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서울에서 이곳만큼 역사의 숨결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산이 또 있을까? 높이라야 287m의 나지막하고 평평한 마을 뒷산, 누구나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가까운 산이다. 그러기에 산행하는 이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지고 이곳 가까이 사는 이들의 뒷동산 산보 길로 더 애용하고 있는 산, 너무 가깝고 쉬워서 그 가치를 잊고 사는 산, 필자에게는 아차산이 이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요즈음 사람들은 아차산이라 하면 워커힐 뒷산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달랐다. 우선 서울(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볼 때, 안으로 둘러싼 네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해 북악, 인왕, 목멱(남산), 타락(낙산)을 꼽았고 그 바깥쪽으로 둘러싼 네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해 북한, 덕양(행주산성), 관악, 아차를 꼽았다. 그러니 아차산은 서울을 호위하는 동쪽 외사산인 것이다. 이때의 아차산은 현재의 아차산은 물론 용마산, 망우산, 신내동의 봉화산까지 포함하는 긴 산줄기를 의미했다. 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봉수(烽燧)조를 보면 아차산봉수(峨嵯山烽燧)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신내동 봉화산(6호선 봉화산역)에 있던 봉수를 일컫는다. 이 개념으로 보면 아차산 용마봉, 아차산 망우봉, 아차산 봉화뚝 정도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정리해야 아차산이 서울의 동쪽 줄기를 담당하고 있는 외사산으로 당당히 자리를 점할 수 있다. 수도 서울 동쪽줄기 대표적 외사산 오늘은 아차산 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에서 내린다. 출구를 나와 시내 방향(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광장초등학교를 만난다. 학교 담을 끼고 걷는다. 잠시 후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거북한 좁은 골목을 지나 한순간에 활짝 트인 ‘아차산 생태공원’과 만난다. 인공적이기는 하나 아름다운 공원을 가꾸어 놓았다.
생태공원을 지나 고갯마루에 오르면 좌측 언덕길 위 봉우리에 발굴 중인 2개의 보루가 있다. 홍련봉보루이다.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에서 발굴중인데 곧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출토품도 여러 가지가 나왔다 한다. 가장 기억할 만한 출토품으로는 절대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와당(瓦當; 기와편)이 나왔다는 점이다. 관(官)에서 만든 기와임을 알게 하는 관옹(官瓮)이란 명문이 새겨진 와당과 경자(庚子)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진 명문와당이 나옴으로써 서기 520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유했을 때 보루가 설치됐음을 더욱 분명히 했다. 보루를 내려와 고갯길을 잠시 내려가면 동의초등학교와 담을 이웃한 절 영화사(永華寺; 구 華陽寺)가 자리잡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서기672년(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한다. 이 시기는 의상대사가 당(唐)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종 사찰을 창건하던 시기였으니 누군가 이를 연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군자동에 있었는데 다시 중곡동으로 옮기고 190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그러다 보니 옮겨 모셔야 할 힘든 분도 계셨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좌측 길을 따라 아차산 방향 층계 길을 100여m 오르면 1947년에 지은 퇴락한 건물이 있다. 현판은 없으나 미륵전(彌勒殿)이다. 그 안에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미륵불입상(立像)이 서 있다. 예술적 조형미보다는 신앙적 특징이 강한 입상이다. 키가 4m 가까이 되는 이 미륵불을 중곡동 옛터로부터 모셔 와야 했으니 얼마나 큰 역사(役事)였겠는가? 그 때 동원된 우마차의 소들은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다행히 힘든 과정을 거쳐 새로 집짓고 이곳에 모셨다. 그런데 아마도 키를 잘 못 잰 모양이다. 미륵불님 머리가 천장에 닿을 지경이어서 둥근 모자(圓笠)는 쓰시지 못하고 그 모자는 미륵전 앞 산기슭에 솥뚜껑처럼 놓여 있다. 미륵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아무런 설명도 없다. 곰곰 살펴보면 얼굴(相好)은 달라도 옷 입은 스타일은 눈에 익는다. 파주 용미리 쌍불(雙佛)입상과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 윗옷(袈裟)은 양쪽 어깨를 덮고(通肩) 속옷의 흘러내린 모양은 U자 모양인데다가 하의(裙衣)의 끈을 앞으로 맨 매듭의 모양새는 같은 사람이 맨 듯이 용미리 쌍불과 흡사하다. 아마도 같은 시대(麗末鮮初)에 조성됐거나 이에 영향을 받아 조성한 미륵불인 듯하다. 화강암 위에 호분(胡粉)으로 희게 칠한 색이 여전히 남아 있어 홍제동 옥천암 백불(白佛)이나 안암동 보타사 미륵불의 흰 얼굴을 만난 듯하다. 거기에다가 눈썹도 짙게 그려 놓고 입술도 불타는 듯 빨갛게 칠을 해 놓아 마치 장밋빛 루즈를 바른 듯하다. 근세에 석회로 조성한 불상을 치장(莊嚴)하듯 해 놓았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영화사에 얽힌 추억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손가락이 많이 닳아 있는 점이다. 아니 석불께서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셨길래 손가락이 닳았단 말인가. 더듬어 보면 못 말리는 조선 어머니들의 아들 낳고 싶은 마음(祈子信仰)의 결과물이다. 부처님의 코를 갈아 가루약 드시듯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신념에 미륵불님 코를 베러 갔건만 키가 4m 가까이 되는 미륵불님 코 한 번 만져 보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어찌 그냥 돌아오리. 코 대신 손가락이라도… 미륵불님의 손모양(手印)을 보니 왼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오른 손은 내려 손바닥을 보이는 손모양을 하고 계신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좌우만 바뀌었지 동일한 손모양이다. 손바닥을 다 보였으니 중생에게 감출 것이 없으신 모양이다. 불상 공부하는 이들은 이런 손모양을 여원인(與願印)이라 한다. 노랫말로 그 뜻을 풀어 보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이다. 한 마음으로 서원(誓願)하면 모두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그런가 시험 때가 다가오면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러 온다. 혹시 헛된 꿈이 아니라면 내 마음 바라는 바가 간절한 날 들려 보시기를. 아마도 당신께서 손 모양으로 하신 약속 지켜 주시지 않을런지.
