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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 30] 의주대로 따라 용미리 마애불로

버스를 타고 떠나보는 고양동과 의주대로 아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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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6호 박현준⁄ 2011.10.31 12:00:13

오늘의 이야기 있는 답사 길은 시내버스로 떠나 보려고 한다. 용미리 용암사에 가면 낮은 고갯마루에 남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겯고 계시는 거대한 두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보물 93호인 이른바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이다. 그 너머에는 윤관장군의 묘가 있고, 근처에는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 선생의 묘가 있다. 조선 400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무덤다툼(山訟)을 일으킨 두 분의 묘역이다. 이곳을 가는 길 중도에는 고양동(高陽洞)이 있다. 100만 인구를 돌파했다는 고양시를 있게 한 근원지인 곳이다. 그러나 고양시는 알아도 ‘고양’이라는 곳이 있는지 아는 이도 드물고, 더구나 고양시민도 대부분 알지를 못한다. 울산광역시에는 울산이 있고, 인천광역시에는 인천이 있고, 양주시에는 양주라는 땅이 있는 것은 알면서도 고양시에 ‘고양’이라는 땅은 고양시민도 가 본 사람이 드물 정도로 거의 잊혀진 땅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통일로에 묻힌 의주대로(義州大路)의 아픔이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서울~송도(개성)~평양~의주~단동~심양~북경을 가려면 반드시 ‘고양’땅을 지나야 했다. 그 시절 국도 1호인 의주대로(관북대로:關北大路)는 서울에서 고양을 지나 파주를 거쳐 임진강을 건넌 후 개성으로 통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이 왔고, 청나라 북경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면서도 굳이 알량한 자존심에 그 옛적 연(燕)나라 땅이었던 연경(燕京)으로 간다고 했던 조선 사신들의 연행로(燕行路)였다. 또한 빗속에 목숨을 구걸했던 선조(宣祖)의 몽진(蒙塵: 왕의 피난)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로가 뚫리면서 ‘고양’은 큰길에서 벗어난 고개 아래 작은 동네로 전락했고 사람들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다행히 한국에 유학 와 지리학을 공부하던 젊은 일본학생 도도로키 히로시가 삼남대로(三南大路)를 걸은 후 우리 옛길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이 생겼다. 화물차와 군용차가 주로 달리며 잊혀졌던 이 길을 이제는 걷는 이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필자가 조금 걸어 보니 이 길은 2차선 시골 차도로, 보행자도로가 없어 쾌적하지도 않고 매우 위험해 걷기를 권장할 수가 없다. 시청 앞에서 703번(신성교통)버스에 올라 상상여행을 떠나 본다. 버스가 옛적 연행사(燕行使) 행차처럼 숭례문(남대문) 안으로 지날 수는 없으나 그 때처럼 서울역 YTN 앞을 돌아 의주로(義州路: 의주대로였기에 이런 이름이 되었음)로 접어든다. 곧 옛 경기감영(京畿監營) 앞이자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아래, 만초천에 걸린 경교(京橋)가 있던 서대문 네거리를 지난다. 잠시 후 여름이면 연꽃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서지(西池)가 있던 금화초등학교 앞도 지난다. 길옆으로 밀려난 독립문이 보인다. 약소국의 아픔이 배어 있던 영은문(迎恩門:중국황제의 은혜를 맞이한 문)을 부수고 세운 독립문, 모화관(慕華館)터에는 새로 세운 독립관이 보인다. 버스가 수월하게 무악재를 넘는다. 개화기 때까지만 해도 겨우 말 두 필 비껴갈 정도밖에 안됐던 까마득히 높은 고개길이었다. 고개를 넘으면 3호선 홍제역이다. 의주대로 첫 번째 여관이었던 홍제원(弘濟院)이 골목길 안쪽에 있다.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인조반정군이 모여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조금 내려오면 고려 때 절 사현사(沙峴寺)가 있고, 이윽고 유진상가 밑으로 흐르는 모래내(沙川, 홍제천)를 건넌다. 골목 안쪽은 조선시대 최고의 인절미 맛을 자랑하는 떡전들이 몰려 있던 떡전 거리이다. 이제는 흔적도 없다. 그 시절 먼 길 떠나는 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든든한 먹거리였을 것이다. 녹번동으로 가기 위해 산골(山骨)고개를 넘는다. 산골은 석영에 섞인 구리화합물인데 낙성(落傷) 많던 옛사람들의 접골치료제였다. 녹번역을 지나면 불광동으로 가는 나지막한 고갯길이 있다. 양철평(梁鐵坪)이다. 이곳부터 부산과 의주가 각각 천리인 양천(兩千)이어서 ‘양천평’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로 가기 위해 숭례문에 도착했는데 청군(靑軍)이 양철평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혼비백산 시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갔다. 