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호 박현준⁄ 2013.05.20 13:53:57
종묘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이다. 중국에서 전래됐지만 우리 것이 된 지 이미 2000년 가까이 됐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비롯된 종묘제도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전래됐다. 고구려 고국양왕 9년(392년)의 기록이 처음이며 신라와 고려에서도 종묘제도가 시행됐다. 조선에서는 나라의 대사로 치러져 지금까지 600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의 종묘제향은 명맥이 끊겼지만 한국의 종묘는 우리만의 문화로 발전했다. 그러나 문화는 어느 날 하늘아래서 갑자기 떨어질 수는 없다. 이웃과 이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새롭게 형성된다. 종묘 문화도 작게는 한국사, 범위를 넓히면 동아시아사, 크게는 세계사의 흐름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문화 유산인 종묘의 문화를 세계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구적 관점이고, 하나는 동양적 관점이다. 동양적 관점, 한국적 관점을 쉽게 볼 수 있는 게 세계지도다. 우리가 흔히 보는 지도는 태평양이 중심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 중심이다. 유럽의 영국은 중심에서 먼 변방이다. 그런데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문화는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세계문명의 서진이다. 그들이 보는 세계지도는 대서양이 중심에 있다. 지구촌의 시각으로 볼 때 선진국이 많은 서구에서는 대서양 지도를 생활화 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한국 일본을 극동(Far East)이라고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동쪽 끝의 변두리다. 극동에 있는 종묘의 문화. 서양인들은 과연 어느 정도 이해를 할까. 그들은 아마 지역의 독특한 문화로 여길 것이다. 종묘는 한국이라는 지역의 특수한 문화이다. 그런데 글로벌 시대에서 로컬의 특수한 문화는 세계적일 수 있다.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 문명의 발생을 봐야한다. 이동하는 서양문명 기원전 3000년쯤 4대 문명이 일어났다. 황하와 인더스강, 나일강,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4대 문명을 좁히면 이집트 문명과 황하 문명으로 나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문명과 유사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거리는 1500km에 불과하고, 인도는 중국과 거대한 파미르 고원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문명은 동쪽이 아닌 서쪽에 더 영향을 주었다. 로마인들이 ‘빛은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한 것은 인더스 문명을 의미한다.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도 인도인을 의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생각의 동쪽은 인도로 받아들여진다. 이집트 문명은 인더스,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으며 나일강에서 크게 꽃을 피운다. 이 문명은 크레타섬으로 이동하고, 다시 그리스-로마 문화로 더 크게 개화된다. 나아가 지중해 연안을 세계 최고의 문화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서유럽으로 이동한다. 이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더 큰 무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문명은 본능적으로 서진을 했다. 나일강은 비옥한 삼각주 덕분에 문명이 발생했지만 더 큰 내용물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명은 자연스럽게 더 넓은 지역인 크레타섬과 그리스로 무대가 옮겨졌다. 그런데 이지역도 드넓은 농경지대가 아니다. 곡물의 자급자족이 어려워 무역에 의존해 살아야 했다. 문명은 바다를 통해 더 넓은 지역에 이식되고, 더 발전됐다. 나일강에서 출발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포함하는 지중해 문화를 형성했다. 또 로마제국의 확산으로 문명은 야만지역인 서유럽을 개화시켰고, 마침내는 작은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다. 근대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상륙시켰다. 나일강에서 시작된 고대문명이 세계를 순화하면서 마침내 글로벌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처럼 서양문명은 수천 년에 걸쳐 이동을 계속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서구문명은 지구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됐다.
정착한 동양문명 그러나 4대 문명 중 하나인 황화문명, 즉 동양문명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명의 중심이 일정 지역에 머문 가운데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양상이었다. 황하 문명에서 시작된 동양문명의 중심축은 황허와 양쯔강 유역이었다. 위구르족의 신장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았고, 한국이나 일본으로도 중심축이 옮겨지지 않았다. 이는 드넓은 대지와 풍부한 물산 덕분이다. 광활한 영토에 많은 인구의 황허와 양쯔강은 자체로 큰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거대한 자양분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질 필요가 없었고, 옮길 곳도 없었다. 문명의 중심은 고정된 가운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베트남 등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길을 걸었다. 황하문명은 유교문화로 진화한다. 이 문화는 역시 중국에서 꽃이 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문화를 중국 이상으로 받아들여 키웠다. 중국이 청나라 지배, 문화혁명과 같은 근-현대의 소용돌이 속에 유교의 문화를 많이 파괴시킨 데 비해 우리나라는 제대로 보존을 하고 있다. 또 우리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대표적인 게 종묘와 종묘의례다. 세계사적 문명 흐름으로 볼 때 이미 지구는 글로벌 문화가 됐다. 서양 문화나 동양 문화라는 개념을 넘어섰다. 서구 문화가 지구촌을 돌려 한 문화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는 이동성이 특징이다. 동양의 정착 문화도 큰 범주로 보면 서구의 이동성 문화의 영향권에 편입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묘의 문화도 다시 중국으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이동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촌이 거대문화가 되었기에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과정에서 유교문화가 대부분 파괴됐다. 그들은 한국에서 종묘와 성균관 문화를 다시 수입해갔다. 그러나 이는 문화의 이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다. 그들의 문화 복원이라고 봐야 한다. 앞으로는 문명 중심의 이동보다는 사람의 이동이 예상된다. 종묘의 문화를 보러 세계인들이 한국에 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종묘문화는 영국의 왕실문화, 쿠바의 댄스문화, 미국의 흑인문화, 이집트의 고대문화 등과 같이 글로벌 문화 속의 특수한 로컬문화로 유지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로컬문화가 세계문화이기 때문이다. 종묘문화는 우리의 고유문화이되, 세계인의 문화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종묘문화는 한국만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계인이 지키고, 호흡해야 하는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600년 동안 지속돼온 국가적 거대규모의 전통제례는 종묘 외에는 없다. 세계인에게 한국의 특수한 로컬문화는 매력이 넘칠 수밖에 없다.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우리나라는 큰 자원국이라고 할 수 있다. -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