미륵전에서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온다. 영화사에 오면 또 한 곳 들려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삼성각(三聖閣)이다. 절의 삼성각은 석가여래의 가르침과는 관련이 없는 전각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절 살림이 피폐하여 절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민간신앙에서 모시던 이른바 영험(靈驗)한 분들을 절에서 받아 들였다. 살아남기 위해 휴전(fusion)화한 몸부림의 산물인 것이다. 당장 하루하루 목숨 부지하기 바쁜 민초들에게 마음 닦고 수행하는 일이 어찌 마음에 와 닿았겠는가. 작은 복이라도 빨리 받아서 살아남는 일이 급선무였으니. 이렇게 해서 절에 와서 살게 된 세 분이 계시니 삼성(三聖)이시다. 도교에서 모시던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님(七星), 그 자락에 의지하고 살게 해 주시는 뒷산 산신령님(山神靈), 혼자 깨우쳐서 고생길에서 벗어난 독성님(獨聖). 이렇게 세 분이 절로 와 따로따로 집짓고 살기도 하고 한 집에 살기도 했으니 한 집에 세 분이 사시는 전각이 삼성각(三聖閣)이다. 영화사 삼성각에는 소중한 독성 탱화(幀畵)가 있다. 1880년 상궁 李씨등이 발원해 그린 탱화인데 당대 최고의 금어(金魚: 불화 화가) 한봉창엽(漢峰瑲曄)이 그린 것이다. 우리의 무심함과 6.25를 거치는 동안 소중한 불화들이 많이 소실됐는데 그나마 당대 최고 금어 중 한 사람인 한봉창엽의 불화가 봉은사, 흥국사(수락산), 불암사, 보광사(광탄), 안심사(청원) 등과 함께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제 영화사를 나선다. 절 마당에는 초파일등이 하늘을 덮고 있다. 이 등(燈) 같이 온 세상을 밝히소서.
내려왔던 언덕길을 거슬러 홍련봉 앞 고갯마루로 돌아오면 아차산성으로 향하는 산책길 같은 등산로가 있다. 이곳에서 아차산성까지는 500m 정도의 느리게 오르는 산길이다. 지자체가 길도 정비하고 이정표도 정비해 놓아 편리하다. 잠시 후 아차산성에 닿는다. 성돌(城石)이 가지런하다. 아차산성을 설명하는 요약된 안내판도 있고 이곳에서 출토된 대표적 유물사진판도 세워 놓았다. 토기류, 와당(瓦當), 쇠세발솥 등이 눈길을 끈다. 가장 특이한 것은 토기인물상인데 조두관(鳥頭冠)을 썼는지 헤어스타일을 그리했는지 머리 앞 부분을 위로 크게 올렸다. 상당히 이국적이다. 설명 판에 의하면 둘레 1km 남짓 포고식 산성이라 하고 성벽 높이 7m 정도이며 동, 서, 남 세 방향에 문지(門址)가 있다 한다. 북쪽 가장 높은 곳 고도가 203m인데 장대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 한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유규를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뺏고 빼기는 삼국시대 최후의 보루 아차산(阿且山, 阿旦山, 峨嵯山)과 아차산성, 삼국(三國) 역사에서 가장 다이내믹했던 첨예한 전장(戰場)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곳에서 떨어져 간 두 별(星)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은 백제 20대 개로왕(蓋鹵王)이며 또 한 사람은 평강공주의 지아비 온달(溫達)장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조를 보자.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공포에 떨고 왕은 탈출했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은 뒤 죄목을 따진 다음 결박하여 아차산 아래로 보내 죽였다. (高句麗 對盧 齊于. 再曾桀婁.古쭕萬年等 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 桀婁等 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阿旦城)下 戕之 )”
백제 개로왕은 TV사극에 출연한 일이 없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사서(史書)를 읽는 이들에게는 대부분 무능한 임금의 대명사로 또는 나쁜 임금으로 매도되고 있는 임금이다. 그 이유는 모두 삼국사기에서 비롯된다. 임금은 바둑을 좋아했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은 이것을 이용해 백제를 피폐하게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파견된 고구려 첩자가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인데 왕의 바둑파트너를 하면서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해 재정이 고갈되고 백성의 원성이 심해 결국은 고구려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 억울한 일이 전대(前代) 임금 중에 4대 개루왕(蓋婁王)이란 이가 있었는데 이 양반이 호색해 백성 도미(都彌)의 부인을 탐한 나머지 도미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한 일이 있었다.(삼국사기 열전) 이름이 비슷하다 보니 개로왕은 때때로 개루왕의 누명까지 뒤집어 써 죽어서도 이래저래 무능하고 극악한 임금으로 떠오르게 됐다. 개로왕(蓋鹵王)은 과연 그런 임금이었을까. 이야기를 100여년 전 371년 13대 근초고왕 26년으로 돌아가 보자. 국력이 왕성하던 백제는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더 나아가 남평양(현 서울지역)을 빼앗아 한성(漢城; 현 서울지역)에 도읍한다. 