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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⑪]4대학 품어 인재 기르니 그 이름 ‘무악’이어라

연희궁터~봉원사~안산~충정로~약현성당~칠패시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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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7호 박현준⁄ 2012.06.04 11:20:55

서울에 걷기코스가 개발되면서 떠오른 길 중 하나가 안산(鞍山) 능선길이다. 흔히 무악(毋岳), 모악(母岳)으로도 불리고, 3호선 무악재역이 있어서 귀에 익숙해진 이름이다. 산길이 편안하고 걷기도 좋아 트래킹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필자는 어려서 이 무악의 남녘 품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찌 보면 나의 모산(母山)인 셈이다. 잊고 살다가 요즈음 가끔씩 들리는데 이 산 주변 이야깃거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90이 넘으신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연세대학교를 ‘연희전문’이라 부르신다. 반세기도 전에 대학교가 되고 세브란스와 합쳐 연세대학교가 되었건만 당신이 꽃답던 처녀 시절, 멋지게 보이던 연희전문 학생들이 떠올라서 그러신가도 모르겠다. 연세대 정문 앞에 선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백양로와 주변에 자리잡은 학교 건물들이 정갈하다. 교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학교 배치도가 있고 잔디밭 앞쪽에는 연희궁, 서잠실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연희궁(衍禧宮, 문종 이후에는 延禧宮으로도 표기함), 익숙지 않은 궁궐의 이름이다. 궁궐에는 정궁(正宮, 法宮)과 별궁(別宮)이 있다. 정궁은 임금의 본가에 해당하고, 별궁은 이궁(離宮)이나 행궁(行宮)을 흔히 일컫는 말이다. 연희궁은 세종 2년(1420년)에 서별궁(西別宮)으로 낙성되어 세종 7년(1425년)에 연희궁(衍喜宮)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아예 이곳으로 옮겨오기도(移御) 했으니 세자와 백관들이 어가를 따랐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임금이 이곳에 머무실 때마다 세자가 문안인사 했다는 기록이 있다(世子朝衍喜宮). 조선 잠업의 초기는 강남 잠실이 아니라 세종이 국립잠업연구소 세운 연희궁 일대 세종은 이곳에 국립잠업연구소에 해당하는 잠실도감(蠶室都監)을 설치해 조선 잠업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지금이야 잠실과 잠원동이 조선 잠업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지만 조선 초기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동잠실이 낙천정(樂天亭: 자양동 강변북로 쪽)과 아차산에 자리잡고, 아마도 신잠실이 잠원동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섬유산업이나 패션 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마음에 새겨둘 만한 곳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 지역에는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의 채마밭(菜園)도 있었다. 대야평(大野坪, 땟굴)이라 불리던 지역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궁궐지(宮闕志)에는 정종이 아우 방원에게 양위한 후 연희궁에 머물렀다 한다. 그렇다면 정식 이궁이 되기 전부터 이곳에는 상왕(上王)이 거처할 만한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연희궁이 불행을 맞기 시작한 것은 연산군(燕山君) 시절이었다. 풍류 좋아하는 연산군은 연희궁을 놀이터로 바꾸고 지금의 연희동, 신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을 비롯한 고양군 일대에서 사냥을 즐겼다. 그런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 귀양길에 올랐을 때 이곳에서 하룻밤 유(留)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니 이 곳 연희궁은 연산군과도 인연이 깊다. 연산군 이후 연희궁은 이궁으로서 기능을 잃은 것 같다. 그 뒤 영조 40년(1764년)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이씨(暎嬪李氏)가 세상을 떠나자 연희궁 남쪽 기슭(南麓)에 장사지내고 연희궁의 석재를 사용한다. 이때는 이미 연희궁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영빈이씨의 묘소는 수경원(綏慶園)인데 현재 연세대 박물관 건물의 동쪽에 해당된다. 1969년 수경원은 서오릉(西五陵)으로 천장(遷葬)하고 정자각만 남아 있다. 봉문이 있던 자리에는 채플(루스채플)이 현대적 감각으로 서 있다. 무언가 애련하다. 영조가 사랑하던 여인, 그리고 정조, 순조, 헌종, 철종에게 당신의 유전자를 전한 여인인데…. 정자각 앞 잔디밭에는 석물들이 남아 있고, 정자각 안은 전시공간으로 영빈의 묘지석과 명기(明器)가 전시돼 있다. 우측으로는 광혜원(廣惠院)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1885년 재동 홍영식의 집에 선교의사 알렌이 문을 열었던 서양식 왕립병원으로서 세브란스병원의 전신(前身)이다. 실물이 없어져 남아 있던 사진 한 장을 본(本)삼아 지은 건물이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과,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가 나란히 걸린 봉원사 이제 백양로를 따라 캠퍼스 깊숙이 들어간다. 예전 백양(白楊)나무 길은 이제 은행나무길이 되었다. 정면 언더우드관 광장에 이르기 전 좌측 언덕을 보자. 윤동주 시인의 학생 기숙사였던 핀슨관 앞 언덕에는 윤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여학생 둘이 시비 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서시를 읽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캠퍼스 안 어딘가에는 또 하나 중요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름 반야사(般若寺). 태고종 총본산인 봉원사(奉元寺)의 전신이 반야사라 한다.

