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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카리스마 여배우 오늘은 욕쟁이 아줌마

[인터뷰]연극 <오아시스세탁소>에서 코믹 변신에 성공한 서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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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58호 이우인⁄ 2010.02.22 16:24:43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뒤편에 위치한 오아시스극장에서는 연극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이 노란 간판을 번쩍이며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연극은 30년 역사를 가진 ‘오아시스세탁소’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따뜻하고 코믹한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다. 세탁장이로서 소박한 일상을 꿈꾸는 주인공 강태국이 돈 때문에 돌변한 사람들을 깨끗하게 세탁함으로써 돈이 먼저인 메마른 세상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을 한가득 가슴속에 담을 수 있는 연극으로 지금까지 2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에는 값진 선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연극계의 진주 서주희(43)의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버자이너 모놀로그> <레이디 맥베스> <바케레타> <산불>처럼 묵직한 작품에서 신들린 연기로 관객에게 희열을 안겨준 그녀가 이번엔 관객을 웃기는 데 온힘을 쏟고 있다. 서주희는 세탁장이 강태국의 아내이자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 장민숙으로 열연한다. 민숙의 소원은 세탁소를 팔아치우고 처녀 때처럼 의상실에서 예쁜 옷을 만들면서 ‘뽀대나게’ 사는 일. 그러나 현실은 세탁소 구석에서 손님이 맡긴 찢어진 옷을 기우면서 쏟아내는 신세 한탄이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레이디 맥베스>의 고귀한 여인 서주희는 온데간데없다. 축 늘어진 어깨, 펑퍼짐한 엉덩이, 찌그러진 표정, 질질 끄는 고무 슬리퍼,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욕설 등 서주희는 세상에 찌든 세탁소 아줌마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저는 장민숙을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무처럼 세상 이야기에 ‘까라랑’ 흔들리고 반응하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 그늘이 돼주고 마지막엔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내주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민숙은 자식하고 남편을 위해서라면 말라 죽더라도 뿌리째라도 뽑아줄 거예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주희는 장민숙에게 깊은 동정을 보였다. 세상일에 귀를 열고 있지만 자식과 남편을 위해 그 귀를 억지로 닫는 사람이 장민숙이란다. 민숙의 답답함과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서주희는 평소 싫어하던 욕까지 입에 달았다. “(민숙의 연기는) 기존에 해온 화술에 입각해서 하는 대사가 아니어서 힘들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나오는 엄마들의 혼잣말을 익히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연극 안에 사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 게 목표인데요, 지금은 제 생활을 장민숙화(化)시키는 게 목표랍니다. 몸 상태나 표정의 이완 따위를 아줌마처럼 너덜너덜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제 연기 괜찮았나요?” 자신의 연기에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서주희는 인터뷰 내내 ‘내 연기 어땠어요?’ ‘연극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어요’라고 계속 물어왔다. 어떤 대답이라도 듣겠다는 자세가 확고한 배우다. 거짓으로 예의상 하는 말은 그녀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감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연극배우 서주희를 탐구해본다. -작품 선정에 까다롭기로 유명한데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요?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은 3년 전에 정말 감명 깊게 본 연극이에요. 연극 출연은 제가 먼저 러브콜을 한 거고요. 연기하게 돼서 너무나도 좋아요.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더라고요. 강태국의 독백을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그는 연극배우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어요. 처음에 제가 연극배우가 됐을 때는, 아무도 몰라줘도 내가 바라는 절대적인 존재만 알아준다면 순수한 마음과 가치관을 끝까지 지켜 나가겠다, 그것이 옳은 배우의 길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 마음을 점점 잃어가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연극을 하면서 되새기게 됐어요. 강태국에게 절대적인 존재는 바로 세탁장이로 살다 간 부친이죠. 솔직히 이 연극에 출연한 이유는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공연을 하면서 서주희가 잘난 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 작품을 통해 치유되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저니까요.” -무대가 지나치게 관객과 밀착돼 있는데, 애로사항은 없나요? “객석과 무대가 막이 없는 상태를 염두에 두고 연기 패턴을 잡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힘들진 않아요. 있어도 모른 척하는 거라면 신경 쓰일 수 있지만, 공연 시작부터 ‘여러분~, 이 상황을 한 번 생각해줘 봐~’라고 말한 뒤 직접 관객과 소통하니까 오히려 관객이 없으면 힘들죠.”

