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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부패기업인’ 매도되자 삼성, 언론그룹 출범시켜

삼성전자 눈부신 성장…삼성자동차는 “손대면 성공” 신화에 상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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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1호 박현준⁄ 2012.07.02 20:17:02

이병철이 한비밀수 사건으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음에도 삼성의 약진이 계속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언론 사업에의 진출이었다. 1960년대 초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면서 이병철을 비롯한 대표 기업인들이 부패기업인으로 매도되는 데 대해 적극적 변호 내지는 자본주의 체제 옹호의 필요성도 있었던 것이다. 1963년 2월 11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같은 해 6월 25일에는 라디오서울방송을 잇달아 설립했다. 2년 후인 1965년 3월 5일에는 일간지 중앙일보까지 창간, 삼성은 산하에 TV, 라디오, 신문사를 거느린 종합 매스컴 체제를 구축했다. 신문용지 등의 안정적 공급 차원에서 1965년 10월에는 새한제지(한솔제지)를 인수했다. 새한제지는 1965년 전주 지방 유지들이 외자를 도입해 설립한 신설 회사로, 공장 건설 중인 1965년 자금난에 봉착했던 것이다. 삼성전자 설립 등 성공적인 사업다각화 추진 오늘날 삼성그룹의 위상을 확립한 또 하나의 사건은 1960년대 말에 착수한 전자산업이다. 장차 국민소득 신장에 따른 내구소비재 수요의 점증을 예상해 1968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던 것이다. 삼성전자의 출현에 금성사를 비롯한 선발 기업들의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언론도 국내적인 과잉 생산을 우려하며 기존 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TV. 라디오, 냉장고 등 생산품 중 극히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허가됐다.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가 조기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품질관리 및 부품생산 등 수직계열화를 통한 생산비 인하가 관건이었다. 이후 일본 NEC와 합작해 삼성NEC를 설립하는 등 공격경영에 매진한 결과, 1970년대에는 금성사와 쌍벽을 이루는 종합전자 메이커로 도약했다.

또한 삼성은 보험업도 강화했다. 삼성이 보험업에 진출한 것은 1958년 2월에 안국화재해상보험(삼성화재)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이 무렵은 수입대체 공업화에 힘입어 보험 산업이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1962년 11월에는 안보화재보험을 인수해 안국화재에 흡수시키는 한편 1962년 7월에 동방생명(삼성생명)을 인수해 종합보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기 삼성은 유통, 의료, 부동산개발 사업에도 진출하였는데 유통업 진출 계기는 동방생명의 인수 때문이었다. 삼성은 동방생명을 인수하면서 동양화재보험과 동화백화점을 한꺼번에 인수했고 1963년 11월에는 동화백화점을 (주)신세계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일본 미츠코시(三越)백화점이 1930년에 신축한 경성 지점으로 일제하에서는 박흥식이 경영하던 화신백화점, 명동 입구의 정자옥(롯데 영플라자)과 함께 국내 백화점 업계의 트로이카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적산(敵産) 기업으로 분류돼 정부에 귀속됐다. 6.25전쟁 후에 강영원이 인수해 경영하다가 1962년 동방생명에 인수됐다. 삼성은 1960년대 9개 업체를 새로 설립하고 8개 업체를 인수해 사업내용이 한층 다채로워졌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삼성전자, 동양방송, 중앙일보처럼 당시 설립한 기업들이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해 해당 시장에서 과점업체가 됐다는 점이다. 당시 인수한 기업들의 절대 다수도 시장지배적인 위치에 있어 삼성이 최대 재벌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도 삼성의 성장은 눈부셨다. 기존 사업 부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당시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전략에 편승, 1974년에는 삼성중공업과 삼성석유화학, 삼성반도체를 설립하고 1977년에는 호황 업종인 국내 건설 시장에 동참하기 위해 통일건설을 인수했을 뿐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를 겨냥, 삼성해외건설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78년에는 유명 해외건설업체인 신원개발을 인수, 합병했다. 