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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과 한판 승부> 스무 번째 이야기

인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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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73-174호 편집팀⁄ 2010.06.14 15:47:18

글·김윤식 인류의 미래를 얘기하는 눌촌 거사의 표정은 자못 엄숙하고 진지해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강설에 숙연함마저 느껴지자, 일행도 덩달아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가 있듯이, 우리 인류의 자유의지와 창조력은 향후 100년이 지나는 동안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낼 겁니다. 상징적 사건을 생각해본다면, 인간이 결혼이 아닌 자신의 체세포 복제로 종족 번식을 하거나, 때로는 이렇게 태어난 자기 분신을 성장시킨 후 자신의 뇌 정보를 교환 이전시킴으로써 영생을 도모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머리 이식, 예를 들면 노령자의 머리를 젊은 사람 몸에 이식하는 기술이 보편화되며, 자의식과 절제력 그리고 창조력을 구비한 로봇이 만들어져 인간과 감정을 교환하고 섹스를 나누는 가운데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외모를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맞춤형으로 성형하고, 태풍이나 강우 등 자연현상을 통제 조정하고, 인위적 변이에 의한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고, 화학적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인공 식량을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주만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끊임없이 지속되어, 그동안 신의 영역으로 치부되거나 미몽에 빠져 있던 수많은 수수께끼가 밝혀지면서, 기존 종교의 철학·교리 그리고 신뢰 기반을 앗아가게 될 겁니다. 이렇게 하여 기존의 자연 섭리와 우주 질서 그리고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신의 영역이 송두리째 파괴되면서,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어떤 권위 있는 종교계나 막강한 국가권력이 나선다 해도 결코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폭풍으로서, 애초에 창조주가 부여한 자유의지와 창조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로가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잠시, 우화 속의 세 아들이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세 아들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동업을 하는데, 의견 충돌이 생겨 심하게 싸우다가 급기야 서로 죽이기까지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겠지요. 또 어떤 아들은 독립생활 20년이 되는 해에 모처럼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가, 음주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과 정면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가족 모두가 즉사하는 불운을 당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자마자 결혼하여 아무 탈 없이 살면서 5남매를 낳고, 그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여 손자와 손녀가 생겨, 50년 후 만남에서는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러한 세 아들의 인생 시나리오에 견주어 우리 인류의 미래도 예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화에 나오는 세 아들은 우리 인류가 인종·종족·종교·국가 등으로 나뉘어 각기 나름의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끊임없는 싸움, 특정 종교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등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급기야 핵전쟁이 일어나 어쩌면 몇십 년 내에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온난화가 가속되어 인간 생태환경이 급격히 파괴되고, 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가공할 전염병을 퍼뜨리고, 환경오염에 따른 돌발적 유전인자 변이가 일어나 불치 유행병이 생기면서, 100년도 못 가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 절제력, 이타주의에 따른 상생의지,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등을 발휘하여 200년이 지나서도 얼마든지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위대한 창조력이 자연의 섭리와 우주 질서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내, 생명체 연못으로서의 지구 수명을 200년에서 몇 천 년 내지 몇 만 년까지 연장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봅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의 미래는 전적으로 인류 스스로에게 달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각종 이해관계 그룹 간의 첨예한 갈등과 다툼,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과학기술 개발, 특정 세력이 패권을 누리고자 하는 탐욕 등이 인류를 망하게 하는 악마이지요. 때문에 전 인류가 한결같은 책임감을 갖고 서둘러 그 악마를 퇴치할 지혜와 수단을 찾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인류의 무지를 깨우치고, 다툼을 중재하고, 파멸을 방지하는 지혜를 찾아내, 우리 인류를 지키는 수호천사 내지 선각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수호천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소승도 혹시나 그 선각자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이 아미산 깊은 산중을 헤매고 있는 거라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이 끝이 있다” 담대함이 넘치고 천 근 바위 같은 위엄을 갖춘 눌촌이건만, 어느새 그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또다시 석양의 낭떠러지는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석상처럼 앉아 백중 보름달만 올려다보았다. “눌촌 거사님, 그렇다면 결국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영원한 존재도 없다는 말씀인지요?” 몸과 마음을 옥죄어오는 고요와 긴장을 견디기가 힘들었던지 왕문후가 다시 담론의 문을 노크하였다. “글쎄올시다. 여하튼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라고 봅니다. 즉, 어떤 존재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원초적으로 ‘시작이라는 사건’ 없이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간 모두에게 시작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요.” “하지만 거사님, 불교에는 생명 탄생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윤회’라는 것이 있고요, 기독교에서는 ‘영혼불멸의 내세’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을 들으니, 문득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주장한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이 떠오르는군요. 이는 ‘똑같은 생이 그대로의 형태로 영원에 돌아가는 것이 삶의 실상이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사상에서 공감이 가는 대목은 이런 겁니다. 즉, ‘현재의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 땅의 현실적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간다는 논리입니다. 그렇듯이,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적어도 인간이 인지하고 누릴 수 있는 ‘영원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한평생은 곧 빛으로 치환되어 그 적나라한 실상이 우주로 퍼져 나가고 있지요. 그 빛의 영상은 언젠가는 우리 우주를 벗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끝없는 항해를 계속할 겁니다. 우리가 머나먼 별에서 오는 빛을 지구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우리 삶의 모습을 담은 빛의 영상은 어떤 타임머신 장치로 상영되어, 우주 밖에 존재하는 신이 있다면 언제라도 구경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이 땅에서 한평생 살아가는 삶 자체에서 ‘인생의 목적, 나의 존재의미,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고, 그것이 곧 인간의 영원성을 담보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다음과 같은 한시를 음미하면서, 지구의 멸망과 인류의 종말 그리고 우리 인생의 끝을 ‘영원회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찾았으면 합니다. 인심(人心)은 다종동처실진(多從動處失眞)이라. 약일념불생(若一念不生)하여 징연정좌(澄然靜坐)하면, 운흥이유연공서(雲興而悠然共逝)하고, 우적이랭연구청(雨滴而冷然俱淸)하며, 조제이흔연유회(鳥啼而欣然有會)하고, 화락이소연자득(花落而瀟然自得)하니, 하지비진경(何地非眞境)이며 하물비진기(何物非眞機)리오? 사람의 마음은 종종 흔들림으로써 진심을 잃나니. 혹여 무심한 마음으로 맑고 고요하게 앉았노라면, 구름이 일어남에 유연히 함께 가고, 빗방울 떨어짐에 냉연히 함께 맑아지며, 새가 지저귐에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꽃이 짐에 스스로 깨달을 것이니, 어디인들 참다운 경치가 없겠으며, 무엇엔들 참다운 기운이 스며 있지 않겠는가.” 석양의 낭떠러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백중 보름달도 어느덧 중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담론에 빠져들었던 열 예닐곱 명 일행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이승과 작별하려고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사람들이기에, 이제 와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행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갈등과 번민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이를 일거에 해결해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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