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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이라는 말, 맞는 용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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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48-149 최영태⁄ 2009.12.14 16:08:52

요즘 자주 듣는 단어가 ‘서민’입니다. 청와대의 중도·친서민 정책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뭔가 불편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뭐라고 번역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working classes(노동계급)’ 또는 ‘poor people(가난한 사람)’이라는 말만 생각날 뿐, ‘가난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특권도 없는’이라는 한국적 의미를 갖는 영어 단어는 당최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서민’은 ordinary people(보통 사람), the commons(서민), common people(서민), the masses(대중), working classes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답니다. 이렇게 사전을 찾고 보니 이 용어가 불편한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한마디로 ‘서민’에 해당하는 말은 현대 영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영어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순수한 경제적 의미로는 working classes, poor people 정도를 씁니다. 그야말로 객관적 기준을 바탕으로 경제적 상태를 의미하는 말일 뿐, 비하의 의미(‘사회적 힘도 없는’이라는 의미에서)는 없는 말들입니다. ‘서민’이란 말을 한국에서 너나 없이 쓰는 것을 보면서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하 의미가 들어가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하어는 비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자조적 의미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비하당하는 사람에 대해 비하어를 사용하면 큰일 나는 게 정상입니다. 예컨대, 미국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니거(Nigger)”라는 말이 있죠. 흑인들은 이 말을 노래 가사에도 쓰고, 자기들끼리는 농담 섞어 쓰지만, 백인이나 황인종이 이 말을 흑인 듣는 데서 했다가 들키면 목숨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흑인에 대한 공식 용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이라는 어렵고 긴 말이거나, N-word(N자가 들어간 말)라고 조심스레 표현하죠. 언제가 한 번은 미국의 흑인 고교생들이 교문에서 “비하어 ‘니거’를 우리끼리도 쓰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을 미국 신문이 게재했는데, ‘N 워드’가 신문 지면에 그대로 나오면 큰일 나므로, 차가 지나가면서 ‘N’자만 보이고 ‘igger’ 부분은 가린 사진을 게재했더라구요. 비하어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서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서민이 스스로 신세를 한탄하거나 아니면 지원해 달라는 의미에서 “우리 같은 서민…”이라고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지배층이 “너희 같은 서민들…”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법 아닌가요? 서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과거 군사정권 시절 쓰였던 ‘위민(爲民)’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글자 그대로 ‘민을 위한다’는 뜻이죠. 군사정권은 “백성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민실(爲民室)을 각 행정기관에 대대적으로 설치했지만, ‘위민’이란 옛날에 귀족이 백성을 내려다보면서 쓴 말이었고, 당시 행정기관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기에(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그 많던 위민실들은 흐지부지 없어지고 맙니다. 양반·상놈이 있는 세상에서나 쓸 만한 서민이라는 말을 21세기 한국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합니다. 우리가 지금 21세기에 사는 건지 아니면 봉건 사회에 사는 건지 헷갈립니다. 지난 11월 24일자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괄시당하는 피지배 계급’이란 의미를 갖는 서민이란 단어는 “계급적 피해의식을 함의”하니 “이 대통령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치인·지배층은 속으론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는 “너희 서민”이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자꾸 서민을 말할수록 거리감만 더 생기고, “서민”이란 비하어를 듣는 서민들은, 지금은 뭔가 경제적 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참으면서 듣고 있지만, 만약 경제적 알맹이는 없고 비하만 계속되는 차원이라면 “너희 서민”이란 말에 정말 기분이 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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