조선업 진출을 목적으로 중견 조선소인 우진조선을 인수해 삼성조선으로 개명하고 정부의 자주국방 정책에도 주목해 방위사업체인 삼성정밀을 설립했다. 첨단산업인 정보통신에도 참여해 77년에는 삼성GTE통신까지 설립하는 등 1970년대 삼성은 종래의 사업 기반인 경공업을 중화학과 반도체, 정보통신, 서비스업 등으로 리스트럭처링 하는 구조조정기를 거쳤다. 재벌자본주의 완성과 정부의 재벌규제 시작 1980년대에 들어 삼성의 양적성장 활동은 현격히 둔화되는데 이는 내부요인보다는 외부요인에 의한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1960~70년대는 단군 이래 최대의 고도성장기였다. 정부의 강력한 압축성장 정책에 힘입어 양적 확대와 질적 고도화가 병행된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서 삼성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성장이 특히 두드러지는 등 일본식의 압축공업화 전략 성과가 가시화되었다. 즉 극소수 대기업 중심의 재벌자본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부터 정부는 재벌들의 확장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재벌들이 다른 회사 주식을 취득할 때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했다. 재벌들의 몸집 불리기 수단으로 사용돼왔던 계열사 간 상호출자도 금지됐다. 또한 1987년부터 30대 재벌에 대해서는 대출을 동결하는 등 여신규제도 병행했다. 그 결과 재벌들은 과거와 같은 활발한 다각화 작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은 종래의 계열사수 증대를 통한 다각화 정책을 지양하는 대신 계열사들의 몸집 불리기에 박차를 가한 나머지 주력 계열사들은 서서히 복합기업 형태로 전환했다. 이 같은 흐름은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매출액, 자본, 종업원 수 등의 급증으로 반증된다.

한편 그 와중에서도 삼성의 계열사 수 확대 작업은 계속됐는데 1981년 한국안전시스템(현 에스원)을 인수했다. 에스원은 종래 삼성그룹 시설의 경비용역을 전담하던 중소업체였으나 삼성그룹에 편입된 후부터 급속히 성장했다. 프로야구 시대가 개막되면서 1982년 삼성라이온즈를 설립했다. 삼성그룹 홍보를 제고할 목적이었다. 1983년 6월에는 삼성시계를 설립했다. 전자 시계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로서 삼성전자의 시너지 효과에 의해 파생된 업종이었다. 같은 해 6월 30일에는 국영 조선호텔을 인수했고 1983년에는 삼성반도체의 미국 현지법인 TRISTAR를 설립하였다. 1984년에는 제일제당이 미국의 유진텍과 합작해 유전공학 연구회사인 ETI를, 4월에는 삼성의료기기, 9월에는 세계적인 컴퓨터 메이커인 미국 휴렛팩커드와 합작해 삼성휴렛팩커드를 설립하였다. 1985년에는 삼성항공(삼성정밀을 개명)의 자회사로 미국에 삼성유나이티드항공을 설립하였는데 미국 공군의 전투기엔진 창정비사업을 전담하는 업체였다. 그해 5월에는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설립하였고 7월에는 제일제당이 동립산업을 인수하였다. 1987년에는 삼성중공업과 미국 클라크 사와 합작으로 삼성클라크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 다각화와 관련하여 또 다른 특징은 주요 계열사별로 부설연구소의 설립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삼성전자 부설 전자종합연구소의 설립 이래 80년대 내내 각 계열사별로 연구소 설립 붐이 조성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총 4600여 억 원을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특히 1986년의 기술개발투자액 2200억 원(시설투자 1631억 원)은 삼성의 제조회사들이 같은 해에 올린 매출액의 4%에 해당했는데, 이는 구제 제조업체의 평균치인 1.9%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삼성그룹이 1980년대에 연구개발투자에 주력했던 이유는 첫째, 정부 차원의 기술개발 정책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성장의 최대 관건이 기술개발임을 절감했던 정부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해당 기관별로 다수의 연구소를 설립하는 한편, 민간 기업들에게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종용하였던 것이다. 둘째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국내 기업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미래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이 주력하고 있던 반도체, 신소재, 메카트로닉스, 유전공학, 우주항공 등에 적극 진출하였다. 