-모처럼 코믹 연기에 도전했는데, 묵직한 연기와 가벼운 연기 어느 쪽이 더 쉽습니까? “쉽다는 건 ‘익숙하다, 안 익숙하다’의 차이인 것 같아요. 사람은 많이 해본 것에 익숙하고, 익숙한 일이 더 쉽죠. 저 역시 심각하고 진지한 연기를 더 많이 해서 묵직한 연기가 더 쉽기도 해요. 하지만 궁극적으론 가벼운 연기나 무거운 연기 어느 쪽도 쉽진 않아요.” -막이 오르기 5~7시간 전부터 음식을 먹지 않는 배우로 유명한데요. 이런 소규모의 무대도 마찬가진가요? “그럼요. 지금도 그러는 걸요. 배고프지 않냐고요? 그런데 무대 위에서의 에너지는 음식 섭취와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무대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거든요. 때문에 무대 위 서주희에겐 음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에너지가 들어와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으면서도 막이 오르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물론 무대에서 저의 모든 것을 쓰고 나면 배가 금세 고파지지만요(웃음).” -지금까지 몇 작품에 출연했나요? “열 작품 조금 넘는 것 같아요. 저는 연기한 햇수에 비해 작품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더러 작품을 고르는 데에 까다로운 배우라고 하는 것 같아요. 3년 아니 5년에 한 작품을 한 적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론 많은 작품에 출연할 생각입니다.” -배우 조재현 씨의 제안으로 연극을 시작했는데, 연극배우로서 주희 씨 입장에서 볼 때 조재현 씨가 은인인가요? “은인이죠. 제게 연극을 제안하고 연극을 잘할 것 같다고 북돋아주고 기회를 준 분이니까요. 재현 씨가 아니었으면 연극배우가 안 됐을지도 몰라요.” -대한민국에서 연극배우로 사는 일은 어떤가요? “며칠 전에 <여배우들>이란 영화를 봤어요. 그중 ‘여배우들의 삶은 어렵다’는 윤여정 선생님의 대사가 가슴에 들어오더군요. 특히 연극배우는 보상 문제도 힘들어서 더욱 쉽지 않고요. 어떨 때는 연극배우를 할 수 있어 굉장히 감사하고 행복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요.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일이 저의 가장 큰 목표여서 배역에 몰입하지만, 그 몰입이 서주희의 삶에는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왜냐면 배우는 무대에서뿐 아니라 삶을 배역화 시켜야 되거든요. 6월에 싱가포르에서 초청 공연되는 <레이디 맥베스>를 생각하면 다시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배우로서는 기쁘고 행복하지만, 몸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벌써부터 진저리가 쳐져요.” -연극배우로서 가장 뿌듯한 때는 언제인가요? “공연 한 편이 그 사람의 삶이나 가치관에 영향력을 미치거나, 힘든 마음이 위로되고 치유됐을 때죠.” -연기에 대한 관객의 비판에 상처를 받는 편인가요? “제 자랑이지만, 제 연기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더라고요(웃음). 저는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완벽주의자예요. 연기할 땐 제 삶을 통째로 쏟아 붓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비판)가 없어서 제 연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까지만 시도했기 때문에 완벽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주희 씨는 슬럼프가 없는 배우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제게도 커다란 슬럼프가 몇 번 있었죠. 삶의 끈을 놓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요. 우울의 극치에서는 내가 너무 내 삶을 연극에 바친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거예요. 그런데 연극을 막상 포기하고 나니, 제 삶이 통째로 없어지더군요. 그야말로 아주 바닥이 되고 말았어요(웃음).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이에요. 나라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은 친구들과 하나님의 역할이 제일 컸어요.” -20년 연기 인생을 자평한다면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관객에게 주려 했던 배우라고 생각해요. 준비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내 관객과 소통하려 한 배우 말이죠.”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요. 과거를 생각해보면 저는 여자의 삶보다 배우의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20대 때에는 30대의 연기를 해보는 일이 소망이었죠. 뼛속까지 배우의 삶을 꿈꾸고 살아가고 싶어요. 지금 너무나도 하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요. 그 작품은 50대 중반이 지나서 하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좋은 공연이 될 거라고 기대해요. 어떤 공연이냐고요? 지금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한 10년 지난 뒤에 보시면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끝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연극은 소외되기 쉬운 장르예요. 홍보 마케팅도 어렵고요.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연명해 나가기 쉽지 않죠. 그것을 업으로 여기고 사는 배우들은 정말 외로워요. 그래서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이 절실하답니다. 눈물이 핑 돌 정도에요.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처럼 미래를 꿈꾸는 작은 곳에도 부디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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