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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바이올린 같은 감성

김영대(金榮大)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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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5호 편집팀⁄ 2008.12.02 14:03:33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대구시 미술대전 대상 이인성 미술상 청년작가상 수상 개인전 19회(서울,대구) 단체전 2008 대구 아트페어 (엑스코) 싱가포르 아트페어(갤러리 HAC) 아름다운 누드전(갤러리 G&G) 인천 아트페어(디오아트센타) 아트 대구 2008(엑스코) 송도 디오아트센터 기획 - INTERFACE - 펜타프리즘 골든아이 아트페어(코엑스) BIAF 부산국제 아트페어 한·중 현대 정예작가 대작전(서울 미술관) 박수근 미술관 4인기획초대전 - “심층에서 표면까지” 전 쁘라도 갤러리 기획 - 300호 초대전 NAAF 2008 아시아 아트 페스티벌(west japan convention center annex) DGB갤러리 기획 - 3인의 초대전 2007 MANIF 13.07 SEOUL (코엑스) 청작화랑 개관기념 - 사랑의 흐름전 2006 해외아트페어 참여작가전(청작화랑) 뉴욕 아트페어(뉴욕) 시드니 아트페어(시드니) siac 서울 열린미술제(청작화랑) 2005. 4 KIAF(송아당화랑) 2008. 6 화랑미술제참가 2008. 7 청담미술제(이목화랑) 2001 부산국제미술제(부산시립미술관) 영혼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전(공평아트센터) 차세대 시각-내일의 제안전(예술의 전당) 현대미술 조형작가전(서호갤러리) 새로운 전망전(모란미술관) 금호미술관 기획-오늘의 지역작가전 외 다수 그룹전

글·최형순 (미술평론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붕에는 무슨 표정이 있을까? 김영대는 수없이 많은 지붕들이 모여 있는 풍경을 그린다. 그렇게 모인 지붕들은 물론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화면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붉은색이든 푸른색이든 모두 그림의 톤에서 검붉게 또는 검푸르게 모여 있는 지붕들일 뿐이다. 김영대는 원래 표현성이 놀라운 작가였다. 그 동안 그가 보인 작품들의 화법은 화가의 기량을 보이기에 유감이 없는 것들이었다. 인체를 다루는 능숙한 선과 간단한 필치로 만들어내는 볼륨감은 아카데믹한 데생과 회화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현대적 감각에 있어서도 평면을 다루는 질감과 그 위에 배치한 얕은 깊이감을 다루는 데에서 어색함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의 표현이 새로운 대상을 찾아 또 다른 모색을 하면서 마음의 고향 같은 집들, 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차차 바뀌어갔다. 그리고 이제 이국적인 집들과 그 지붕으로만 가득한 풍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작품 속에 충분히 잠재되어 있으니 작가의 표현력을 이해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지붕이 모인 작품에서 그 동안의 김영대에 비추어 아쉬워하는 점은 풀어주어야 한다. 그의 장점이 십분 드러나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 지붕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리도 없다. 이쯤에서 버넷 뉴먼의 붉은 화면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바탕도 줄(zip)과 함께 보면 이야기가 생긴다. 화면에 간격이 생겨나게 되고, 그 줄을 위로 받치고 있거나 그 줄에 절단되는 화면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대의 지붕으로 덮인 풍경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를 것 없는 지붕들일지라도 그 사이의 틈새들이 모양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 여지는 충분해진다. 사실 바로크의 긴장감은 초점이 되는 지점에 있는 악센트에 의해서였다. 쓸데없이 여기저기서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 많아서 좋기보다 분산되지 않는 집중이 나은 때가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은 표현과 효과를 김영대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검은빛의 지붕들이 가득한 화면, 그 지붕 사이의 벽이 살짝 어우러져 있는 그림으로 나타난다. 그럴 뿐이지만, 그게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은 없다. 그것은 과하지 않은 효과적인 표현인 셈이다. 그림 속 공터에 집중되는 시선의 효과도 그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지붕 아래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할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부분 하나로 전체가 꽉 차 보이는 그림이 된다. 그걸 표현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집중해보며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힘 있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그림은 충분히 즐거울 만큼 예술적이기도 하다. 한 번에 가능한 것을 열 번 손대는 것은 능숙함이나 세련된 것과 거리가 멀다. 그의 그림은 튀는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흐트러질 만큼 설명이 과한 것도 아니다. 지붕으로 꽉 채우는 것, 그것도 다시 말하면 검게 비워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넓은 길이나 광장으로 텅 비게 하는 것에 있어서도 불필요하게 채우려는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자유로울 수 있다. 색의 리듬을 타기에도 부담 없고, 공간의 배치를 넘나들기에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도 없다. 이제 그것은 우리를 유혹할 만한 표현성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또한 그 그림은 이국적이면서도 묘한 친근함으로 소박한 정서를 담고 있다. 가끔씩 비좁은 공터 안에는 파라솔과 나무장식 벽이 유럽 어느 한 곳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같은 감수성이랄까. 지붕 위에 위태롭게 올라선 바이올리니스트 같은 러시아 유태인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을 듯이 이국적이며 한편으로는 애절함으로 친근한 그런 풍경이다.

그 공터로부터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그 풍경은 실제로는 없을 지붕을 작가가 더 가득 채워 그려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지고 든다면, 집들의 비례가 그럴 수도 없을 것이고, 작은 골목 하나라도 있다면 그렇게 지붕이 가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려하고 부유한 풍경이 아니라, 집을 함부로 늘려서 빼곡히 들어차게 된 가난한 마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동네 같은 풍경, 그것이 가난한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함으로 와 닿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난한 도시의 풍경을 <판잣집>을 통해 아련하게 새겨놓았던 박수근이 있었다면, 새로운 감각으로 소시민의 정서를 오늘의 김영대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박수근이 그 시대의 정서로 비록 질곡이었을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듯, 김영대의 풍경 역시 지금껏 미동 없던 우리의 깊은 정서를 유혹해내고 있는 듯하다. 가득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화면에 스며든 갖가지 묘사들, 작은 부분이지만 효과적으로 전체에 퍼져드는 악센트, 모두 비웠지만 풍성한 풍경으로 채워보게 하는 화면…. 그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바로크적 강조에 정통한 작가 김영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좀 더 새롭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그만의 독특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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