진성여왕 3년(889년)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공민왕 때 태고 보우국사가 중창한 후 금화사(金華寺)라 하였으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 般若庵)이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고, 효종 2년(1651년)에는 화재를 당하기도 했는데 영조 24년(1748년)에 임금께서 지금의 봉원사 자리 땅을 하사하여 절을 이건하였고, 대웅전 현판도 친히 하사(下賜)하였다 한다(지금은 화재로 소실됐다). 요즈음도 이 지역 사람들은 봉원사를 ‘새절’이라 부른다. 필자도 어릴 적에 새절에 놀러 다닐 때면 “새절이라면 헌절이 있을텐데 헌절은 어디 있을까” 궁금해 했었다. ‘헌절’, 연세대 어딘가에 남아 있었을 기와편과 석축은 학교건물 아래 모두 묻혀 버린 것일까? 문득 반야사의 옛터가 그리워지는구나. 이제 구내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른다. 언더우드관 우측 길로 100여m쯤 오르면 길은 둘로 갈린다. 동문길과 북문길이다. 북문길로 가자. 잠시 후 우측으로 산능선길이 보인다.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산길로 접어든다. 이 능선길은 안산에서 내려와 연세대의 서쪽을 끼고(西白虎) 연희고개를 넘어 동교동고개 지나 와우산을 솟아오르게 한 주능선길이다. 또한 수경원의 산줄기 맥(脈)이어서 한 때는 이 능선의 고갯길을 넘어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발길에 산이 깎여 나가면 기운이 끊긴다는 풍수적 발상이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벌(罰)고개라는 말도 전해진다. 잠시 능선을 오르다 보면 용강면(龍江面) 경계를 알리는 돌 말뚝이 서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우리 땅 행정구역을 재편성했는데 이 때 용산과 서강 사이를 용산의 용(龍), 서강의 강(江) 자를 따 용강면이라 하였다. 지금의 마포와 신촌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 말뚝은 아마도 용강면과 은평면(恩平面)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리라. 평이한 능선길을 오르면 안산 정상을 향하는 좌측길과 봉원사로 가는 우측길로 나누어진다. 우측 봉원사 길로 접어든다. 1km 정도 갔을까, 봉원사의 기와지붕들이 숲 사이로 보인다. 태고종 본산으로 소중한 유산들이 많은 절이다. 우리 시대의 최고 금어(金魚: 단청, 불화)였던 만봉스님의 맥과 유네스코 문화유산 범폐, 영산재가 전승되어 오는 곳이다. 전각들이나 편액(片額)도 소중한 물건이 많다. 삼봉 정도전의 글씨로 전해지는 명부전(冥府殿) 편액(추사의 글씨라고도 한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 추사의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瑚碧樓) 편액, 명부전 주련에 써내려간 이완용의 글씨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 부엌문에 그린 만봉스님의 신장도…. 그러나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전각은 극락전(極樂殿)이다. 유리 장지문처럼 문을 달았는데 그 문에 새긴 민화풍(民畵風) 목각을 만나면 언제나 내 마음은 봄이다. 그 꽃나무들. 또 하나 사연이 남겨진 건물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자리잡은 대방(大房, 念佛堂)이다. 밖으로는 봉원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안으로는 추사와 옹방강의 편액이 있으며 철원군 소재 보개사(심원사)에서 모셔 온 아담한 아미타불이 넓은 방에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1966~1967년 사이에 마포 염리동 동도고 자리에 있던 아소정(我笑亭)을 이건한 것이다.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는데 지금도 공덕동 로터리 롯데빌딩 앞에는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는 금표(禁標)가 남아 있다. 1800년대 후기 이 절에는 개화파 이동인(李東仁)이란 스님이 있었다. 일찍이 일본에 밀항해 메이지유신에 느낀 바 있어 조선에 돌아온 후 개화사상을 고취하여 젊은 개화 청년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승려다.

