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제120호] / 등록일 : 2009.06.02 11:50:45

“엄마라고 부르지 마라”

일엽 스님의 미수(米壽) 아들이 그린 어머니의 초상

최계환 원로 방송인

지난 3월 25일부터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지하 화랑에서 일당 김태신(日堂/金泰伸) 화백의 미수(米壽)전이 열렸다. 수백 점에 달하는 그림도 그림이거니와, 주인공인 일당 김태신 화백은 20세기 말의 세기적 사랑의 상징적 주인공이란 점에서 나는 눈물 속에서 그림을 관람하였다.

일당이 살아온 88년 생애 그것은 바로 한·일 간의 역사적 사랑의 갈피 속에서 파란만장한 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람회장의 가장 중심에 조신하면서도 영특하고 예쁜 여자 스님의 그림이 있었다. 그분이 바로 김일엽(金一葉) 스님이다. 한국 사람이면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일엽 스님! 이분이 바로 이 미수전의 주인공인 일당 김태신 화백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스님이 되신 어머니의 그림을 그린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약 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한국의 지성 김일엽은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도쿄에 가는 도중 당시 도쿄대학 법학부에 다니고 있던 일본인 오타세이조(太田淸藏)를 만난다. 이때 이미 시인이었으며 문학여성이었던 김일엽의 지성 넘치는 아름다움, 품위 있는 자세를 대한 오타세이조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한편, 일엽은 세이조의 성실한 모습 그리고 순진한 마음에 끌려,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의 굴레에 싸인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하여 세이조의 부모를 찾아간다.

그런데 오타 집안은 일본에서도 역사적으로 굴지의 양반 집안이었다. 14대 할아버지가 ‘오타도깡(太田道灌)’이란 분으로, 약 600년 전에 오늘의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궁성을 구축한(지은) 대단한 무장(武將)이었던 것이다. 세이조는 그의 14대 적손(嫡孫)이고, 세이조의 아버지는 당시 은행 총재, 생명보험회사의 회장 등 큰 재벌이었다.

따라서 세이조의 아버지는 “전통 있는 오타 집안에 조선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다니 절대 허락 못 한다”고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이조는 ‘오타 가를 이을 것인가’, ‘조선 여성을 택할 것인가’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이조(淸藏)는 끝내 일엽을 택하여 두 사람은 사랑을 관철할 것을 고하고 집을 나오고 만다. 그 후 두 사람은 결혼하여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 태신(泰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이조의 집에서는 일엽에게 세이조와 헤어지게 하기 위하여 회유책이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런 사이 일엽은 ‘나 하나 양보하면 남편인 세이조와 아들 태신은 오타 가(太田家)에 돌아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세이조와 아들 태신은 행복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이조의 친구인 신도(進藤) 부부에게 태신을 맡기고, 남편인 세이조에게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는, 몸이 찢기는 아픔과 눈물 속에 외로이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일엽이 써 놓고 간 편지를 본 세이조는 일엽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하였으며, 태신이 세 살이 됐을 때 친구 집에서 아들을 찾아 데리고 일엽을 찾아 한국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아들 태신을 역시 친구 집에 맡겨 양육을 부탁하고, 세이조 자신은 당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일본과 조선의 우호·이해·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그런 중에 일엽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승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하였다.

세이조는 일엽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아들과 셋이서 다시 시작하자고 일엽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엽은 나의 생명을 구해준 부처님을 배반할 수가 없다면서 돌아갈 것을 거절하였다. 일엽의 굳은 결의를 알고 세조 자신도 일엽에게 맹세한 사랑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 후 독신으로 지낼 결심을 했던 것이다.


태신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린 그림이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세이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태신을 당시 국보적인 화가 이당 김은호(以堂/金殷鎬) 화백에게 사사시켜 그림 공부를 하게 하였다.

태신이 이당에게 그림 공부를 하러 갔을 때 김은호 화백은 태신을 낳아준 엄마 얘기를 하게 된다. 자기를 낳아준 엄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안 태신은 그날부터 친엄마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태신은 출가한 친엄마 일엽이 있다는 절을 찾아간다. 엄마가 있는 절 수덕사(修德寺)는 역에서도 50리 길이나 되어 돌가닥 다리의 덕숭산(德崇山) 산길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늘같은 엄마가 보고 싶어 점심도 굶은 채 발에서 피가 나도 모르고 산을 올라갔다.

이미 시간은 밤이었다. 아무도 안 보이는 캄캄한 절간, 지나가는 여승에게 일엽 스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드디어 나타난 일엽 스님에게 태신은 “엄마!” 하고 매달렸다. 일엽 스님은 크게 자란 아들의 졸지 방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먹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 태신의 머리·볼·귀·어깨·등을 떨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껴안아주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일엽 스님은 (아니, 태신의 엄마는)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태신에게 “앞으로 너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라” 하면서 만공(漫空) 스님에게 데리고 가서 태신의 식사와 숙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정을 들은 만공 스님은 일엽 스님에게 “태신은 라후라다”라고 말한다. 라후라(羅喉羅)란 석가모니가 출가 전에 낳았던 아가의 이름이다.

일엽 스님은 태신을 떠나보내고 나서 ‘내 아들에게 엄마라 부르지 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깊은 죄, 속세를 떠났으나 자식에 대한 피어린 사랑에 젖어 부처님 앞에 필사적으로 ‘나무관세음보살’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이조는 그 후에 태신을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시켰고, 미국에서도 최근까지 뉴욕 화단에서 활약한 바 있다.

이제 세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인 일당 김태신 그는 미수(米壽)이지만 어머니인 일엽 스님을 닮아 차분하고 야무지고 예쁜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이나 그의 그림 속에는 대우주와 같이 영원하고 무한한 큰 사랑의 빛이 스며 있음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더욱 건승하시기를 축원한다.


‘엄마라 부르지 마라’… 이 큰 사랑의 상징적인 말(제목)은 머지않아 한일 합작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세이조의 친척인 일본의 오타다카시(太田多賀史) 씨가 영화제작위원회 일본 측 대표로 준비 중에 있음을 알고 있다. 역사적·세기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한편, 태신 씨의 원래 일본 이름은 오타(太田雪村)였는데, 작년에 안동 김 씨(安東金氏)에다 이름은 태신, 국적은 한국으로 바꾼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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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CNB저널 제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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