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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18] 부처골~공릉천~송강마을~월산대군묘역

송강의 그녀 자미, 연산군에 당했다는 승평부부인…아픈 사랑의 자취 만나는 고양 가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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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6호 박현준⁄ 2012.10.15 13:39:11

가을이 왔다. 산색(山色)도 변해가고 억새와 갈대도 꽃을 피워 바람에 날린다. 가볍게 산길도 걷고 작은 강만큼 탁 트인 개울 길을 걸어 옛절터를 찾아 가는 길, 거기에서 아픈 사랑의 자취도 만나고 역사의 정(情)없음도 확인하는 길, 오늘은 그 길로 떠나 본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나 4번 출구로 나서면 금촌 방향으로 가는 버스노선이 셀 수 없이 많다(100, 30, 31, 59, 55-1, 760, 9709, 9080…). 이들 버스를 환승하여 관산동(官山洞) 주공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린다. 1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관산동은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반농반도(半農半都: 농촌 반 도시 반) 지역인데 예전에는 고양(高陽)군의 관아(官衙)가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지역이 오래 전에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기에 환경이 비교적 옛것대로 많이 남아 있어 어느 길을 걸어도 둘레길(누리길)이 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골목길 차도 앞으로 고양외고를 만난다. 이 골목길 차도가 오늘의 출발점이다. 한산한 차도로 100여m 들어가면 좌측으로 신미산 오르는 산책길이 나타나는데 청주 한씨(韓氏) 묘역 표지판이 있다. 길 앞쪽으로는 휴먼시아(Humansia) 로고가 붙는 아파트 단지가 우뚝 서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경덕재, 용화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오늘 갈 길을 인도한다. 이 길로 들어서 잠시 100여m 지점에 경덕재(景德齋)라 쓴 규모 있는 재실(齋室, 齋宮) 건물을 만난다. 안내 비(碑)를 세워 놓았는데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 강회중(姜淮仲) 선생의 재실이다. 선생은 진주 강씨로 여말(麗末)에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셨다 한다. 묘소도 바로 이곳 시묘골(侍墓골)에 모셔져 있다. 풍수 하는 이들이 간산(看山)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한데 돌아가신 지 600년이나 되는데 이 정도의 묘역이나 재실을 유지할 수 있는 후손을 가지신 걸 보면 길지(吉地)인 모양이다.

옛것 많이 남은 옛 고양군 관아 길 경덕재를 지나 잠시 오르면 앞쪽으로 산(신미산, 장령산) 품에 삼태기처럼 안긴 넓은 경작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부처골이다. 예전에는 산 밑으로 절이 자리잡고 있었고 절이 무너져 내린 뒤에도 부처는 남아 그 절터를 지켰다 한다. 이제는 옛절의 이름을 아는 이 없고 골자기를 지키던 부처도 사라져 부처골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근년에 인연 있는 어느 스님이 옛절터 자리에 비닐하우스 요사채를 앉히고 산 중턱에 금당을 앉혀 용화사(龍華寺)라는 도량(道場)을 일구었다. 대웅전 주련(柱聯: 기둥에 건 글씨)을 한글로 써 친근감이 든다.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하니….’ 골자기 이름처럼 그리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절 뒷산 장령산으로 오른다. 200~300m 잠시 오르면 장령산이다. 좌우로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산들이 신미산, 가장산, 메조산, 대자산 등인데 산길 걷는 이들에게는 종주길이 되고 라이딩 하는 이들에게는 일산의 뒤쪽 산들까지 연결되는 긴 코스가 된다. 오늘은 서쪽 신미산 방향으로 나아간다. 산이라고는 하여도 마을 뒤 나지막한 능선길이라서 휘파람 불며 걸을 만하다. 장령산에서 신미산(143m)까지 능선길 600m, 신미산에서 고양외고까지 능선길 1000m이다. 고양외고를 중심으로 원점회귀 하는 데는 2km를 조금 넘는 길이다. 이제 외고 앞 건널목을 건너면 앞쪽으로는 관산동주민센터가 있다. 통일로 길이라서 차도 번잡하고 소음도 크다. 빨리 골목길로 접어들자. 골목길로 잠시 내려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넓고 넓은 개울이 나타난다. 자연하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물은 맑고 개울가 둔덕에는 온갖 풀과 꽃들이 제 맘껏 피어 있다. 이 개울이 북한산의 뒤쪽 송추계곡, 장흥계곡에서 발원하여 고양과 파주를 흘러 오두산 전망대 앞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공릉천(恭陵川)이다. 봉일천에는 사람들에게 낯선 세 능(陵)이 있다. 파주삼릉이라 부르는 공순영(恭順永)릉이다. 공릉은 한명회의 딸로 예종비가 되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장순왕후 능이며, 순릉은 장순왕후의 동생으로 성종의 비가 되었다가 역시나 일찍 세상을 떠난 공혜왕후의 능이고, 영릉은 영조의 아들로 왕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추존: 진종) 내외의 능이다. 개울이 이 능으로부터 머지않은 곳을 흐르니 이 능의 이름을 따서 공릉천(恭陵川)이라 하였다(본래 이 개천은 恭陵川, 深川, 峰日川이었는데 일제 때 曲陵川으로 오기된 것을 바로 잡았다).

