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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 오른 법원의 ‘영장기각’

불구속으로 풀려나 유사범죄 재범, 도주·잠적 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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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5호 박성훈⁄ 2008.09.23 18:10:35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영장실질심사제와 구속적부심사제 등의 제도를 운용해 형사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있다. 영장실질심사는 수사기관이 청구한 구속영장의 요건이 적법한지를 가리기 위해, 수사기관에 의해 체포된 피의자가 관할 법원에 신청하는 제도로, 1997년 형사소송법 개정 때 도입되었다. 구속적부심사제는 구속된 피의자에 대해 법원이 구속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심사하여 그 타당성이 없으면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이다. 모두가 무분별한 구속수사 관행을 막기 위한 장치들이다. 범법자를 구속 수사하려는 경찰과 검찰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권력의 부당한 권력남용으로부터 선의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법원에 있는 것이다. 또, 혐의가 가볍거나 증거자료가 불충분한 경우,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는 경우에는 법원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영장을 기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원의 영장기각으로 풀려난 범법자가 곧바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검찰·법원의 소환에 불응하거나 잠적하여 재수사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일들이 최근 잇달아 벌어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경찰 수사력의 손실은 물론, 인명과 재산의 피해까지 불러와 사법 당국에 대한 국민의 불신까지 초래하고 있다. ■ 풀려난 지 50분 만에 추가범죄 저지르기도 구속영장의 기각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대법원이 공개한 사법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당시 87.2%에 이르던 전국 지방법원의 구속영장 발부율은 2006년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기준 발표 이후 계속 줄어들어 2008년에는 77.4%까지 줄었다. 3년새 10%가 줄어든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을 들여다보자. 지난 8월,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된 20대 특수절도 피의자가 풀려난 후 흉악범죄를 저지르다 뒤늦게 구속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휴학 중이었던 유학생 21세 김모 씨와 22세 이모 씨는 자동차를 훔친 혐의로 지난 6월 2일 경찰에 붙잡혀 불구속 입건된 상태였다. 경찰은 김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서울남부지법 판사는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면서 영장을 기각했다. 불구속 기소로 풀려난 김 씨는 유흥비와 용돈을 마련하려고 악랄한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 한 빌라에 침입해 집주인과 고등학생 아들들을 흉기로 위협하고, 인터넷으로 은행에서 3200만 원을 인출했다. 뿐만 아니라, 반항하는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또, 다른 빌라에 침입해서는 여중생과 여고생 2명을 집주인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성추행하고 금품과 신용카드를 빼앗았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법원이 그해 6월, 서울 중구 필동의 한 교회에 침입해 신도의 가방을 뒤져 현금 7000원을 훔친 30대의 정모 씨에 대해 검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으나, 풀려난 지 50분 만에 다시 강도짓을 저지른 사건이다. 정 씨는 미성년자 강간 치상과 절도 2회 등에 대해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경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법원은 “금전 피해가 경미하고 피해액도 회복됐다”며 구속할 만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검찰의 영장신청을 묵살했다. 그러나, 정 씨는 풀려나자마자 한 가게에 들어가 주인을 때리고 물품을 빼앗아 다시 구속됐다. 아무데나 들어가 폭력을 행사해 돈을 강탈할 정도면 우발적인 살인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게 수사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불구속 조치를 받아 풀려난 형사 피의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며 날뛰는 현실에서, 국민의 안녕을 지키는 사법기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법원이 민생 치안에 구멍을 내는 데 힘을 보탠 꼴이 됐다.

