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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박사의 클래식 이야기]엑토르 베를리오즈

음악으로 여배우 쟁취한 열정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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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8호 편집팀⁄ 2010.11.29 14:04:4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18~19세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같은 거장들이 유럽 음악을 주도하는 동안 프랑스는 열세였다. 하지만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의 등장으로 판세는 뒤엎어지고 그의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음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의 리옹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유명한 의사였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으며 취미로 기타와 플루트를 배웠지만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화성법을 책으로 공부하고 로망스와 실내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라틴어와 문학을 가르쳤는데, 베를리오즈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인 소년이었으며 로마 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열두 살 때 열여덟 짜리 이웃집 소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등 감성이 풍부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나 의학 공부를 싫어해 파리의 오페라극장을 자주 찾았다. 파리 음악원의 도서관에도 몰래 다녔으나 정식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퇴실을 당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824년에 급기야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오페라 ‘신성한 궁전의 심판들(Les franc-juges)’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스물 셋이던 1826년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828년에는 베토벤의 ‘심포니 3번’과 ‘심포니 5번’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난 뒤의 감흥을 후일 ‘파우스트의 저주(La Damnation de Faust)’에 담아 작곡했다. 또한 해리엇 스미드슨에 대한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그는 스물네 살 때 ‘환상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그는 피스톨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충동적 청년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의 애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편곡했으며, 셰익스피어 연극 ‘폭풍(The Tempest)’의 서곡을 작곡했다. 그 첫 공연이 있던 날 50년 만의 폭우가 쏟아져 공연장은 텅 비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리스트를 만났으며 둘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후일 리스트는 더 많은 사람들이 ‘환상 교향곡’을 들을 수 있도록 이 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1831년 그는 프랑스 정부가 최고의 젊은 예술인에게 주는 로마 대상(Grand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2년간 그곳에서 머물면서 여러 작품을 작곡하였다. 프랑스 음악의 거장, 비제(Georges Bizet), 마스네(Massenet, Jules Emile Frederic),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모두가 로마 대상의 수상자들이었다. 베를리오즈 역시 로마 대상을 수여한 것은 수상의 의미도 있지만 최고의 젊은 예술가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베를리오즈는 예측 불허의 행동으로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로마에 가 있는 동안 연인이었던 카미에 모크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격분한 나머지 피스톨을 훔쳐 그녀를 죽이고 자살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파리를 떠났다. 로마 유학 중 연인이 결혼하자 권총 훔쳐 연인 죽이고 자살하려 파리로 돌아가다 검문에 걸려 미수 그쳐 그러나 다행히 그는 국경 검문소에서 그 음모가 발각되면서 권총을 압수당했고, 이후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결국 그곳에서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이는 작곡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후 베를리오즈는 아일랜드 출신의 연극배우 스미드슨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영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1828년과 1832년 파리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파리에서 대스타가 되었다. 이 연극을 본 베를리오즈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이후 그녀에게 편지를 수없이 보냈지만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사실 그녀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편지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절망한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이 사망한 지 3년이 되던 1830년에 이야기가 있는 표제음악 ‘환상 교향곡’을 작곡해 공연했지만 스미드슨은 그 공연에 오지도 않았다. 이 음악의 내용은 한 예술가가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 아편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죽지는 않고 환상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5악장으로 된 심포니에서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절망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몇 년간을 실연 때문에 헤매던 베를리오즈는 1832년 ‘환상 교향곡’의 후편인 ‘렐리오(Lelio)’를 공연했는데 이때 초대장을 받은 스미드슨이 이 연주를 보고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담은 음악에 감동을 받아 같은 해 베를리오즈와 결혼했다. 이 심포니의 4악장에는 ‘교수대로의 행진으로’라는 표제가 붙었는데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애인을 살해한 뒤 사형을 당하기 위해 교수대로 가는 내용이다. 그 당시 이미 스미드슨의 인기는 퇴색한 상태였으며 연극의 실패로 많은 빚을 떠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으며 아들 하나를 낳은 지 7년 뒤에 별거 생활로 들어갔다. 베를리오즈는 비극적으로 끝나는 자신과 스미드슨의 사랑을 이미 ‘환상 교향곡’을 통해 예언한 셈이다. 베를리오즈의 또 하나의 대작은 ‘파우스트의 저주(La Damnation de Faust)’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베를리오즈는 괴테(Goethe)의 소설 ‘파우스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1846년 원작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를리오즈는 총 4편의 오페라를 발표했는데 또 하나의 걸작은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이다. 이후 베를리오즈는 당대 가장 뛰어난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지휘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는 데 불만을 가진 그는 음악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지휘 공부를 한 경험이 없어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뛰어난 지휘가가 되어 전 유럽을 다니면서 자신의 음악을 지휘했다. 영국에서는 상임지휘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도입했는데 천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로 여러 번 연주를 했다. 베를리오즈는 작곡과 지휘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하여 음악과 문학평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1960~1970년대 들어 프랑스의 유명 지휘자 샤를르 뮌시(Charles Munch)와 영국의 콜린 데이비스(Colin Davis)가 ‘트로이 사람들’을 공연해 녹음하면서 그의 음악이 더 유명해졌다. 1990년 파리에서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개관될 때 ‘트로이 사람들’이 공연됐다. 비엔나를 중심으로 베토벤에 이어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가 낭만주의 음악의 꽃을 피운 뒤 19세기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음악의 중심지가 파리로 옮기는 분위기였다. 19세기 파리에서는 당대 가장 유명한 리스트와 쇼팽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프랑스 태생의 엑토르 베를리오즈, 찰스 구노(Charles-Francois Gounod), 조르주 비제 등이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인상파 미술에 이어, 포레를 필두로 드뷔시, 라벨 같은 뛰어난 인상파 작곡가들을 배출하면서 음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인상파 음악과 함께 프랑스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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