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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0] 삼곡사~보토현~길상사

미아리 눈물고개에 굿당도 많네
무섭던 굿도 ‘축제’라 생각하고 보면 정겹게 느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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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5호 박현준⁄ 2011.03.28 11:10:38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국민대에 이르는 버스 노선은 여러 방향에 걸쳐 있다. 오늘은 안국역에서 171번 시내버스를 탄다. 버스는 아직도 철학관(哲學館)이 많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길음역을 돌아 정릉천을 끼고 북악터널 방향으로 간다. 이제는 고층아파트촌으로 변하였지만 십 수 년 전만 해도 돈암동을 지나 고갯마루로 오르려 하면 버스는 부릉거리면서 매연을 뿜어내던 기억이 새롭다. 고개도 험하고 오르기도 힘드니 반야월 선생은 한국전쟁의 슬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써서 ‘미아리 눈물고개 / 님이 넘던 이별 고개’ 이렇게 우리 마음을 찡하게 했던 것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혜화문(동소문)을 나서 이 고개(돈암현: 敦岩峴 / 적유현: 狄踰峴)를 넘어 정릉(사을한리: 沙乙閑里)이나 수유리로 나가는 서울 북동부를 잇는 도로였다. 지금의 서울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는 사대문 밖 10리(성저 10리)였기에 수유리까지가 서울인데, 주 도로는 경흥대로로서 동대문 신설동 안암동 미아삼거리 수유리를 잇는 길이었기에 이 길은 작은 길에 지나지 않았다. 미아리(彌阿里)라는 지명 유래는 분명치 않다. 강북구 지명 유래에 의하면 근처 불당골에 미아사가 있어서 미아리가 되었다고도 하고, 겸재의 ‘도성대지도’에는 적유현(현 미아리 고개) 바로 옆 지명이 사아리(沙阿里: 사을한리, 즉 정릉의 이칭)였기에 거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고종2년(1865년) 육전조례에 이 곳 지명을 미아리계(彌阿里契)로 표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사아리’가 미아리로 음변(音變)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민대 앞에서 버스를 내린다. 북한산 칼바위능선 코스나 둘레길을 가려는 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이다. 버스정류장 전방 북악터널 방향으로 30여m 가면 주차장이 있고 이곳에는 심곡사, 영불사, 서광사 등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코스는 이곳에서 20여m 앞쪽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그 곳에는 삼곡사, 약수암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삼곡사와 심곡사를 혼동하여 엉뚱한 곳에서 고생하는 이들이 생기니 길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국의 산신을 소개한 책자 중에서도 삼곡사가 심곡사로 오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돼지머리, 작두에 산닭을 던지는 굿은 처음에는 무섭기도 하지만, 잔치로 생각하고 보면 질펀한 한마당 페스티벌 느낄 수 있어. 이제 북악터널을 왼쪽으로 끼고 오른다. 이 길은 굿당 삼곡사와 순국선열 21위의 위패를 봉안한 여래사가 있고, 북한산 형제봉을 오르는 길이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가파르기는 하여도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니 오르기에는 문제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사을한리(정릉)와 장의동(藏義洞: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장의사에서 나온 동명, 지금의 구기동 평창동)을 잇는 오랜 고갯길이다. 공비 김신조 무리가 지나간 이후 길이 끊겼고 북악터널이 뚫리면서 그 원형도 잃은 아쉬운 길 중 하나다. 다행히 저 작년 김신조 루트를 개방하면서 옛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을 10분여 오르니 오른 쪽으로 길이 막히면서 큰 나무에 굿당을 알리는 울긋불긋한 천이 휘감겨 있다. 길을 다니면서 참으로 아쉬운 것이 굿당, 당집, 서낭당 등 우리의 고유한 정서나 신앙이 미신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말살되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안향(安珦: 고려 충렬왕 때 유신)의 미신타파’라 하여 우리 것 말살을 찬양하는 가치관에 물들기 시작하여 서양식 가치관을 존중하는 교육을 받다 보니, 오랫 동안 우리 것을 미신이나 미개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 왔다. 필자뿐 아니라 일제 식민지 아래서 교육 받은 세대부터 근래에 교육받은 세대가 대부분 그런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수천 년 내려온 우리 것의 많은 부분이 어찌 지켜지겠는가. 게다가 ‘새마을 운동’으로 오지의 시골마을에 남아 있던 우리 것들도 모두 부서져 버렸다. 다 늦게 일부 민속학자들과 외국인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찾아다니지만 없어진 것들이 다시 살아날 리 없다. 일본의 시골동네를 가보면 구석구석 남아 있는 신사(神祠)나 옛 흔적을 볼 때 관광자원으로서는 물론, 내 것 위에 남의 것을 수용한 그들의 단단함에 감히 맞설 수 없는 심정적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삼곡사는 굿당이다. 이 곳 정릉 근처만 하여도 삼곡사 약수암 천신당 천제당 북악산신당 산신당 등의 굿당이 있고 북한산성 효자리(동)를 비롯하여 많은 굿당이 있다. 어느 날 산행 길에 굿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눈여겨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필자도 처음에는 우선 돼지머리부터 거슬리고 울긋불긋한 복장이나 소품 등이 낯설고 작두도 무섭고 산 닭 던지는 것도 끔찍하여 피해 다녔건만 굿을 잔치나 축제로 보면 질펀한 한 마당 페스티벌에 참여한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귀신이 쫓아와 악몽에 시달릴 것 같았던 그런 찜찜함도 이제는 없다. 어려서 받은 교육은 정말로 일생을 지배하여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삼곡사는 예전에는 암자였다는데 40여 년 전부터 굿당이 되었다 한다. 북한산 형제봉 능선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북한산의 산기운이 뻗어 내려오고 마애불을 새길 만한 바위가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바위에 부조(浮彫: 돋을새김)로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那般尊者), 칠성(七星)을 새기고 채색을 하였다. 산신 부조 두 분, 독성 부조 한 분, 칠성 채색화가 두 곳에 있다.

