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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에도 ‘그들은 무죄였다’

<현장> ‘인혁당재건위사건’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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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3호 ⁄ 2007.07.03 10:40:44

이수병·서도원·도예종·송상진·하재완·김용원·우홍선·여정남/ 그날 1975년 4월 9일 새벽/ 여덟 명의 사내는 그렇게 죽었다/ 2007년 오늘, 1975년 그날/ 그들의 인혁당 조직 관련 혐의는 대한민국 법 앞에 영영 무죄다/ 그 전에 그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영영 무죄다/ 그 전에 그들은 죽음 앞에 영영 무죄다. (김정환 시인의 ‘2007년 오늘, 1975년 그날’ 중에서) 1975년 4월 9일 = 박정희 독재정권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에게 ‘인혁당재건위’라는 오명을 씌운다.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며 이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18시간만에 8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32년이 흐른 2007년 4월 9일 =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잔디광장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유가족들과 각계 인사 300여명이 32년 전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옛 서대문형무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고인들이 사형을 당한 사형장이 있는 곳이며 옥고를 치르기도 한 곳이다. 특히 이날 추모제는 지난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32년만에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선고한 뒤라 여느 해와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허망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과 동지를 잃은 이들의 슬픔은 32년 전 그대로인 듯 보였다. ■ ‘독재권력이 앗아간 생명, 누가 살려낼 것인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전창일 씨. 그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옛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32년 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사랑하는 나의 벗, 서도원 동지, 도예종 동지, 하재완 동지, 우홍선 동지, 송상진 동지, 이수병 동지, 김용원 동지, 여정남 동지…영원한 열사들이여! 우리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4월 9일! 경악하노라!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날부터 사형집행을 위한 수순을 밟더니 판결 18시간 만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다” 그는 “국가권력 앞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누가 살려낼 것인가,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무거운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먼저 간 동지들을 추모했다. 특히 전창일 씨는 옛 동지들과 함께 갇혔던 형무소 방들을 가리키면서 “나는 2층 10번방에 있었고 서도원 동지는 7번방에 있었다. 나는 이유도 모르고 4월 9일 전 뒤쪽 18번방으로 전방됐다”고 말했다. 당국이 사형집행소가 보이던 방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를 옮긴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전 씨는 “당국이 대법원 사형확정 전부터 사형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형을 확정하고 9일 새벽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 32년만에 용서 빈 사법부 ‘인혁당재건위사건’ 유가족과 피해자들을 외면하던 정부는 올해 1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진 이후 열린 이날 추모제에서 처음으로 법무부 장관 명의의 공식 추도사를 준비했다. 김성호 법무부 장관을 대신해 정진호 법무부 차관이 낭독한 추도사에서 “법무장관이 여러분과 함께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기회를 갖는 것이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정부 차원의 약속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국가도 과거의 잘못을 밝히고 사과함으로써 훼손된 국가권력의 도덕성과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다”면서 “다시 한번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을 추모하며 유가족 여러분들께 깊은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추도사를 듣고 있던 유가족들 속에서 얕은 한숨소리와 짧은 한탄이 터져 나왔다.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 여사는 “반분이라도 풀린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 “여기는 도저히 못 오겠어…” 추모제 막바지, 8명의 고인들이 사형을 당한 서대문형무소 안 사형집행소에서 헌화가 진행되자 유가족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집행소로 발검음을 옮기던 한 유가족은 “아 난 도저히…이 곳에 다시는…”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헌화를 마친 유가족들은 추모제 단상에 올라 32년 동안 자신들의 험난한 여정을 털어놨다.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 여사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밤을 지새울 것 같은데, 간단히 이야기하려고 하니 어느 자락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다”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그동안 빨갱이 자식으로 힘겹게 살아왔을 것이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사람들이 32년 전 죄가 벗겨져서 좋겠다고 인사하지만 그 옛날에 다 밝혀진 것인데, 인정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고 이수병씨 부인 이정숙 여사에게 이 곳 서울 현저동 1번지(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주소)는 쳐다보거나 지나치기도 힘겨운 자리였다. 그녀는 “남편이 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해 이 길을 정말 가기 싫었다”며 “이 근처에 살았는데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자리를 쳐다보기도 싫어 결국 이사했다”고 말했다. 고 도예종씨 부인 신동숙 여사는 “고통이 우리 남편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온 국민의 일이라 생각하고 이만큼이라도 이렇게까지 온 것은 이제 싹이 튼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 남편들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통일을 하고 독립국가를 이루려는 뜻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래서 저는 가족으로서 우리 민족이 통일되고 독립되는 그 날을 위해서 모든 분들이 다함께 힘을 합쳐서 전진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박스처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18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자행한 여러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손꼽힌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 선포 이후 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의 배후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해 1974년 4월 25일 도예종 등 23을 구속, 재판에 회부해 1975년 4월 8일 확정 판결하였다. 당시 이들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국가단체 조직(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인민혁명전략에 기초한 국가변란 획책(내란예비음모)’,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경북지도부 학원 책인 여정남이 수행한 민청학련의 조직과 지도(긴급조치 1,4호 위반)’의 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결국 이들 가운데 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8명은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확정 판결 후 불과 18시간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당한 이들 말고도 이태환·유진곤·전창일·이성재·김한덕·라경일·강창덕은 무기징역, 정만진·이재형·조만호·김종대는 징역 20년, 전재권, 황현승·이창복·임구호는 징역 15년 장석구·이현세는 징역 5년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사건이 벌어진 14년이 지난 뒤인 1989년에야 시작됐다. 대구와 서울 경희대에서 ‘인혁당열사 추모제’가 열렸고 열사들이 다녔던 학교와 묘소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그 후 98년 4월 9일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문정현)가 발족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2년 9월)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2005년 12월)가 각각 ‘인혁당·민청학련사건이 고문조작되었다’고 발표했으며 법원은 2006년 12월 재심을 결정했다. 결국 서울지방법원은 지난 2007년 1월 23일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명예회복과 과거청산을 이룩한 획기적 진전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냉전 수구세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된 이들이 오명을 벗는 데는 무려 32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오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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