또한 기존에 확보한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서도 기술개발이 절실했다. 삼성, 한국 자본주의 상징으로 성공사례 남겨 1980년대 삼성그룹 다각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또 하나는 해외 현지법인 및 현지 공장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1978년 7월 삼성전자가 미국 내의 자사제품 판매 제고를 위하여 뉴욕에 Samsung Electronics American Inc.를 설립한 이래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외국진출이 활발했다. 원료 및 기술정보 확보 등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선진국들의 한국산 상품에 대한 규제 강화와 국내 경영 여건의 악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86년에 창업주 이병철이 사망하면서 경영대권이 3남인 이건희에 승계된 것인데, 이건희는 부친의 경영방식을 그대로 계승해 수성(守城)에 성공했다. 1980년대 삼성의 다각화는 기존 사업들의 시너지효과에 입각한 다각화 내지는 서비스업 강화가 특징이었다. 80년대는 삼성 다각화 작업의 심화기였던 것이다. 1997년에는 국내에 6.25전쟁 이래의 최대 국난(國難)으로 치부되던 외환위기가 엄습, 대우그룹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3분의 1 이상이 부도로 좌초되거나 해체되었다. 최대 재벌 현대그룹도 난기류에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과도할 정도의 차입경영과 무분별한 방만 경영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삼성에도 불똥이 떨어졌는데 대표적 사례가 삼성자동차였다. 기존 자동차업계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1994년에 삼성자동차를 설립하고 경남 창원공업단지 내에 대규모 완성차 조립공장을 건설했다. 일본 닛산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판매해 1998년부터 세단 승용차 ‘SM5’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편 삼성은 별도로 트럭 생산업체인 삼성상용차도 경영했다. 대형트럭 생산업체로 출발해 1998년에는 ‘야무진 SV110’ 모델의 1톤 트럭을 생산했으나 매출이 신통치 못해 시작부터 경영난에 직면했다. 외환위기는 설상가상이어서 마침내 생산설비 일체를 베트남에 넘겼다. 삼성자동차도 초기투자가 과도한 터에 설비 과잉으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2000년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로부터 5억6000만 달러를 받고 지분 70%와 경영권을 넘겼다. 상호도 르노삼성으로 변경되었다. 미증유의 유동성 위기는 2001년 8월 23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자금 195억 달러의 전액상환을 계기로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2만2000개 기업이 도산했으며 250만 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당시 흑자도산 기업 수만 7000여 곳이었으며 외환위기 광풍을 용케 피한 기업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내상을 입었다. 삼성이 손을 대면 어떤 것이던 성공한다는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반면에 삼성전자의 비약은 눈부셨다. 국내외의 숱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2000년대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글로벌 전자메이커로 도약한 것이다. 선두주자인 LG전자보다 무려 10여년이나 늦게 시작했음에도 단기간에 국내시장을 석권함은 물론, 세계무대에서도 소니, 필립스 등 세계 최강자들을 차례로 제치며 한국의 자존심으로 우뚝 섰다. 창업 이래 일관되게 지속한 경영이념인 ‘제일주의’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삼성의 성공사례는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이병철, 이건희 부자 2대에 걸친 ‘황제경영’, ‘돌다리경영’, ‘관리의 삼성’이 돋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삼성은 오늘날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 속의 삼성’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국내외 경쟁자들의 견제가 점증함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과거식의 타성 경영에 따른 비효율성이 누적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경영 시대에 삼성이 어떻게 부응할지 주목된다. 