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에서 들려오는 소식 중 하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알 만한 대기업들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옷을 갖추어 입고 여름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대기업들은 사옥이나 로비 공간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를 반겨야 할 미술 동네가 잠잠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일부 성미 급한 사람들은 재벌가에서 다시 미술품을 구입하려는 조짐 아니겠느냐면서 기대한다. 이런 반응의 저변에는 지금까지 대기업이나 기업 오너 일가가 직접 미술관을 세우고, 갤러리를 만들어왔지만 미술동네에 기여한 바는 그리 없었다는 기억이 깔려 있다. 기업이나 기업가가 미술품에 주목한 것은 미술품의 고색(古色, look of age) 때문이기도 했다. 미술품이란 신분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인 동시에, 신분을 과시하거나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준다. 물론 기업이나 기업가들의 자선이나 봉사 또는 문화예술에 대한 기여나 지원은 순수한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도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후원이란 사적인 이익을 공공의 이익이라는 주장으로 가리려 선택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짝퉁? 물론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마케팅 방법과 기업의 이윤추구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화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의 기업들이 보이는 문화마케팅이라는 이름의 활동들은 명분 없이 단순하게 ‘너도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이 많다. 백화점 매장 구석에 갤러리를 개설하고, 자사 제품에 명화를 인쇄하고, 광고에 유명 미술관 소장품을 도입한다고 해서 문화적 또는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매우 천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자신의 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사옥 일부, 또는 사무용도의 건물을 개조해 전시장을 마련하고 문화 예술에 엄청 기여한 듯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이들 전시장은 거개가 미술품을 전시할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할론(Halon)이나 그 대체재인 NAFA-Ⅲ를 사용하는 방화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또 작품의 보존을 위한 기본적인 항온항습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조명도 작품의 재질에 따라 달라져야 하며 UV코팅이 된 조명기구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미술관이던 소장기능이 없는 전시장이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전시에 필요한 작품이 도착하면 새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임시 수장고도 필수적이다. 향후 국제적인 교류를 위해서라면 이런 시설은 더욱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시설을 갖춘 곳은 얼마나 될까. 소속원들에게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권하고 혁신을 외치면서 세계 일류 기업을 외치지만 자신들의 문화 예술 활동은 여전히 ‘족보 사서 양반 흉내 내는 수준’이다. 아마추어는 위대(?)하다 기본적인 시설이나 규모도 문제지만 기업들이 설립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전시관은 대개 기본적인 운영인력 또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대내외적인 책임자이자 최종 결정권자는 그 분야에서 아마추어인 오너 또는 오너의 부인인 사모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모님의 전공이 미술 분야인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미술사적인 지식이나 미술에 대한 이해는 30~4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고, 거개가 실기 전공자들이란 점에서 프로라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전문 인력들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전문성이 아마추어인 오너나 사모님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
문화와 예술이란 그렇게 아마추어 손에서 놀아나고 결정될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다. 고도의 미술사적인 지식과 철학, 미학이 필요하다. 또 현대미술을 다룬다면 문화인류학, 문화사회학, 문화심리학적인 판단과 지식이 추가로 필요하다.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회사는 주주들의 것이지 대주주 또는 오너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익법인, 장학재단, 문화재단 중 개인 재산을 출연한 것은 극소수이다. 대개는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들이 출자한 것들이다. 대주주는 물론 친인척들의 사재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은 재단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취미활동과 고풍을 강화하기 위해 재단을 지배하고 활용한다. 한국의 기업오너들은 대부분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취미와 기호 아니면 친분관계, 학연, 지연, 유명세를 중심으로 작품의 구입과 전시 등을 결정한다. 미술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만만하게 취급한다. 더욱 빛나는 작은 기업의 큰 미술관 사실 묵은지와 겉절이는 재료부터 다르다. 신선해 입맛을 돋우는 것은 겉절이지만 깊은 맛은 묵은지의 그것에 당하지 못한다. 묵은지처럼 문화예술을 통한 기업의 사회적 기여는 단기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인내심과 재정적 지구력을 필요로 한다. 기업 미술관이 시류에 따라 문화예술 지원을 고려한다면 철회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사적인 기회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회사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을 구입하는 일은 공금 횡령에 속하는 일이다. 오너나 오너 일가가 자신들의 개인 재산은 출연하지 않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 될 노릇이다. 문화란 누가 소유하던 간에 시민의 것, 국민의 것이며 민족의 것이자 인류의 것이다. 그런데 회사 돈으로 미술품을 사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자신의 밀폐된 공간에 걸어놓고 혼자 즐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 될 노릇이다. 후발주자들이 배워야 할 미술관, 박물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림동에 본관을 두고 얼마 전 강남구 신사동에 분관을 마련한 호림박물관이나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하고 요즘 증축과 보수 공사가 한창인 화정박물관이 그것이다. 호림박물관은 1982년 현 성보화학, 과거 서울농약의 창립자인 개성상인 윤장섭 선생이 설립한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3천여 점의 토기와 4천여 점의 도자기, 고려불화와 조선시대의 그림과 글씨 2천여 점 등 모두 1만여 작품을 소장한 미술박물관이다. 이 중 44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꾸준히 중요 미술품을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연구 결과를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정박물관은 농약회사였던 한국삼공을 세웠으며, 한국베링거인겔하임 제약의 명예회장인 한광호 선생이 설립했다. 서울 종로3가 화공약품 원료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그는 티베트 불교의 정수인 탕가 수집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세계적인 탕가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지난 50여 년 동안 동양의 미술품 2만 여 점을 구입했다. 이 두 미술관의 공통점은 소리 없이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서 수집품을 진정으로 사회와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자산 규모가 이들의 수 백 배에 달하는 대기업 미술관의 요즘 행태를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요즘 들어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지원한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문화적 부박함만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겉절이 재료로는 아무리 오래 묵혀도 묵은지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는 걸까. - 정준모 국민대 초빙교수,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