당연히 수구적인 대원군에게는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개화파에다가 일본과 가까웠으니. 1881년 총포와 군함 등을 구입하는 일로 일본으로 떠나는 임무를 맡았는데 출발 며칠 전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영영 사라졌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원군을 의심하였다 한다. 아소정이 헐려 봉원사로 옮겨 왔을 때 이때의 일을 아는 이들은 이동인과 대원군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들이 왕 되기를 바란 흥선대원군은 절을 사 불태우고 그 명당에 아버지 묘소를 옮기니 이곳에는 또 하나 대원군과 관련있는 물건이 있다. 대웅전의 조그만 범종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원래 힘없는 종친이었다. 후사가 없는 철종의 뒤를 이어, 자신의 아들로써 왕통을 잇고 싶어 하였다. 풍수에 따라 충남 덕산 가야사를 매입해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이장했다. 그때 가야사에 있던 법종이 지금 봉원사 대웅전에 남아 있는 것이다. 1908년에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됐다는 유서 깊은 안내석을 읽으며 안산으로 향한다. 인왕산 줄기가 무악재를 건너 일으킨 높이 296m의 나지막한 산이다. 두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동봉은 서쪽으로 고양군 소질달산에 응하고 남으로 목멱산(남산) 제3봉에 응한다(東峰 西應 高陽郡 所叱達山 南應 木覓山 第三峰)’고 했으며, ‘서봉은 서쪽으로 고양군 봉현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4봉에 응한다(西峰 西應 高陽郡 烽峴 南應 木覓山 第四峰)’고 했다. 소질달산은 고양시 강매동에 제2 자유로 곁에 있는 96m 높이의 봉대산이며, 봉현은 서오릉 앞 봉산(烽山)으로 두 산 모두 시민들의 트레킹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무악 동봉에는 봉수대를 복원해 놓았다. 그런데 세종실록(29년 1447년)에 정해진 봉화대 축조 원칙에는 맞지 않는다. 여러 곳에 복원된 봉화대를 보면 수원화성 봉화대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어찌 궁성의 봉화대와 산꼭대기 봉화대가 같겠는가.

안산 정상에서는 서울의 산 모습, 도시의 모습이 걸림 없이 조망된다. 문득 태조 때 천도(遷都) 문제로 많은 토론이 있었던 그 시대가 생각난다. 하륜은 서울을 안산을 주산으로 지금의 연대, 이대를 포함한 신촌 마포 지역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지리신법(地理新法)이라는 새로운 풍수이론에 따른 소위 신개념의 제안이었다. 결국은 태조가 직접 안산에 올라 살펴 본 후 백악산 아래로 도읍을 정했다. 이때의 논쟁이 태조3년 실록 곳곳에 전해진다. 이제 안산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신록이 우거지고 아카시아 꽃이 져서 길을 메운다. 금화터널 위를 지나자 우측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있다. 안산의 산줄기는 우로 뻗어 연세대를 품고 와우산을 일으켜 홍익대를 감싼다. 좌로 뻗어서는 이화여대를 품고 대현(大峴)을 넘어 노고산을 일으키면서 서강대를 감싼다. 실로 그 품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어머니와 같은 품이다. 이 품 안에 초-중-고등학교는 얼마나 또 많은가? 잠시 후 ‘능안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우측 아래 마을 북아현동 중앙여고(추계예대)에는 왕자의 무덤이 있었다. 영빈이씨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큰 아들인 의소세손이 나이 3살에 요절하자 이곳에 장사지내고 의녕원(懿寧園)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를 서삼릉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체육부 학생들이 생활관으로 사용하는 작은 부속건물만 남아 있다. 다행히 이름은 남아 그 안쪽 동네를 지금도 능안(陵안)이라 부른다. ‘애기릉’이라 불렀기에 그런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도령과 흥부제비가 겅중겅중 뛰던 흥겨운 칠패거리는 어디로 갔는가 능선이 끝날 즈음 길은 좌측 층계로 뜨란채 아파트 앞으로 내려간다. 이 아파트 남쪽 끝에서 직진하지 말고 우측 내리막 비탈길로 내려가자. 비탈길이 끝날 즈음 전형적 서민들의 거리인 5거리가 나오는데 앞으로 보이는 굳모닝할인마트를 우로 끼고 골목길로 들어선다. 충정로로 가는 길이다.

