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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 “장사할지 정치할지 연구할 것”

정치권, ‘이명박 대통령·강재섭 총리’ 시나리오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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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4호 박성훈⁄ 2008.07.07 18:09:58

온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킨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한나라당 대표직에는 박희태 의원이 선출됐고, 전임 당 대표인 강재섭 전 의원은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주인공이 말을 타고 말없이 떠나는 모습이 폼났다. 나도 이제 사라지려 한다”며 무대에서 사라졌다. 6월 27일에는 한나라당 경선과 정권교체 과정의 일화를 엮은 ‘한나라당 공저’의 <미래를 향한 시작>이라는 출판기념회에 강재섭 전 대표가 저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출판기념회는 사실상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구 지도부 퇴임식의 성격을 지닌 행사로서, 당 대표로서의 정치 행보에 종지부를 찍는 자리였다. 강재섭 당시 대표는 “제가 한나라당 대표로서 소임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동지들의 사랑과 격려 덕분이다.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몇 가지 전통을 세우게 된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강재섭 대표는 2년의 임기 동안 대선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당내 경쟁에 쓸려 분열 일로로 치닫는 위기 속에서도 경선을 순탄하게 마무리했다. 또한, 10년 간의 야당생활을 청산하고 새로 정권창출을 한데 이어, 87년 소선거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선 승리와 총선 승리를 연달아 달성했다. 그는 18대 총선의 공천 과정에서 다시 한나라당이 위기를 맞았을 때 공천을 반납하고 6선 의원이 될 꿈을 접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강재섭 전 대표는 7월 3일 이후로 완전한 자연인이 됐다. 그는 “평당원으로서 당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여러분 곁을 지키겠다”는 말로 자신의 정치발언을 갈음했다. 지난 20년의 의정생활에서 숱한 정치 굴곡을 겪으며 그는 권력의 변방을 돌아 마침내 그 중심에 우뚝 섰었다. ■‘환승’ 거듭한 강재섭, 당적은 ‘일편단심’ 강 전 대표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환승(換乘)의 드라마’와 ‘강재섭의 법칙’이 그것이다. 전자는 그가 따르던 정치선배가 총선과 대선 등 중요한 대목마다 바뀐 것을 빗대 부른 별칭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선택한 사람마다 정치 성공가도를 달렸기 때문에 생긴 수식어이다. 그는 박철언 → 김윤환 → 김영삼 → 이회창으로 정치적 흐름에 따라 다른 주군을 모셨다. 강 전 대표는 80년대 후반 5·6공 시절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박철언 전 의원은 검사 강재섭을 청와대 비서실에 발탁하고, 39세의 강재섭을 전국구에 당선되도록 도왔다. 강 전 대표는 박철언 전 의원이 이끄는 월계수회의 제2인자였다. 박 전 의원과 함께 북한에 밀사로도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박철언의 오른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14대 대선을 앞두고 박 전 의원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어 민자당을 탈당했지만, 그를 따라 나서지 않았다. 이후 YS는 강재섭을 민자당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 대구시지부장으로 중용하며 두고두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경북 지역엔 자민련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는 “당이 어렵다고 떠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민자당을 고수했고, 총선에서 살아남았다. 1997년 대선 후보 이회창은 YS의 탈당을 압박했다. 그해 11월 한나라당 대구 대회. 강재섭의 YS 탈당 촉구 연설이 당내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바꾼다. 단하에서는 당원들이 YS 인형을 두들겨 패는 사건이 벌어지고, 격분한 YS는 결국 탈당한다. 2000년 16대 총선 직전에도 TK 맹주로 불려온 고(故) 김윤환 전 의원이 공천 탈락에 반발, 탈당하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역시 그는 김 전 의원을 외면했다. 이처럼 강 전 대표가 여러 번 ‘환승’을 거듭하면서 탄탄대로의 정치역정을 만들어 온 결과가 공교롭게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여러 사람을 거쳐 왔다 하여 그를 기회주의자인 양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가 모시던 사람을 바꿔 왔을지언정, 그의 당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정치입문 이후 그가 속한 정당은 민정당에서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 흐름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홈런 대신 안타만 골라 때린 강재섭 그는 재선 때 이미 ‘TK의 황태자’였고 ‘차세대 기대주’였다. 3선 때는 ‘차세대 주자’ 반열에 오르내렸다. 1998년에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정치 지도자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회창·이수성·이인제·정몽준·김근태·김덕룡에 이어 7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자세를 낮췄다. 97년 대선후보 경선 때 대구·경북 지역에선 그가 나서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는 침묵했다. 98년엔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도전했다가 1주일 만에 ‘역부족’을 선언하며 뜻을 접고 말았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뚜렷한 목소리를 크게 낸 적도 없다. 그는 “당의 단합과 대선승리를 위해 꿈을 접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에게는 현상에 안주하고, 도전의식이 없으며, 강단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도약의 기회가 없었고, 대중적 지명도도 쌓지 못했다. 대신, 견제를 피하며 착실히 관록을 쌓았고, 늘 웬만한 위치는 차지했다. 그의 이런 선택을 두고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거나 ‘양지만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양지를 좇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에 햇볕이 나를 따라왔다”고 항변한다. 어쨌든, 그는 정치적 갈림길마다 ‘탁월한 선택’을 함으로써 차기 대권을 넘보는 정치 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강 전 대표의 원래 꿈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과거에 “TK 출신으로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대 이후 처음으로 내 힘으로 대통령이 돼 보이겠다”고 말하곤 했다는 말이 전한다. 어떤 면에서 강 전 대표는 엄연히 차기 대권주자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에 박관용 경선관리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강 대표도 원래는 이 자리에서 함께 경쟁해야 할 사람이다”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대권행보설·총리설 추측만 무성 임기를 마친 강 전 대표의 다음 착점은 어디일까? 강 전 대표가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를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강 전 대표는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 당시부터 ‘이명박 정권에서 총리’라는 추측에 시달렸으나, 본인은 이 같은 추측을 극구 부인해 왔다. 이랬던 강 전 대표가 총리직을 덥석 받는다면 스스로 ‘이명박 정권에서 총리’라는 시나리오를 입증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강 전 대표는 당장에는 총리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강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리설과 관련 “내가 할 타이밍이 아니다”라고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러나 강 전 대표가 정치를 끝낸 것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강 전 대표는 이미 분당 자택 근처에 개인 사무실을 냈다. 강 전 대표는 당 대표 퇴임 후의 거취에 대해 “한 6개월 간 장사를 할 건지, 다시 정치를 할 건지 연구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강 전 대표가 6개월 후에 본격적으로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정치활동에 나설 것으로 받아들여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또,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지만, 여전히 총리설은 계속해서 살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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