, 사용자가 직접 선택한 제3의 중립적 중개기관에 위임해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이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필터링 기준에 따라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어, 무분별한 정보 확산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요테루 츠츠이 스탠퍼드대 교수는 “소셜미디어는 포퓰리즘 정치인이 대중과 직접 연결되는 강력한 도구”라며 “이를 공공재로 보고 정부 차원의 규제와 정책적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만,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는 기술을 활용한 대응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한국도 이제는 소셜미디어의 공공적 성격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디디 쿠오 스탠퍼드대 프리먼-스포글리 국제문제연구소(FSI) 센터 펠로우는 “미국에는 여전히 ▲대통령 권력 견제를 위한 법적 제도 정비 ▲초당적 친민주주의 연대 구축 ▲중도 정치 세력의 재편을 통한 극단주의 선거 패배 유도 등 회복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민주주의 복원은 결국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87년 체제는 한계…정치개혁과 선거제 개편 더는 미룰 수 없어”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주주의 후퇴의 근원을 뉴미디어 확산과 구시대적 정치제도에서 찾았다. 그는 “알고리즘 기반의 소셜미디어는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을 강화하고, 타인의 의견 수용을 차단함으로써 제왕적 대통령제와 승자독식 선거제가 양극화를 구조적으로 고착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의원은 “국제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더 이상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영국 EIU의 민주주의 지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뉴미디어 환경과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독식 소선거구제가 복합적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민주시민 교육 강화 ▲헌법 개정 ▲협치 가능한 선거제도 개혁 등을 제시했다.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그는 “비상계엄, 탄핵, 대선 등 일련의 정치 사건은 1987년 헌법 체제가 시대적 요구를 더 이상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진단하며, “대통령과 협치하고 국민 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국회 중심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헌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헌법재판소 대통령 탄핵결정문에서 국회의 책임을 지적한 대목을 인용하며 “지금의 권력구조는 책임정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대한민국이 G7 반열에 오른 선진국이라면, 선진의회주의 제도에 맞는 국가체제를 갖춰야 한다”며 개헌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도 개혁의 구체 방안으로는 ▲사표를 줄이고 협치를 가능케 하는 중대선거구제 도입 ▲팬덤 정치 극복을 위한 정당법 개정 및 정당 민주성 강화 ▲여론조사 배제형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 도입 등을 제안했다. 그는 “정당이 정쟁보다 정책 중심으로 운영돼야 한다”며,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정치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제도개혁 넘어 정책 참여로 완성”
학계, 개헌·선거제 개편 한목소리
김선혁 고려대 교수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둘러싼 국민적 합의와 이를 정치권에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동력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시민 공론화위원회의 상설화 ▲공론조사의 제도화 및 확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숙의민주주의 활성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도입·강화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정치 교육과 시민 교육 역시 장기적 민주주의 회복력의 핵심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교육 체계에서는 정파적 균열과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통일된 커리큘럼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제도개혁뿐만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에 이뤄지는 정책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고 덧붙였다.
이선우 전북대 교수는 다양한 권력구조 개편안을 비교 분석하며, 현실적 대안으로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그는 “현 대통령제는 적대적 양당제 구조 하에서 대통령 독주와 국정 마비라는 딜레마를 낳고 있다”며, “비례대표 확대, 중대선거구제, 결선투표제 등 다당제 정착을 위한 선거제 개편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개헌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대통령의 인사권·권력기관 장악권을 축소하고 행정부 권한을 분산하는 중간 단계 개혁을 통해 갈등과 대립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성욱 서울대 교수는 “2025년 이후 민주주의가 직면할 새로운 과제는 전통적 권력 투쟁이 아니라 기술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나타나는 선택의 방식”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AI가 인간의 합리적 선택을 대체할 가능성 ▲시장과 정치의 선택 충돌 ▲개인적 선택과 사회적 선택의 긴장 ▲기후변화 등 위험사회적 변수 ▲극단적 불확실성 하에서의 정책 결정 등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할 미래적 도전 과제를 제시하며, “민주주의는 결국 ‘누가’,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제도”라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