‘왕릉 물길’을 일제는 ‘구부러진 능 물길’로 왜곡했으니… 들풀, 들꽃, 억새가 흐드러진다. 멀리 북한산의 준봉들이 보인다. 서울 방향 1km여 걸으면 통일로 변으로 필리핀군 참전기념탑이 보인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고양송강누리길임을 알리고 있다. 최영 장군 묘소방향 2.25km, 송강마을 2.11km. 송강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개울가 넓은 운동장을 지나면 바둑껌처럼 잘 다듬어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게 된다. 징검다리 건너며 멀리 바라보는 북한산의 뒷모습은 늠름도 하다. 개울을 끼고 흙길을 걸어도 좋고, 메타세콰이어 줄지어 서 있는 둑방길을 걸어도 좋다. 길지는 않아도 언젠가 센스있게 심어 놓은 메타세콰이어 둑방길은 사진 한 장 남기기에 손색이 없다. 서울 가까이에서 이처럼 괜찮은 길은 흔치 않을 것이다. 잠시 농막들을 지나면 넓은 잔디밭에 숙영도 할 수 있고 바비큐도 해 먹도록 한 레저형 업소가 있다. 이곳이 끝나는 곳, 개울물이 고이도록 한 보(洑)를 만나고 뒤쪽으로는 철길이 지나는 다리가 있다. 이곳에 무슨 철길이 있는 것일까? 잊힌 철길 교외선(郊外線)이다. 우리들의 젊은 날, 이 기차를 타고 일영, 장흥, 송추로 아베크를 떠났었다. 그 날 예쁘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에 살고 있을까? 철길은 녹슬고 주변에는 들국화가 보랏빛 얼굴을 부끄러운 듯 들고 있다. 어쩌다 한 번 지나는 화물열차만 아직 남아 있다 한다. 물 막아 놓은 송강보(松江洑)에는 영감님 한 분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뭐 좀 잡으셨습니까?” “없어요오” 무심(無心)을 담은 답변이 돌아온다. 철길 아래를 지나면 우측에 실개천과 만나는데 능골천이다. 이 개울이 시작되는 안마을이 능골이다. 월산대군의 큰 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개울길로 잠시 들어가면 큰길 39번 국도를 만난다. 벽제에서 원당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도로변 작은 쉼터에 송강 정철(松江 鄭撤) 선생의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의 글씨는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선생이 쓰셨다. 송강의 약력과 대표작을 소개하는 몇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이 송강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시비가 서 있는 것일까? 시비가 서 있는 안쪽 마을이 송강(松江)마을이다. 시비 안쪽으로 마당이 넓은 감나무집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 옆 골목 안 마을이 송강마을이다. 마을에는 송강문학관(松江文學館)이 자리잡고 있고 그 뒤로는 송강 집안의 선영(先塋)이 있다. 묘로 올라가는 길은 마을길을 걸어서 송강고개 방향으로 100m쯤 올라 우측 임도 같은 묘소 길로 들어서면 된다. 송강이 사랑한 꽃 ‘자미’가 피고지기까지 이곳에는 송강의 부모님 묘, 장자 묘, 장손 묘, 셋째형님 황(滉)과 선조의 후궁인 따님 정귀인 묘도 자리잡고 있다. 송강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곳에서 6년 가까운 시간을 지내면서 묘소를 살폈고 송강 자신도 1593년부터 1665년까지 60여 년간 이곳에 묻혀 있었다. 그 뒤 선생의 후손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잡아 준 진천 땅으로 이장하였다. 이곳에 계실 때 그의 문인 석주 권필(石州 權韠)이 지나며 읊은 시 한 수가전해진다. 송강 묘를 지나는 감회(過鄭松江墓有感)라는 칠언절구이다. ‘빈 산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대감의 풍류는 이리도 적막하군요(空山落木雨蕭蕭 相國風流此寂寥)….’ 비 내리는 가을 날 떠난 이의 무덤이 어찌 적요하지 않았으리요.

