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그러니까 정확히 7월 16일. 미국 보스턴에서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공연이 열렸다.
카메라가 한 커플을 향했다. 남자는 여자 뒤에서 백허그를 하고 있다. 야구장에서 흔히 보는 ‘키스 캠’ 시간이었나 보다. 주위에선 “키스해! 키스해!”를 연발하고, 커플은 마지못해 뽀뽀하고, 사람들은 박수치며 환호하는, 그런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아뿔싸. 커플은 놀라 주저앉았다. 뭔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표정이다. 얼굴도 가렸다. 분명 머쓱함에 얼굴이 벌게져 있어야 할 상황인데, 붉다 못해 검게 번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 둘은 불륜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미국 IT 기업 아스트로노머의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인사책임자(CPO)로 밝혀졌다. 둘의 애정 행각은 그렇게 들통 나버렸다. 그것도 만천하에.
패스트버타이징의 좋은 예, 라이언 레이놀즈
라이언 레이놀즈. 우리에게 영화 ‘데드풀’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다. 작년엔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홍보차 휴 잭맨과 우리나라에 오기도 했다. 그는 재주꾼이다. 본업도 본업이지만 본업 같은 부업으로도 이름깨나 알리고 있다. 2018년에는 진(Gin) 생산업체인 ‘에비에이션 아메리칸 진’을 인수하기도 했다.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무엇보다 광고·마케팅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운영하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맥시멈 에포트’는 기발한 광고로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온라인 여기저기선 독특하거나 재치 있는 광고·마케팅 기법의 예로 소개되기도 한다.
앞서 발각됐다던 불륜 사건. 레이놀즈는 그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좋은 ‘먹잇감’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벌어진 지 10일째 되는 7월 26일, 그 IT 회사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에 동영상 하나를 올렸다. 생각지도 않게 유명 헐리우드 배우 기네스 팰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실실 웃으며 말한다. 대략 줄여서 소개하면, 최근 며칠간 아스트로노머는 수많은 질문을 받았고, 회사 측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은 질문에 내가 대신 답변해줄 걸 요청했단다. 그리고 이 회사 임직원 300여명을 대신해 본인이 답변하도록 임시 채용됐다고 했다. 누가 봐도 불륜 행각에 대해 팰트로가 아스트로노머를 대신해 입장정리를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첫 번째 질문이 나온다. ‘OMG! What the actual f…’ 그러니까 ‘세상에,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냐’는 질문을 하는 듯 보인다. 다 묻지도 못했는데 팰트로가 잽싸게 대답한다. “Yes, Astronomer is the best place to run Apache Airflow, unifying the experience of running…” 대충 들어도 아스트로노모가 뭘 하는 회산지 주저리주저리 알려주는 듯하다. 마지막엔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로 돌아갈 것이라며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하곤 끝낸다.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중은 허탈하다. 이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 불륜에 대한 입장이 뭔지 알고 싶었으나 그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만 귀에 박혔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다. 물론, 이걸 가지고 시비 걸거나 화낼 사람은 없다. 딱 1분짜리 이 유튜브 영상은 12월 12일 현재 조회 수 74만회에 댓글 1035개를 기록하고 있다.
레이놀즈의 맥시엄 에포트는 이 기획으로 다시 한번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아, 근데 왜 팰트로였을까. 맥시엄 에포트는 이 광고를 기획하며 왜 그를 주목하고 발탁했을까. 팰트로는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의 전 부인이다. 우연이라면 할 말 없지만.
이렇듯 사회의 큰 이슈를 가지고 와서 이를 패러디하거나 더 크게 이슈화하는 광고 기법을 ‘패스트버타이징(Fast+Advertising)’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빠른 광고’다. 이슈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전 빠르게 기획해서 만든 후 공개한다.
대개 하나의 광고를 만들기 위해선 기획하고 섭외하고 만들고 수정하고를 반복한다. 그러려면 몇 개월은 훌쩍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스트버타이징은 그럴 시간이 없다. 그 이슈가 사그라지기 전 빨리 해치워야 한다.
젠슨 황·이재용·정의선 그리고 ‘쏘맥 회동’
지난 10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놀라운 선물을 안겨주겠다며 한국을 찾았다. 그리곤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치킨집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만나 ‘치맥(치킨+맥주) 회동’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삼성전자·현대차그룹·SK·네이버 등에 공급하고, 이를 통해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웃돈을 얹어준대도 못 산다는 엔비디아 GPU를 수백 장, 수천 장도 아닌 26만장을 푼다니, 선물 중에서도 아주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날 치맥 회동은 엄청난 화제였다. 각종 매체는 연이어 해당 소식을 쏟아냈고, GPU를 조명하는 기사부터 회동이 열렸던 치킨집을 소개하는 내용까지 생산해냈다. 급기야 그날 셋이 마셨던 ‘쏘맥(소주+맥주)’과 이를 즉석에서 만드는 기기까지 다뤘다.
해당 브랜드를 생산하는 주류기업은 이를 가만두고 볼 일이 아니다. 글로벌 수장들의 이날 회동을 패러디한 광고를 재빨리 만들어 며칠 후 공개했다. 영상 제목은 ‘테라의 시대 2’.
가죽 재킷을 입은 흰머리의 남자가 치킨집에 들어선다. 젠슨 황처럼 보이지만 젠슨 황은 아닌 거다. 그가 한 테이블 위에 ‘테라 쏘맥타워’를 올려놓고 “Dinner is Free tonight!(저녁은 내가 낸다!)”라고 외치자 손님들이 환호한다. 이때 한 손님이 “그럼 여기 테라 세 병이요!”라고 요청하고, 이어 치킨집 사장 역을 맡은 박술녀 한복디자이너가 등장한다. 이후 냉장고 문이 열리며 내부의 하이트진로 제품들이 보이고, 러브샷하는 세 명과 함께 “테라의 시대, 디 에라 오브 테라(THE ERA OF TERRA)”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재미를 더했다. “사장님, 저분이 그래픽카드로 결제되냐는데요?”라고 묻는 알바생을 박술녀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알바생은 민망한 듯 “안된다고 할게요”라며 영상이 마무리된다.
하이트진로는 이 광고의 콘티를 3일 만에 만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고, 후반 작업까지 거쳐 단 2주 만에 영상을 완성해냈다. 전형적인 패스트버타이징이다. 더구나 젠슨 황, 이재용·정의선 회장이 실제 회동했던 장소인 ‘깐부치킨 삼성점’에서 광고를 촬영해 완성도를 높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난달 17일 주요 디지털 채널에 공개했는데, 3주 만에 조회 수 1000만회를 돌파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큰 화제를 모으자, 하이트진로는 이 광고를 TV로까지 확대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사회적 이슈를 유머러스하게 재해석해 테라의 생동감과 즐거움을 전달하겠다는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이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테라가 가진 상상력을 유쾌하게 현실과 연결하는 이색적인 마케팅 활동으로 ‘테라의 시대’ 화제성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