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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⑦ 연산군 묘역

수많은 궁녀 누린 연산군이 죽기 전 마지막 보고파한 여인은?
‘눈물이 갓끈을 적시네’ 시심 어린 연산군 묘역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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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6-197호 편집팀⁄ 2010.11.24 09:32:55

이한성 동국대 교수 우리 역사에 가장 폭군이며 패륜아로 기록된 연산군(燕山君) 묘를 찾아 간다. 사람들의 선입견으로는 폭군의 묘역이라면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되어 좀처럼 찾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답사는 빛과 그림자, 응달과 양달, 이긴 자와 진 자를 아울러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연산군이라면 우리 머릿속에 좀처럼 좋은 일을 떠올리려 해도 떠 올릴 수가 없다. 우리가 듣고 배운 것은 모두 부정적인 것뿐이었으니까. 연산군 묘(정의 공주 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연산군 묘 표지판이 붙어 있기에 길을 찾아 평범한 주택가 길로 들어선다. 연산군 묘는 골목 안쪽 100여m 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제법 묘역도 정비되고 안내소도 있다. 연전(年前)만 해도 연산군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힘들었고, 관리가 안 돼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 앞에는 아주 큰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로 서울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830살의 은행나무라 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이 나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난다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도 불이 났다고 한다. 이렇듯 영험한 나무로 알려지다 보니 과거에는 여기서 굿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묘역에는 다섯 분의 묘가 있다. 맨 윗줄에 입구 쪽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연산군, 오른쪽에 부인 거창 신(愼)씨, 그 다음 줄에는 의정궁주 조씨(義正宮主 趙氏), 제일 앞 줄 왼쪽에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具文暻), 오른쪽에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구문경의 처)가 잠들어 있다. 감수성 예민했던 연산군, 애끓는 수백편 시 남겼지만, 남아 있는 것은 고작 100여편. 어린 왕자 넷 잃고 읊은 시에는 애틋함 가득 본래 이 땅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패지(賜牌地, 하사 받은 땅)였다. 의정궁주 조씨는 태종이 만년에 홀로 외롭게 지내자 아들 세종이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를 보살필 후궁으로 모셨지만 입궁한 지 오래지 않아 태종이 승하하니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단종 2년에 그녀가 돌아가자 이곳에 장사지냈다. 그래서 이 묘역의 본래 주인은 의정궁주 조씨다. 단종 2년에 어린 서모 조씨가 자손도 없이 돌아가자 선대 세종의 뜻을 받든 임영대군은 이곳에 장사지내고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모심) 하였다. 궁주(宮主)란 고려, 조선 초 후궁에 대한 칭호다. 궁주, 옹주로 불리던 칭호를 세종 때 빈, 귀인으로 바꾸었다. 연산군은 재위 12년인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 연희궁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두 달 뒤 11월 8일에 죽으니 두 달 전까지 멀쩡하게 잘 놀던 31세 청년의 죽음 치고는 자못 의아하다. 실록에는 그 죽음을 ‘역질로 인해 죽었다(因疫疾而死)’라 했는데 11월에 역질로 죽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연산군은 자식 복이 없어 많은 자녀가 어려서 죽었다. 몇 명 남아 있던 대군(大君)과 군(君)은 반정이 일어난 그 달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 그 애들의 나이가 10살 안팎 어린 것들이었는데…. 묘역에서 나누어 주는 연산군 묘 관람 자료에는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연산군의 시(詩)가 실려 있다.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은 타고난 감수성이 좋아 수백편의 시를 남겼는데 반정 후 모두 없어지고 실록에 100여 편만 남아 있다 한다. 폭군으로만 알려진 연산군의 숨은 얼굴이다. 한편 연산군은 죽은 뒤 유배지에 쓸쓸히 묻혔는데 7년 뒤에 그 부인 거창 신씨가 중종에게 탄원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이니 외할아버지의 땅에 비록 폐주이지만 남편을 이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방탕하던 연산군은 죽을 때 한 마디를 남긴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죽음에 임해 다른 말은 없고, 단지 신(愼)씨가 보고 싶다(欲見愼氏)’였다는 것이다. 