골목길 끝으로 충현동 자치회관이 나오면 다시 그 골목길로 들어서자. 이 골목 주변이 예전 놋갓(鍮器)공방 골목이다. 서울에는 지역별로 특산품이 있었다. 누각골 쌈지장수, 자문밖 화초장수, 아현 놋갓장수, 잔다리 게장수…. 얼마 전까지 유기골목을 알리던 표지판도 재개발에 밀려 없어졌다. 곧 서대문 큰길을 만나면 우측으로 잠시 가 건널목을 건넌다. 앞쪽으로 충정아파트가 보인다. 82년이나 된 아파트계의 산증인이라 한다. 도요다(豊田)아파트가 본래 이름이라니 신기하기도 하다. 그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50년 전 옛 골목인 듯 느껴지는데 먹거리도 많다. 작년까지 있었던 ‘이명래고약’ 집은 건물이 헐리고 음식점이 들어섰다. 100년 가까이 이 나라 부스럼을 낫게 해 주던 고약의 산실이 또 이렇게 사라져 갔다. 골목길을 나가 2호선 충정로역사를 통해 길을 건넌다. 재래시장 뒤편에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다. 1892년 최초로 세워진 붉은 벽돌 성당건물이다. 명동성당은 1898년 세워졌다 한다. 저녁해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신비롭다. 저녁 미사 성가가 울려 나온다. 그 소리가 좋아 벤치에 오래 앉아 있는다. 이제 성당을 내려와 길을 건넌다. 서소문 공원에는 신유년(1801년), 기해년(1839년), 병인년(1866년) 순교한 98위의 순교자를 현양한 비(碑)가 서 있다. 이 중 44인은 성인품을 받았다. 과수댁도 많고 궁인들도 많고 부인들도 많다. 염천교를 건너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려 한다. 칠패시장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연세봉래빌딩 앞에 서 있다. 조선시대에 육의전(시전), 배오개시장(梨峴: 현 광장시장, 동대문시장), 칠패시장(七牌시장: 남대문밖, 서소문밖, 남대문 시장의 원조) 중 어물전이 유명했던 활기 넘치는 시장이었다. 한양가에는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며 도미 준치 고도어며 낙지 소라 오적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이렇게 너스레를 떨고, 춘향가에는 이 도령이 장원급제 하여 남원으로 내닫는데 휘몰이 장단으로 몰아친다. ‘남대문밖 썩 내달아 칠패, 팔패, 청파, 배다리 지나 애오개를 넘었구나.’ 어디 그뿐이랴, 칠패를 내달은 것이 또 있으니 보은의 박씨를 잎에 문 제비였다. ‘저 제비 거동 보소, 보은표 박씨를 잎에다 가로 물고 남대문밖 칠패거리 팔패 배다리 청패 애오개 넘어~~.’ 이렇게 신나는 거리가 칠패였건만 이제는 약현성당 앞 몇몇 가게 말고는 칠패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것은 다 수명이 있는가 보다. 다행히 남대문 시장이 번성하고 있으니 칠패의 새 모습이라고 위안을 삼아 볼까.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연세대행 버스 / 2호선 신촌역 / 경의선 신촌역 걷기 코스 연세대 정문 ~ 연희궁터/수경원터/광혜원 ~ 윤동주 시비 ~ 능선길(용강면 돌말뚝) ~ 봉원사 ~ 안산 ~ 능안정 ~ 뜨란채아파트 ~ 충정아파트 뒷길 ~ 약현성당 ~ 서소문공원 ~ 칠패시장터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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