사찰 삼성각(三聖閣: 산신, 독성, 칠성을 모신 전각)에 봉안할 분들을 이곳에서는 바위에 새기고 채색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본래 절에서 삼성각이란 고려 말 추앙받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 분의 대사를 봉안하던 곳이었으나 핍박받던 조선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구복의 민간신앙을 수용하여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삼성각 등이 절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시기가 17c~18c로서 석가의 정법과 우리 민간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신사-옛흔적 고스란히 남아 자기 것 위에 해외문화 잘 받아들인 일본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 우리 것을 무시하고 버린 것 아닐까 지금도 사찰의 예불문은 ‘사바세계 남섬부주 해동대한민국 OO도 OO군 OO산(山) OO사(寺)…’로 시작한다. 반드시 산(山)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사찰도 반드시 ‘삼각산 OO사’라 한다. 그만큼 산(山)은 사찰에 주요한 신앙적 대상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사찰의 산신각예불에서는 산왕대신(山王大神)께 고한다. 60년대 불교 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귀일심원 요익중생 상구보리 하화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上求菩提 下化衆生: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위로는 진리를 구하며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자)의 근본원리에서 벗어난 모든 대상을 타파하고자 하였으며 성철스님도 정법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고자 하였으나, 한 번 민초들 마음속에 들어온 믿음의 대상이 쉽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를 살던 삶에 지친 민초들이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석가의 진리는 우선은 멀고, 불 같이 내 소원 들어주시는 산신님, 독성님, 칠성님은 가깝다 보니 이 곳 구당이나 절집 삼성각에는 오늘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삼곡사 산신은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른바 기호산신상(騎虎山神像: 범을 탄 산신상)인데 새끼 범을 안고 있다. 그 옆으로는 발원문이 있다. ‘진사 조정섭 양주인 을사생정월이십일 인시 수부귀다남 축원’(進士 趙定燮 楊州人 乙巳生正月二十日 寅時 壽富貴多男 祝願, 양주사람 을사년 1월 20일 인시생 진사 조정섭이 오래 살고 부귀하고 아들 많이 낳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삼각산 산신님께 기원하고 있다. 이 분은 중추부사를 지낸 조징림의 아들로 1845년에 태어나 1863년에 진사에 급제한 분이다. 약 150년 전 분이다. 그 기도문을 보면 아들 많이 낳게 해 달라는 것 빼고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나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는 내용과 다름이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 되고, 귀하게 되고(성공하고)…. 한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장자(莊子) 외편(外篇) 천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께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요 임금, 순 임금인데 요 임금이 하루는 화(華)라는 국경 땅을 순시했다. 국경지기가 요 임금께 “오래 사십시오, 부자 되십시오, 아들 많이 나십시오” 이렇게 축원하였다. 이에 대해 요임금은 모두 No!