흥청(興靑: 궁중에 들여 온 기생)들과 신나게 놀다 이렇게 쓸쓸히 죽으니 망청(亡靑)이 되고, 결국 흥청망청인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미망인으로 지내던 큰 어머니를 겁탈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소설, 연속극에서도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겁탈하자 큰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하는 패륜과 정절(貞節)의 극치를 보여 준다. 연산군의 기록인 ‘연산군 일기’는 중종4년에 편찬되었으니 반정세력들이 4년을 주물럭거린 뒤에 나온 결과다. 연산군이 쫓겨나기 50일 전인 연산군 12년(1506년) 7월 20일 기록을 보면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 태기가 있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月山大君?妻 昇平府夫人朴氏卒 人言; 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는 부분이 있다. 절세미인 궁녀 누리던 31세 연산군이 52살 큰어머니를 임신시켜 왕에서 쫓겨났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는데, 믿을 만한 얘기일까? 이 글을 보면 석연치가 않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人言(사람들이 말했다)’라고 무책임하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문이라는 뜻이다. 승평부부인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로 당시 52세, 연산군은 31세 청년이었다. 지금도 52세면 임신하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평균수명이 40살도 안되던 당시에 52세 여인이 임신을 했다? 궁중에 젊고 예쁜 궁녀들이 들끓는데 52살 큰어머니를 간통했다? 혹시 이긴 자들의 일방적 기록은 아닐까? 착잡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묘역을 내려온다. 오른 쪽에 원당샘(元堂泉)이 있다. 이곳에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 있다. 들리기로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네 일가가 연산군 묘가 이곳으로 이장하자 돌보기 위해 옮겨 왔다고도 한다. 이제 길을 건너 정의공주(貞懿公主) 내외의 묘역으로 간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이다. 큰 딸 정소공주가 어려서 죽자 외동 공주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자라서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안맹담과 혼인하였다. 안맹담이 48세에 사망하자 정의공주는 오빠인 세조에게 부탁해 이곳에 장사지냈다. 본래 이곳은 고려 상장군 강택(康澤)의 묘역이었다고 한다. 사시사철 햇빛이 밝게 비치고 포근히 감싸인 지세가 길지(吉地)인 것 같다. 그러기에 고려조에 이어 조선조의 실세도 이곳에 음택을 정한 것이리라. 묘역에는 입구 쪽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이, 오른쪽에 정의공주가 모셔져 있다. 뒤에서 보면 좌여우남(左女右南)이다. 동양에는 예절방위(禮節方位)라는 것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좌남우녀(左男右女)이며, 좌상우하(左上右下)다. 좌를 우보다 높게 치는 것이다. 좌우 방향을 잡는 기준은 높은 곳(것), 존경하는 것(곳)이다. 예를 들자면,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계신 곳(탁자가 있는 곳)에서 봤을 때 왼쪽 오른쪽이 기준이다. 결혼식장에서는 주례가 바라보는 방향이 기준이 된다. 높은 것(또는 곳)을 정하기 어려우면 뒤 쪽이 기준이 되고 그곳에서 보았을 때 좌와 우를 구분한다. 옛 전통혼례를 보면 병풍 자리를 중심으로 왼쪽(동쪽)에는 신랑이 자리하고, 오른쪽(서쪽)에는 신부가 자리했다. 요즈음의 예식장 결혼식은 좌우가 바뀌어 좌녀우남이다. 어디 예절인지 알 수 없고 무덤의 위치와 비교하면 섬뜩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음(陰)과 양(陽)의 방위가 바뀌기 때문이다. 즉 살았을 때 좌남우녀가 죽으면 좌녀우남(左女右男)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의 결혼식장 남녀 위치는 죽은 자의 자리에 서는 결과가 된다. 그러기에 필자의 친구는 딸을 출가시키면서 좌남우녀 위치를 철저히 지켰다. 옛 분들 묘역에 오면 이 예절 방위가 철저히 지켜진다. 무덤 속을 살펴 볼 수는 없지만 합장의 경우도 이 예절방위에 따라 부부를 장사지낸다. 이제 방학동 방향으로 이동한다. 왼쪽으로 구릉이 나타나며 성빈원주원씨지묘(誠嬪原州元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성빈원주원씨는 태조 이성계의 후궁인데, 손(孫)이 없자 세종이 자신의 아들 임영대군에게 제사를 받들도록 했기에 여기 묻혀 있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 초기 옛 무덤들이 있다. 임영대군 오산군(烏山君)계의 옛 무덤들이다. 조선 초기의 묘제(墓制)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학습장소가 될 만하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방학동성당이 있고, 사이길로 들어서면 산길로 들어서는 초입이 된다. 주민들이 운동도 다니고 산으로 오르는 길이라 잘 다듬어져 있다. 