의주대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략길이기도 했던 아픈 길이었음이 새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연서역이 있었던 연신내를 지나 박석고개 넘어, 검암참(黔岩站)이 있었던 구파발에 닿는다. 이제부터는 버스 노선길과 의주대로길이 조금씩 어긋난다. 통일로가 의주대로를 버리고 새롭게 뚫렸기 때문이다. 다시 버스길이 의주대로와 만난 곳은 벽제 승화장(碧蹄昇華場)을 끼고 돌아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39번 도로 안쪽이 된다. 승화장 동쪽 산허리에는 지금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의주대로 고개 망객현(望客峴)이 있다. 옛 분들이 미리 내다본 것일까. 이제 望客峴은 亡客峴이 되었다. 망객현 아래로는 교외선 벽제역이 있다. 2004년 이후로 여객운행은 그치고 화물만 운행하는 잊혀진 철도가 되었다. 60년대 70년대, 상춘객과 데이트객들의 사랑을 한껏 받던 추억의 기찻길이다. 필자도 그 때가 그리워 버스에서 내려 역사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사람 자취 없는 철도길만 쓸쓸하다. 화물만 취급한다고 한다. 역에서 내려오면 조금 아래 잔디밭 안에 벽제관구지(碧蹄館舊址) 비가 말끔히 단장돼 서 있다. 벽제관은 국립여관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자. 군동쪽 15리에 있다. 중국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하루 반드시 이 곳에 머문다(在郡東十五里 中朝使臣入王京前一日 必宿此驛)라고 했다. 인조 3년 (1625년) 관아를 옮기면서 벽제관도 현재의 터로 이전했다. 다시 버스를 탄다. 2~3km 왔을까, 버스가 고양동으로 들어간다. 옛 조선 시대의 길 넓이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인지 2차선 차선은 복잡하고 길도 직선화돼 있지 않다. 사람들의 밀도는 높아 북적대는 느낌이 난다. 이제 옮긴 벽제관터를 찾아 가 보자. 고양초등학교 앞길을 지나면서 넓은 공터가 보인다. 주춧돌이 보이고 안내판도 서 있다. 조선시대 국도 1번, 중국으로 가는 길 첫 번째 큰 규모의 국립여관이다. 6.25전까지만 하여도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초석뿐이다. 안내판에 붙여 놓은 건물의 옛 사진들이 그 규모를 알려 준다. 옛터나 옛 사진으로 보면 아주 큰 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국사시간에 배운 ‘벽제관싸움’이 떠오른다.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던 명나라 이여송 군대가 일본군의 조총반격에 참패한 지역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 여세로 권율이 방어하던 행주산성으로 구름 같이 밀려갔으나 참패했다. 성공의 함정(Success Trap)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고양관아 자리가 궁금해 찾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다. 주택가에 묻혀버린 것이다. 향교로 향한다. 백제관터에서 중남미문화원방향으로 약 500m 위치에 향교와 중남미문화원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향교문은 굳게 닫혀 있고, 문화원에는 비교적 인적이 많다. 우리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단 한 사람이 오더라도 문을 열어 맞고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400년 된 고양읍치를 떠나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곳의 현재 모습이 쓸쓸히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혜음령으로 향한다. 버스가 벽제삼거리에서 좌측 311번 도로로 접어든다. 2차선 도로에 갓길은 없고 차량의 왕복은 빈번하다. 사람 발길은 끊기고 바퀴자국만 빈번한 옛 고개길이 너무도 각박하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는 좌우로 2개의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다. 혜음령(惠蔭嶺). 음덕으로 은혜를 입히라고 지어준 이름의 뜻은 어느덧 잊혀졌다. 여지승람에는 (고양)군북쪽 1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고 파주목조에는 주남쪽 35리 고양군 경계라고 기록돼 있다. 지금도 이 고개가 고양과 파주의 경계가 되었다. 고개 아래로는 고려때 절 혜음사(惠蔭寺)가 있었다. 아마도 길손이 쉬어갈 수 있는 원(院)도 겸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蔭寺新創記)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어 그 때의 일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봉성현(峰城縣)남쪽에 20리쯤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허물어졌다. 이쪽 길은 인마가 많아 어깨가 닳고 말발굽이 부딪힐(人磨肩馬接跡) 정도였는데도 숲이 우거져 범과 늑대가 모여(虎狼類聚) 사람을 해치고 도둑도 창궐했기에, 묘향산의 비구 혜관(惠觀)을 시주로 초빙해 1120~1122년에 절을 지었다. 인종(仁宗)은 혜음사라 사액했다(賜額爲惠蔭寺)’는 내용이다. 지금은 물론 혜음사도 혜음원도 없다. 다만 고개이름이 혜음령으로 남아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다. 연전 그 터를 발굴했는데 혜음원이란 명문(銘文)기와가 출토되었다 한다. 빨리 정비가 됐으면 좋겠다. 혜음원터 입구는 용미4리이다. 