새한 이외엔 모두 재벌화 성공 1987년부터 시작된 삼성의 계열분리 역사 삼성의 계열사 분리작업은 1987년 11월 19일 창업자 이병철의 사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병철 사망 당일에 삼성그룹 경영권은 3남 이건희에 승계되었는데 계열분리가 본격화한 것은 1994년에 전주제지의 경영권이 장녀 이인희에 귀속되면서부터였다. 장남 이맹희는 제일제당을, 2남 이창희는 제일함섬을, 3녀 이명희는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의 경영권을 각각 확보했다.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 계열사들 중 가장 먼저 그룹을 형성한 사례는 한솔그룹이었다. 이인희는 전주제지를 한솔제지로 개명하고 1995년에 국내 10위권의 전기부품 생산업체인 한국마벨을 인수하는 등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한솔그룹을 형성했다. 한솔그룹은 1997년 당시 자산총액 4조3460억 원으로 재벌순위 16위에 랭크되었으나 외환위기 때 경영부진으로 사세가 다소 위축되었다.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은 제일제당을 모체로 1995년에 드림윅스SKG와 제일C&C, 제일신탁투자 등을 잇달아 설립해 그룹화를 도모, CJ그룹을 형성했다. CJ그룹은 2011년 현재 계열사 숫자 65개에 자산총액은 16조 3230억 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22위에 랭크되어 있다. 공기업 등을 제외한 순수 민간 기업집단 순위는 14위이다. 한편 CJ그룹은 2011년 11월 17일에는 국내 최대의 물류기업인 대한통운의 지분 37.6%를 1조 6605억 원에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부터 인수해 덩치를 키웠다. 삼성그룹은 2011년 6월 삼성SDS를 앞세워 대한통운 인수전에 참가했는데, 이때 “CJ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명희는 신세계백화점을 모체로 이마트를 국내 최대의 대형할인점 체인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신세계백화점그룹은 2011년에는 계열사 13개에 자산 총액 16조 400억 원을 기록,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24위에 랭크되었다. 공기업 등을 제외한 재벌 순위는 15위이다. 주목되는 것은 제일합섬이다. 2남 이창희는 형제들 중 가장 먼저 분가해 1967년에 새한미디어를 세웠으며 1973년에는 새한종합개발, 새한콘크리트 등을 묶어 새한미디어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1991년 혈액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장남 이재관이 그룹을 물려받으면서 1995년에 삼성그룹이 보유한 제일합섬(주식회사 새한)의 지분까지 넘겨받아 새한그룹으로 재발족했다. 과점기업인 데다 삼성의 후견 입고 고성장 경북 구미시 공단동 287에 위치한 (주)새한은 1972년에 삼성그룹 주력기업인 제일모직이 일본의 미쓰이, 도레이 등과 합자해서 제일합섬으로 설립되었다. 1974년 구미공장에 이어 1975년 경산공장을 완공하였다. 1977년 7월 기업을 공개하고 1985년 천연색필름 기술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1987년에는 감광수지도 개발하였다. 1989년에는 항균 방취 바이오엑셀과 사진감광제를 개발하였고, PPS컴파운딩 수지 국산화에도 성공하였다. 새한그룹은 학생복, 비디오테이프, 오디오테이프, 스판덱스를 주로 생산해서 1997년 당시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성장했으나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부실화되어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999년 이후 필름부문과 홈비디오 사업을 잇달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나 화섬 경기 악화와 새한미디어 등 계열사 지원 부담이 증가하여 2000년 6월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선정되었다. 그 와중인 2008년 1월에 웅진그룹이 (주)새한을 800억 원에 인수해서 웅진케미칼로 상호를 변경했다. 새한종합건설은 (주)새한에 합병된 후 그해 5월에 수(水)처리 사업을 분리해 웅진코웨이에 양도했다. 물류기업인 새한로직스(주)는 웅진로지스틱스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새한정보통신(주)은 웅진정보통신의 모체로 작용했다. 삼성의 파생 재벌들 중 새한그룹만 유일하게 사라진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호텔조선, 제일합섬, 제일제당, 전주제지 등은 오랜 기간 동안 기반을 착실히 다져온 과점기업이자 동시에 리더기업인 터에 국내 최대의 삼성그룹이 후견인 역할을 하는 상황이어서 한솔, CJ, 신세계백화점그룹은 비교적 용이하게 신흥재벌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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