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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의 조각극(彫刻劇) - 시지프스의 후예들

한국적 조각의 전통을 찾는 몸짓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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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2호 편집팀⁄ 2010.03.22 16:04:37

이돈수 (미술사학자) ‘김병철의 조각극’은 그의 일곱 번째 개인전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조각극(彫刻劇)’이란 전시 이름은 전시된 작품들이 연극 속의 배우처럼 각각의 배역을 담당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조각 장르의 개척을 의미한다. 전시된 조각은 조각가 자신, 가족, 이웃,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고 공유하는 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의 재발견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천박한 자본주의, 그것에 편향되고 왜곡된 사회적 욕망과 환상을 발가벗겨진 조각을 통해 표현한다. 이 발가벗겨진 조각은 그의 얼굴을 닮았고 또한 우리의 얼굴을 닮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우리의 삶과 현실을 대변함으로써 그의 조각은 살아 있다.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 만든 인형, 문석인과 무석인, 장승, 허수아비와 꼭두각시 같은 한국의 우인물(偶人物)처럼 그의 조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마치 벌거벗은 홍동지 꼭두각시 인형처럼 작가 김병철은 그의 우인물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쓴소리를 하며 우리네 삶의 모습, 깨달음과 희망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우인물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의 작품은 지극히 세속적이면서 성스러운, 일상적이면서 주술적인, 원시적이면서 현대적인,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면모를 가진다. 어쩌면 이처럼 대립하는 세계의 경계에 존재하는 그의 작품은 외형적 모습이 어색할 수도 있다. 인간도 아니며 신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거리가 있는, 원시인 같으면서도 아주 현대적인 고민을 안고 사는 인간 같은 그의 조각은, 시각적으론 익숙하지 못하고 편치 못할 수도 있다. 시각적인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어쩌면 우리는 한국적인 것보다 이국적인 것에 더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미술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보다 마릴린 먼로 같은 외국 국적의 모습에 더 익숙하다. 현재 우리의 눈에 다소 거북하게 비칠 수 있는 작품 속 과장된 성기의 노출은 과거에는 홍동지처럼 자연스러운 이미지였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더 부자연스러워하는 듯하다. 우리의 전통가옥보다는 아파트가 더 편리하고 익숙하듯이 우리의 미술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런 시대에 김병철은 우리 문화 속에서 조각적 전통이 무엇인지를 갈망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전통에 다가서고 있다. 그의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한편 갤러리통큰에서 3월 17일부터 30일까지 김병철의 일곱 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시지프스의 후예들’ 또 한 번 더, 김병철 조각극의 막이 올랐다 <시지프스의 후예들> 쓸모없고 희망도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그리고 그 후예들에 대한 이야기…. 이제 일곱 번째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올려놓고 다시 굴러 떨어져 마모되어 작아진 바위를 바라보는 조각가의 모습을,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열정과 고뇌에 찬 부조리한 영웅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운명이다. 힘겹게 올리고 허무하게 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는 삶은, 조각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이다. 그 운명을 직시하는 우리는 주인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운명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변화되지 않을 세상을 향해 품고 있는 우리의 희망은 사치다. 그러나 부조리와 희망을 직시할 때 우리는 살아 있다. 김병철의 조각은 살아온 동안의 기록이며 부조리 속에서 보아온 희망의 이야기, 굴러 떨어져 버린 차가운 바위에서 용솟음치는 생명의 이야기를 형상화해 놓았다. 우리 또한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조각을 발견하고 삶에 대한 열정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음을 감사하며 함께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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