조금 가면 용미3리인데 예전 세류점(細柳店)이 있었던 곳이며 명군(明軍)이 진을 쳤기에 진대마을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버스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연대앞’ 내리라고 한다. 연대(延大)가 파주캠퍼스를 만들었나? 이상도 하구나 생각했으나, 아하, 군부대인 무슨 연대(聯隊)가 있어 연대앞이었다. 지명도 환경과 생활에서 나온다. 그만큼 지명은 삶의 흔적이다. 이 곳 용미리(龍尾里)는 풍수지리상 용꼬리에서 온 것일까? 아니다. 일제(日帝)가 1914년 지명을 통일했는데 구룡리(九龍里)와 호미리(虎尾里)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라 한다. 참 무미(無味)하구나. 인사동(仁寺洞)도 그 때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을 짜깁기한 지명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제 나지막한 고개가 나타나면서 우측으로 절이 보인다. 용암사(龍岩寺)이다. 절 뒤로 웅장한 바위가 서 있다. 그 바위에는 보물 93호인 거대한 마애불 두 분이 어깨를 겯고 서있다. 정면에서 볼 때 좌측 마애불은 둥근 보관을, 우측마애불은 사각보관을 쓰고 계시다. 손의 모양(手印)은, 좌측 분은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우측 분은 합장을 하고 계신다. 흔히 사람들 이야기로는 좌측은 남자 부처, 우측은 여자 부처라 한다. 상호(相好)가 좌는 남성스럽고 우는 여성스러운데다가 쓰고 계신 보개(寶蓋)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불상에 남녀가 있을까 보냐. 결론만 말하면 좌는 미륵불(彌勒佛)이며 우는 미륵불을 경배하는 보살상(菩薩像)일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나 강릉 신복사지 등에 있는 보살상을 보면 합장을 하고 탑에 경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내판에는 이 마애불의 조성내력이 전설처럼 기록되어 있다. 1932년에 발행된 전등사본말사지에 기록된 내용이라 한다. 그 내용은 고려 13대 선종에게 후사가 없어 원신궁주를 들였는데, 그녀의 꿈에 두 도인이 나타나 “자신들은 장지산 바위에 살고 있는데 오랫동안 향불이 끊겼으니 궁주가 공양하면 은덕을 입을 것”이라 했다 한다. 그리한 결과 아들(한산후)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불상에 새겨진 명문 연구에 의하면 조선 초에 새긴 조성문(造成文)이 있다. 성화(成化) 칠년칠월 (1471년 성종2년)에 세조와 그 부인 정희왕후의 미륵부처 용화회에 참석해 일시에 깨달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願彌勒龍華之中類在初會作上正法, 當來彌勒如來大聖 世祖大王往生淨土) 시주한 사람들은 세조에 협조한 함양군(양녕대군 2子), 한명회 3부인 정경부인 이씨, 세조 외삼촌 심장기, 당대 왕가와 가깝던 승려 혜심 등이다.

즉 세조의 측근들이 세조의 명복과 세조의 부인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권력핵심 정희왕후를 위해 세운 미륵신앙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려적 한산후 탄생과 연관된 전설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한산후 윤( )은 14대 헌종의 아우인데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등극하는 15대 숙종(삼촌)에게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픈 역사가 있었다. 350년 시차를 두고 왕위찬탈을 위해 두 왕조에서 벌어진 삼촌에 의한 조카의 죽음. 후세사람들은 전설로라도 속내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2km 북쪽에 있는 고려 윤관 장군묘로 간다. 실록에 보면 피폐해 그 비석도 찾기 어려웠다 하는데, 이제는 왕릉에 버금가게 권역을 정비했다. 사적 323호이다. 윤관 장군은 함경도에 자주 출몰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아 국방을 견고히 했다.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른 파평 윤씨가 자랑하는 분이다. 묘역입구 코너에는 2008년에 세운 다소 생소한 비석이 있다. ‘파평 윤씨 청송 심씨 화해기념비’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이 곳 윤관 장군묘가 오래 되어 실전하니 이 묘역에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 심지원(沈之源)의 묘를 쓴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조선에 대단한 두가문의 400년 산송(山訟:묘자리 다툼)이 시작됐다. 왕비를 4명 배출한 윤씨와 3명 배출한 심씨의 자존심 대결이니 임금의 명도 듣지를 않았다. 영조실록 40년(1763년) 6월조를 보면 양가 화해를 위해 나라에서 공동제사도 지내준다(命賜祭于高麗侍中尹瓘、故相臣沈之源之墓). 이 대단한 다툼을 끝낸 이는 양가문 대종회장이다. 박수를 보낸다. 가을해가 깊어가는 묘역 마당에는 늙은 농부내외가 벼를 말리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이 인간의 근본이다. 食者天下之本也라. 석양빛이 짙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703번 시내버스 시청앞, 서울역(YTN), 서대문, 이후 3호선길 버스정류장 탑승가능 답사코스 의주대로 버스로 (하차: 벽제역/ 고양동/ 혜음령/ 쌍불현(용미리 마애불/ 윤관장군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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