묘역에 들어서는 입구 가까운 길 위에 강아(江娥) 묘라는 묘가 있다. 묘도 가다듬고 비석도 새로 세웠다. 비석 뒷면 음기(陰記)에 의하면 송강이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그를 사랑한 남원의 동기(童妓) 자미(紫薇)가 있었다 한다. 송강이 자미를 사랑하자 사람들은 송강의 강(江)자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는데 송강 선생의 사랑스런 여자라고나 할까. 송강이 도승지를 제수 받고 서울로 떠나며 지어주었다는 시(詩)가 적혀 있다. <자미화를 노래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니. <詠紫薇花> 一園春色紫薇花 纔看佳人勝玉釵 莫向長安樓上望 滿街爭是戀芳華 선생은 당신이 챙겨주지도 않고 서울로 떠나면서 다른 남정네들이 넘겨볼세라 질투하고 계신 것일까. 그 뒤 강아는 어찌 되었을까? 선생을 찾아 강계로 길 떠났다가 조국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고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유혹, 주요 정보를 빼내어 평양성을 탈환케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머리 깎고 소심보살(素心)로 입산수도 하다가 선생이 돌아가시니 송강마을 선생의 묘소 곁에서 일생을 지냈다 한다. 정사(正史)에 있는 내용은 아니고 월탄 박종화 선생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 있는 내용이라 한다. 묘역을 나와 송강고개로 오른다. 고갯마루에는 좌측(서쪽) 산으로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임도가 잘 뚫려 있다. 10분 남짓 오르면 나지막한 산 정상에 이른다. 송강마을과 능골의 주산이 되는 121m의 매봉산이다. 다시 10분 남짓 산을 내려오면 신원동에서 올라오는 고갯길을 만나는데 앞쪽으로 ‘월산대군사당’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안내판이 초라하게 서 있다. 안쪽 공터 좌측 아래쪽에 맞배지붕의 조그마한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이 월산대군의 사당이다.

31세 연산군이 52세 승평부부인을 잉태시켰다는 음험한 네거티브 월산대군(月山大君), 그는 누구인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는 쿠데타 동지라 할 수 있는 정희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의경세자이며 둘째가 해양대군이었다.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자 둘째 해양대군이 세자를 이어 받고 19세에 왕위에 올라 예종이 되었다. 그 후 1년여 만에 예종 역시 서거하니 왕위를 잇는 일이 문제였다. 이 때 예종에게는 4살짜리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고, 돌아가신 형님 의경세자에게는 16살의 월산군, 13살의 자을산군이 있었다.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르면 4살짜리 제안대군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제안대군도 월산군도 아닌 서열 3순위의 자을산군이 왕위를 이어 성종이 되었다. 세조는 어린 예종을 보좌할 목적으로 원로대신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원상제(院相制)라는 것을 두었는데 이때의 원로대신은 신숙주, 구치관, 한명회 등이었다. 성종은 한명회의 사위였던 것이다. 실록에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그렇게 결단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뭔가 석연치 않다. 후순위의 후보자가 왕이 되면 선순위 후보자들은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 법도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쩍은 일을 벌이면 어느 새 역모로 몰리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었다. 다행히 성종은 형님 월산대군과 조카 제안대군에게 마음 써 주었고 두 대군도 알아서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순위에서 밀린 이들은 자연을 벗 삼고 풍월을 읊으며 사는 것이 본인의 본분이었다. 월산대군의 사저는 정(릉)동, 지금의 덕수궁 자리였는데 성종은 안국방(안국동)에도 사저를 하사하고 풍월(風月)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자에 편액(片額)토록 하기도 했다. 또 달리 대군이 찾은 곳은 고양 북촌(지금의 신원초등학교 앞)에 마련하고 자주 찾은 별서(別墅: 농막)였다.