그 이유를 물으니 “오래 살면 욕됨이 많고(壽則多辱), 부자가 되면 (번거로운) 일이 많고(富則多事), 아들 많으면 걱정 많네(多男則多懼)” 이렇게 답하였다. 우리의 조정섭 진사님은 과거급제한 분이신데 요 임금 말씀도 모르셨단 말인가? 욕되고 걱정 많고 일 많기를 스스로 발원하셨으니. 그런데 국경지기가 요 임금께 한 마디 한다. “오래 살면 산신 되는 것인데 구름 타고 올라가면 될 것이요, 부자 되면 사람들 나누어 주면 될 것이고, 사람은 다 직분을 타고 나는 것인데 아들 많으면 직분을 나누어 주면 되지, 쯧쯧.” 이렇게 말하며 휘휘 떠나 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조 진사님은 아마도 이 국경지기의 말대로 실행했을 것이다.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般尊者)로서 석가모니불 열반하실 즈음 곁에 있던 네 존자(마하가섭, 쿤다다나, 빈두르, 라훌라) 중 빈두르 존자라고 하는데 불경에는 독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만 독성신앙이 있다고 하여 우리 고유의 신앙대상이거나 단군신화와 관련된 분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추측컨대 우리나라 고유의 신앙 대상인 분일 가능성이 많다. 전문학자들의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분이다. 삼곡사 칠성도는 독성 옆에 그려져 있고, 또 하나 오른 쪽 산등성이 바로 너머에 서 있는 바위에 퇴색한 칠성도가 그려져 있다. 지워져 판별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치성광여래,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함께 그린 칠성도로 보인다. (칠성신앙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있는 길의 낙성대 편과 삼막사 편에서 이미 언급) 이제 삼곡사를 떠난다. 좌측 산등성이 쪽으로 나아가자. 잠시 길이 낙엽 쌓인 내리막을 지나야 하나 곧 옛 보토현 고갯길에 닿는다. 성북구가 산책길을 잘 손질하여 놓아 걷기에 편하니 보토현 길로 가지 말고 여래사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오르는 길은 형제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편한 길을 약 5분 지나면 절 기와지붕이 보이고 이어서 삼각산여래사라고 쓴 일주문이 나타난다. 순국선영 영령 21위를 모셨다는 안내판이 서 있고 일반인들을 위한 납골묘가 자리하고 있다. 쉬어 갈 수 있는 그늘막도 있다. 이곳을 지나면 잠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북악스카이웨이 위를 지나는 하늘교와 닿으면서 김신조루트가 시작된다. 이 곳 하늘마루 정자가 오늘 코스의 분기점이다. 오늘 가는 길이 편안한 산책길인데 그 정상에 해당하는 지점이 이 곳 하늘 마루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우리나라 산의 정기(精氣)가 백두대간으로 내려와 한북정맥을 타고 삼각산에서 분기하여 보현봉에서 고개 들고 그 기운이 형제봉을 지나 이 곳 보토현에서 숨을 고른다. 장의동(구기동, 평창동)과 사흘한리(정을)를 이어 넘던 보토현, 백두산의 기운이 서울로 넘어 와 구준봉, 북악산에서 솟아오르게 한 목(項)덜미에 해당하는 중요한 고갯길이다. 오래 살고 부자 되면 좋기도 하지만 오래 욕되고 돈 탓에 번거로운 단점도 있다? 오래 살아 신선 되고, 돈은 나누면 될 것을… 연산군 때에는 장의동과 사흘한리(즉 보토현) 길과 무계동(武溪洞: 부암동)과 사흘한리길(즉 북악스카이웨이길)을 통행금지 시킨 일도 있었다. 이 고개를 지나면 지금 국가 시설이 있는 구준봉(狗蹲峰)에 이르고 이곳에서 산줄기는 동서로 갈라지는데 서로 갈라진 줄기가 북악산 ~ 인왕산 ~ 안산이 되며, 동으로 갈라진 줄기가 아리랑고개 ~ 미아리고개 ~ 개운산 ~ 안암산이 된다. 그러니 서울시내 시민은 모두 보토현의 자식들인 셈이다.

오늘 우리가 갈 길은 바로 이 산줄기의 마루금(주능선) 뒤로 뚫은 북악하늘길(북악스카이웨이 성북구간)이다. 북악하늘길로 내려선다. 산책길이 한없이 편하다. 출장 온 외국손님들 한나절 산보코스로 안내하면 어디에도 손색이 없을 길이다. 숲속다리와 하늘다리는 길 위로 걸친 아름다운 다리이다. 이윽고 좌측으로 북악골프연습장이 보일 즈음 정릉으로 넘어가는 길이 스카이웨이 아래로 지나간다. 이곳에서 길을 내려서자. 앞 담장에 '길상사 200m' 표지판이 보인다. 걸어보면 실제로는 약 1km쯤 되는 것 같다. 가구박물관 앞길을 지나고 갈림길이 나올 즈음 좌향좌하면 길상사가 보인다. 길상사(吉祥寺). 속가 이름은 김영한,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필명은 자야(子夜), 법명은 길상화(吉祥華) 일생동안 백석(白石)을 사랑한 여자(아마도 또 그만큼 사랑받았을 여자) 자신이 일군 일생의 재산을 법정스님께 부탁한 보살 길상화. (이 분의 사랑과 일생을 새삼스레 이 글에 쓰는 것은 사족이라 생략합니다) 길상사 마당으로 들어서니 최종태 교수가 조각한 관세음보살은 여전히 마리아 같은 자비로움으로 수줍게 서 계신다. 가톨릭 신자가 새긴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언제 만나도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 옆에 서 계시는 시골 아재 같은 선각여래도 내 눈에는 언제나 넉넉함을 준다. 외람되지만 오누이가 곁에서 절집에 오는 이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 극락전에 들려 법정스님 진영에 인사드린다. 우리 시대를 무소유로 살다간 ‘비구 법정’ 그 허허로움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진다. 당신 떠난 지 일 년이 안 되어 일어난 이 도량에서의 일. 길상화 보살도, ‘비구 법정’도 마음 아파하시지 않겠는지.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 백석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 1020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 ~ 유진상가 돌아 153 버스 환승 ~ 국민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 171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지하철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 ~ 1112/171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우이동/삼양동 방향에서 1166 버스 ~ 국민대 하차 걷기 코스 국민대 ~ 삼곡사 ~ 여래사 ~ 하늘마루(김신조 루트 앞) ~ 북악하늘길 ~ 길상사 ~ 선잠로 ~ 삼선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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