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종구 박사의 클래식 이야기]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난 2등 음악가”라며 겸손해도 평가는 “최고”

  •  

cnbnews 제196-197호 편집팀⁄ 2010.11.22 14:18:57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는 바그너에 이어 독일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다. 그의 부친은 뮌헨의 궁전 오페라단의 호른 연주자였으며 슈트라우스는 여섯 살 때부터 음악을 공부했다. 궁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고 자랐으며 부지휘자로부터 음악의 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열 살이 되던 1874년 리하르트는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바그너의 신(新) 독일 음악을 반대했으며, 아들이 바그너 음악을 공부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때문에 리하르트는 열여덟 살이던 1882년에 뮌헨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예술사를 공부했으나 1년 후에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당시 독일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한스 폰 뵐로우(Below)의 보조 지휘자가 되어 지휘를 배웠다. 슈트라우스는 서른 살이 되던 1894년에 소프라노 폴린과 결혼했으며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부지런히 소프라노의 노래와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 슈만과 멘델스존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하였지만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문학 작품들을 주제로 한 교향시를 많이 작곡하였다. ‘돈 후안’ ‘죽음과 변용’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 ‘돈키호테’ 등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은 각 악장에 제목이 붙어 있으며 작곡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표제음악(Programme Music)이다. 1808년에 완성된 베토벤의 ‘심포니 6번’은 시골의 무도회 장면과 폭풍을 표현하고 있어 표제음악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교향시에서 베를리오즈는 아일랜드의 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 대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마약을 복용하고 살인과 사형 그리고 지옥으로 가는 환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리스트도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내용으로 한 ‘파우스트 심포니’를 작곡하였다. 그리하여 표제음악은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돈키호테의 모험을 교향시로 표현했으며 자신의 가정생활을 ‘틸 오일렌슈피겔’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을 주제로 ‘슈퍼맨’을 작곡하고 자신의 영웅적 심리를 묘사한 ‘영웅의 생애’를 작곡하였으며 ‘알프스의 심포니’는 알프스 산맥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현대 음악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12음계 음악(12tone music)이 보편화되면서 표제음악과 교향시는 사라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슈트라우스는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오페라 ‘구트람’은 실패작이었으며 ‘포이에르스노트’는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살로메(Salome)’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초연 시에 무려 38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오페라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되었을 때에는 살로메가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장면을 두고 거센 항의가 쏟아져 나와 단 한 번 공연하고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살로메’는 큰 인기를 얻었다. 말러(Gustav Mahler)와 라벨(Maurice Joseph Ravel) 등 동 시대의 음악인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으며, 슈트라우스는 부자가 되었다. 그 다음 작품인 ‘엘렉트라(Elektra)’에서는 불협화음(Dissonance)을 더 과감하게 도입했지만 대중으로부터 호응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에서는 좀 더 보수적인 화음을 도입하여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1940년까지 지속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낙소슬 섬의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 ‘이집트 여인 헤레나’ ‘아라벨라’ ‘다프네의 사랑’ ‘카프리치오’ 등 오페라 16편을 작곡하였다. 이 외에도 슈트라우스는 ‘첼로 소나타’ ‘피아노 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등 다수의 솔로 음악도 작곡했는데 그중 아버지가 연주했던 호른을 주제로 ‘호른을 위한 콘체르토’와 ‘바이올린 콘체르트’에 이어 1947년에는 그의 마지막 곡 가운데 하나인 ‘바순, 클라리넷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토’를 작곡하였다. 수많은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들은 낭만주의 음악을 거쳐서 바그너와 말러 음악을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 20세기의 음악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세계를 찾고 있다. 히틀러는 바그너뿐 아니라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좋아했으며 무명 시절인 1907년에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를 보았다. 나치가 집권한 후 히틀러가 독일의 음악과 예술을 장려했으면 하는 마음에 슈트라우스는 히틀러에 동조했으며, 이로 인해 슈트라우스는 친나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축가를 작곡했으며 국가 총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면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나치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며 나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친구의 리브레토로 오페라 ‘침묵의 여인’을 작고했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의 문화 선전부 장관인 괴벨스를 싫어했으며 괴벨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했던 괴벨스라도 독일 음악의 간판격인 슈트라우스를 공개적으로 천대할 수도 없었으므로 괴벨스와 슈트라우스는 불편한 동반자가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아들은 유태인 여자와 결혼을 했고 이들 부부에게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의 며느리는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당할 운명에 놓이기도 했지만 슈트라우스의 영향력으로 슈트라우스의 산장이 있는 가르미시-파르텐키르센에 연금 당하는 것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느리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은 슈트라우스가 직접 강제 수용소로 가서 석방을 요구했지만 허사였고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히틀러 집권 뒤 독일 음악 장려하길 바라면서 나치에 협력하기도. 선전부 장관 괴벨스가 슈트라우스를 싫어했지만 유명세 덕분에 화 면해 독일 군이 후퇴하자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산장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미군을 맞았다. 그가 미군 장교에게 “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이며 ‘살로메’의 작곡가다”라고 선언하자 음악인이었던 장교는 그를 알아보고 보호해주었다. 1948년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슈트라우스는 ‘네 편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한 후 1949년 85세에 그의 산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게오르그 솔티(Sir Georg Solti)가 장례식에서 음악을 지휘하였다. 항상 겸손한 슈트라우스는 자신을 “1등 음악가는 아니지만 2등 음악가 가운데 1등”이라고 표현했다. 아마도 그는 베토벤이나 바그너는 아니지만 20세기의 작고가로서는 최고라는 의미로 말했을 것이다. 캐나다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역시 슈트라우스를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라고 격찬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