방학 능선길로 접어들기 전 장수산악회의 운동터가 나오는데 이 곳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불상복원비가 서 있는데, ‘이 마애불은 1973년 이 곳에서 운동하는 산을 좋아하는 주민들이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참으로 특이한 경우이다. 사찰에서 새긴 것도 아니고 이 곳 주민들이 새겼다니. 고려나 조선 시대에 살기 힘든 민초(民草)들에게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을 기다리는 미륵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던 미륵불이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미륵님’이 되어 토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을 맡고 애 못 낳는 아낙들에게 아기를 점지해 주는 분으로 민초들이 절이 아닌 마을 입구나 마을 주변에 세운 것이다. 그러니 아들 원하는 아낙들이 그 코를 갈아 먹는 바람에 마을 가까이 있는 미륵님 치고 코가 성한 게 없다. 어쩌면 우리는 미륵님 코가 점지해준 ‘미륵님의 자손들’인지도 모른다. 마을 앞에 세운 소위 벅수(돌장승)도 이런 사정과 관련 있는 것 아니가 하는 느낌이 든다. 마애불을 뒤로 하고 능선길로 올라서면 편안한 흙길이 도봉산 우이암 쪽으로 이어진다. 1km여 편안한 능선을 지나 우이암의 암봉들이 가까워지면서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된다. 전통 사상에선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데, 요즘 결혼식에선 남녀 위치 바뀌었으니 어느나라 풍습? 무덤 속 남녀 위치를 요즘은 결혼식장에서 구현? 이 비탈길 중간쯤 되는 곳에 원통사(圓通寺)가 벌리(번동)와 마들평야를 내려보며 자리잡고 있다. 신라 경문왕 3년(864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서, 이성계가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마친 날 본인이 천상의 상공(相公)이 되는 꿈을 꾸었다나…. 그래서 상공암이라는 바위도 있다. 절 뒤로는 우이암을 일으켜 세운 힘찬 암봉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바위의 기세가 원통사 마당에 고스란히 자리한다. 바위 밑으로 석굴암을 조성했기에 들려 본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이 절에는 대웅전이 없고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세음 기도도량인 셈이다.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면 모든 일이 뜻처럼 된다는 뜻이니 혹시 바라는 일이 있으면 이곳에 올라 관세음보살을 외워 볼 일이다. 우이암이 보고 싶으면 잠시 수고를 하여 우이암까지 다녀오고(왕복 15~20분 소요), 아니면 절문을 나서 좌측 골짜기 쪽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계곡길로 들어선다. 이곳이 무수(無愁)골 계곡이다.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이름 그대로 한없이 평화로운 계곡길이다. 그러나 지명을 공부하는 분들의 말을 빌리면 무수골은 원래 무싀골이며, 이는 ‘믈(물의 옛 형태) + ㅅ(사이시옷, ‘의’의 뜻) + 골’, 즉 물골(水谷, 水洞)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골’이 슬그머니 ‘근심 없는 골짜기’로 둔갑했다. 그런들 어떠리? 이 골짜기를 내려오는 동안 모든 근심을 잊었으니 헛말이 아니다. 골짜기를 다 내려올 즈음 도봉초등학교 앞쪽에 작은 봉우리를 만나는데 그 이름이 ‘두리봉’이다. 예전부터 이 골짝마을 처녀들은 미인으로 소문났으며, 소문이 중국까지 번져 도둑이 여자들을 훔쳐 달아났다고고 한다. 여자를 도둑맞은 이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두리두리’ 찾아보았다나…. (참고: ‘서울의 전설’ 학술자원공사 편). 모르긴 몰라도 병자호란에 여자들을 강탈당했던 아픈 기억의 흔적은 아닐런지…. 무수골을 빠져 나오면 옛길을 만난다. 지금은 방학동에서 의정부로 가는 큰 길이 뚫렸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이 2차선 옛길로 의정부, 동두천, 포천 방향의 모든 교통수단이 지나갔다. 이게 바로 조선의 옛길 경흥대로다. 그 길이 고스란히 남아 지금은 이면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무수천에서 100m 북쪽에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이제 성황당은 없어졌으나 지금도 이곳 지명이 성황당이니, 나그네 발 편하라고 성황당 당신(堂神)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지켜 주시는 셈이다. 출출할 시간도 되었으니 느티나무집에 들러 닭이나 오리를 드셔도 좋고, 도봉역 역사에 식당이 있으니 탁주 한 잔 하는 것도 좋다. 교통편 1) 4호선 미아역, 수유역, 쌍문역에서 버스 130번, 1144번 환승 ~ 연산군묘/정의공주묘 하차 2) 1, 4호선 창동역 1번 출구 버스 1161번 환승 ~ 연산군묘/정의공주묘 하차 걷기 코스 연산군묘 입구 ~ 연산군묘 ~ 정의공주묘 ~ 성빈 원씨묘/임영대군 오산군계 묘역 ~ 방학동 성당 ~ 마애불(장수산악회) ~ 방학능선 ~ 원통사 ~ 무수골 ~ 성황당 ~ 1호선 도봉역 CNB저널은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낮에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유적지를 탐방 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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