■ 전직 판사, 죄지어도 구속수사 면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세금을 줄여주겠다며 의뢰인으로부터 5억 원을 받아 챙긴 혐의(변호사법 위반 및 특정경제사범 가중처벌법상 사기)를 받고 있는 한 변호사에 대해 지난 8월 말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의 영장기각 사유는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자 이 변호사가 법조계의 요직을 지낸 인사라는 이유로 법원의 판단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변호사는 서울중앙지법 민·형사 부장판사와 수도권 지원장을 지낸 ‘거물급’ 법조인이다. 전직 판사에 대한 영장기각으로 때아닌 ‘전관예우’ 비판까지 불러온 이 법원은 결국 영장 기각이 부메랑이 되어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불구속기소 상태에 있던 이 변호사가 휴대폰을 꺼놓고 잠적해버린 것이다. 첫 영장실질심사 기일에는 물론이고 이후 세 차례의 구인명령에도 불응했다. 법조계에서는 일반 시민이 법원의 구인명령을 거부했다면 ‘99% 구속감’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도주의 가능성이 없다”며 영장을 기각한 법원의 판단이 경찰 수사력의 손실을 가져올 뻔한 사건이었다. 법원 스스로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판단의 허점을 드러낸 모양새이다. ■ 법원의 구속영장 처리 기준 일반적으로 법원이 제시하는 영장 발부 기준은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지” 여부이다. 그러나 구속영장 발부에 피의자의 재범 가능성을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수사기관에서는 유사한 범죄경력이 많은 사람이 재범을 저질렀을 경우 바로 구속 처분해 추가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원은 개별 사건을 판단하는데 있어 재범 가능성 소명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입장이다. 단순한 범죄경력으로는 재범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이 2006년 1월 초에 공개한 구속영장 발부 기준에 따르면, 구속영장은 △실형 기준의 원칙 △형사정책적 고려의 원칙 △방어권 보장의 원칙 △비례의 원칙 △소년범(14세 이상 20세 미만 범죄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 등 5가지 원칙을 고려해 발부 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실형 기준의 원칙이란, 재판을 통해 실형 선고가 예상될 경우 구속하고, 집행유예나 벌금이 예상될 경우 불구속한다는 원칙이다. 형사정책적 고려란, 법원이 사회의 안전이나 개인의 권리 보호가 중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구속영장을 발부한다는 원칙이다. 방어권 보장은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 때 혐의를 강하게 부인할 경우 재판에서 피의자가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불구속한다는 원칙이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더 폭넓게 보장해주기 위한 원칙이다. 비례의 원칙도 방어권 보장과 관련된다. 이 같은 영장 처리 기준은 불구속 재판 확대와 방어권 보장이라는 두 가지 취지를 담고 있다. ■ 법원, 불구속 확대 방침 검찰, 범죄예방 역기능 우려 그러나 마약, 윤락행위, (음주) 뺑소니, 흉기 이용 폭력, 인터넷 이용 범죄 등 상대적으로 피해 정도가 큰 범죄와 새로운 수법의 범죄에 대해서도 법원이 영장 발부를 줄이겠다고 밝힌 데 대해 검찰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불구속이 지나치게 확대되면 범죄 억제나 예방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 등 수사기관에선 법 규정 자체에 큰 변동이 없는데도 구속영장을 무리하게 기각할 경우 범죄단속의 실효성이 저하되고 법 경시 풍조가 만연돼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특히, 성폭력 사건 중 청소년 성폭행·친족 성폭행, 조직폭력·가정폭력, 뇌물 등의 부패 관련 사건 등 흉악한 정도가 높거나 죄질이 나쁜 범죄와 식품위생·환경 관련 사건 등 빈도수가 높은 범죄에 대해서는 앞으로 불구속 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또, 일제단속 사건이나 대테러활동 및 국제행사 등의 원활한 준비를 위한 단속의 경우에도 상황별로 적절한 범위를 논의키로 했다. 법원의 불구속 수사 확대 방침에 대해 검찰은 마약·사기·흉기폭력 등의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에 대해 불구속을 확대한다면 공범자 검거에 어려움이 생기고 수사가 장기화하는 등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를 불식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법원의 불구속 확대 방침이다. 인권 보호를 위해(범법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구속영장 발부에 신중을 기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구속으로 막을 수 있었던 범죄의 수사에 투입되는 수사력 낭비 등 출혈도 심각하다. 추가범죄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인권침해는 방치한 채 피의자의 인권만을 존중할 수도 없는 일이다. ■ 과학적 영장발부 기준 세워야 19세기의 이탈리아 출신 범죄심리학자 롬 브로소는 인간의 능력과 성격이 유전으로 결정된다는 발상을 기반으로 “범법자는 타고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는 신체 골격만 봐도 범죄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턱이 크고 팔이 길면 ‘범죄자형’이라는 주장이다. 롬 브로소는 상이한 환경에서 자란 일란성 쌍생아가 범죄자로 전락해 같은 날 사형됐다는 보고서까지 내놓았다. 외모와 유전적 영향이 범죄자를 결정짓는다니, 비과학적이고 억지스러운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다음의 이야기는 좀 더 과학적인 방법일까? 미국의 학자 리노일라와 핀란드의 정신과 전문의 비르쿠넨은 1980년대에 혈관수축에 관여하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과 범죄의 상관관계를 파헤치는 연구를 한 결과, 흉악범들은 세로토닌 수치가 낮다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 연구진이 실험용 쥐의 체내 세로토닌 양을 낮춰 행동 변화를 관찰한 결과, 실험대상 쥐가 일반 쥐들을 마구 물어뜯어 죽이는 공격 성향을 나타냈다고 한다. 형사사건 피의자의 얼굴이 범죄형이어서, 범죄자의 피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체내 세르토닌 수치가 낮아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한다면 비웃거나 항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구속영장 발부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혐의자의 재범 가능성과 도주 우려 및 증거 인멸의 우려 등을 과학적으로 검증해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위의 방법이 더 그럴듯하다고 조소할지도 모를 일이다. 위중한 범죄를 저지른 전직 법관이나 검사에 대해 법원에서 인정하고 있지도 않는 ‘전관예우’를 부여해 불구속 기소의 특권을 부여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런 사건이 불거지니까 사법 불신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범죄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 여부 판단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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