이렇게 살던 대군이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후에 인수대비) 시약(侍藥)에 과로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별서의 서쪽에 장사지냈다. (임사홍이 쓴 신도비문: 卜葬地得於高陽別墅之西) 대군의 사당은 지금의 이 자리에 세웠는데 현재와 같은 규모는 영조 때 이루어진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역 소녕원(昭寧園)을 찾는 길에 쇄락한 묘역을 보고 누구의 묘역인가를 물었다. 월산대군의 묘역임을 알게 된 영조는 후손을 찾았는데 후손은 빈한하게 홍주(洪州: 홍성)에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종손이 홍주로 내려가 대군의 사당을 보살피는데 비바람을 피할 수 없다 합니다(宗孫則淪落洪州地 奉大君祠宇而不蔽風雨云也).’ 영조는 자금을 지원하여 사당을 바로 세우고 후손이 봉사(奉祀)케 하였으며 석광사(錫光祠)로 편액토록 하였다. 그런데 사당 기둥 초석에 필요 없이 다듬어 낸 정(釘) 자국이 보인다. 어딘가에 사용했던 초석을 다시 가져다 쓴 흔적인 것이다. 그 해답은 성종실록 21년조(1490년) 기록에 실마리가 있다. 지아비 월산대군 이정(李婷)이 죽자 불심 깊은 부인 박씨는 재궁(齋宮)의 성격을 갖는 자그마한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유교 국가 조선의 신료들은 여러 방법으로 이를 저지하였다. 절충안으로 대비전에 고해 검소하게 이를 허락하였으니(敎曰: ‘三年喪畢, 則夫人不得長在墓所, 且守墳者皆散, 凡祭祀等事, 無寄處, 故創建齋菴耳, 不至大擧耳) 재실의 성격으로 흥복사(興福寺)가 현재의 사당 서쪽 100여m 되는 곳에 지어졌던 것이다(현재는 밭과 묘지).

남편 기리는 절 지어 자주 간다고 눈 부라린 사관들 절이 지어진 후 부인 박씨는 자주 이 절을 찾아 대군의 명복을 빌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후세의 사관(史官)들 눈길엔 과수댁이 절에 자주 간다고 색안경을 쓰고 본 것이 행간으로 읽혀진다. 유교 사회 조선에서 불교를 따르는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네거티브(Negative)는 음험하기 이를 데 없구나. 지금도 절터에는 무수히 많은 초석과 기와가 흩어져 있다. 승평부부인 박씨의 숨결이 남아 있는 것일까? 햇볕 아래 초석은 따스하다. 농막 옆에는 고졸한 비석받침 귀부(龜趺)가 있는데 비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부인도 세상을 떠나고 대군의 자손들도 살기 어렵게 되자 흥복사는 언젠가 사라져 버리고 그 초석 일부는 대군의 사당 초석이 되었다. 사당을 내려와 길을 건너면 원당 방향 100여m 되는 곳에 고양 피프틴(Fifteen) 자전거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이 표지판 안쪽 길 외곽순환도로 밑으로 100m 나아가면 월산대군신도비 안내판이 있고 그 위에 대군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앞에는 대군이, 뒤에는 부인 승평부부인 박씨가 잠들어 계신다. 마음 비우고 살다가 36세에 돌아간 대군, 조카 연산군에게 욕보임을 당하고 임신하여 음독했다고 실록에 기록된 부인, 모두 지금은 편히 잠들어 계신지? 산 자의 임무 중 하나는 죽은 자의 억울함이 있으면 밝혀야 하는데 앎이 짧은 나는 부인을 변호해 드리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다만 정황을 다시 살피는 것이 한계이다. 연산군일기 12년(1506년) 7월조를 읽는다.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月山大君婷妻昇平府夫人朴氏卒. 人言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 이 때 연산군의 나이 31세, 부인의 나이 52세였다. 부인은 월산대군과 24년 부부생활 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자식도 두지 못하였다. 대군의 두 아들은 모두 소실의 배를 빌린 것이다. 그랬던 52세의 부인이 잉태를…. 더구나 연산은 젊은 미인 속에서 살았는데 어머니처럼 따르던 52세의 큰어머니를…. 사관은 자신이 말을 하지 않고 소문을 빌려 ‘~하더라’로 의혹을 키운다. 음모의 냄새는 묘소 코앞을 지나는 고속도로의 매연처럼 아직도 짙구나. 고이 잠드소서.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 4번 출구 ~ 금촌 방향 버스 환승 ~ 관산동 주공아파트 하차. 걷기 코스 고양외고 ~ 부처골 ~ 장령산/신미산 ~ 고양외고 ~ 공릉천 ~ 송강마을 ~ 월산대군사당 ~ 흥복사터 ~ 월산대군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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