이렇게 하기를 105년을 지냈다.(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이러니 후손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할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개로왕은 성을 수축하고(쌍현성) 목책을 설치(청목령)해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고구려 남부를 공략하기도 했다. 한편 하남 위례성의 치수와 방어를 위해 하천을 정비하고 울타리를 세우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게다가 외교적으로 중국 북방의 강자 북위(北魏)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 견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위로부터 친서의 내용을 알게 된 고구려는 더욱 백제 응징에 이를 갈았다. 드디어 475년 9월 장수왕은 친히 3만 군대를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 왔다. 이때 개로왕이 취한 태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선조나 인조처럼 또 이승만 대통령처럼 줄행랑을 쳤을까? 최후의 전장을 끝까지 지킨 개로왕의 추억 삼국사기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후사를 맡기고 최후까지 전장에 남는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계통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蓋避難以續國系焉?)” 개로왕은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제는 개로왕을 올바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영웅은 아니더라도 죽음으로써 수도를 지키려 했고 나라의 장래를 이으려 했던 임금, 이만하면 괜찮은 임금 아니겠는가? 이 산성 아래 어딘가에서 목이 잘렸을 한 임금의 아픈 역사는 흐드러지게 핀 철죽꽃 속에 흩어져 날아간다. 아차산성에서 능선 길 잠시 나아가면 낙타고개라는 이름의 고개를 만난다. 앞길은 약간 오르막인데 잠시 뒤 무덤을 사이에 두고 길은 갈린다. 좌측 길은 본격적으로 아차산 보루(堡壘)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고 우측 길은 대성암(大聖庵, 옛이름 梵窟寺)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산길이다. 대성암 길로 접어들자. 길은 산을 에둘러 가는데 진달래 철에는 진달래, 철쭉 철에는 철쭉이 날만한 길이다.
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의 눈물 잠시 1km여 나아가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은 그대로 대성암으로 이어지고 우측은 는 동쪽 구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온달샘’이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누군가 플러스펜으로 보리밥 300m라고 적어 놓았다. 온달샘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곧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우미내’와 ‘고구려대장간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에서 워커힐 지나 구리로 접어들면 아차산 아래 첫 마을이 우미내 마을이다. 지도를 만들면서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우미천(牛尾川)이 된 마을이다. 우미내 안내판에서 언덕길을 300m쯤 내려가면 길이 두갈 래로 나누어지는데 우측 길로 접어들면 숲 가운데 포장으로 꾸민 간이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아차산 노인정이며 바로 그 아래 샘물이 ‘온달샘’이다. 온달샘 주변은 이미 배드민튼장을 비롯한 운동시설로 가득 차 있다. 다행히 온달샘 앞 계곡가에 다 부서져 형태를 알아볼 수없는 고려시대 탑(塔)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주위를 살펴 보면 깨진 기왓장이 보인다. 이곳이 고려시대 절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미 그 흔적은 운동시설이 자리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차산 동쪽 산기슭에 두 개의 절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俱在峨嵯山東麓). 은석사(銀石寺)와 범굴사(梵窟寺)이다. 범굴사야 지금의 대성암임이 분명하니 더 이상 궁금증을 가질 이유는 없으나 사라진 은석사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온달샘 절터를 비롯해 이제 찾아가는 절터 중에 은석사가 있을 것인데 기록이나 명문(銘文)을 찾지 못했으니 은석사는 궁금증 속에 싸여 있다. 조선초 문신이며 학자인 서거정은 이곳에 와서 시 한 수 읊었다. 長江一帶抱澄澄 江上靑山矗百層 寺在虛無連翠覇 行穿□确挽鳥藤 ............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등덩굴 잡는다. ..........) 그 때나 지금이나 내려다 보는 한강은 길고 푸르다. 온달샘을 떠나 지나온 갈림길로 다시 돌아간다. 길은 계곡 쪽으로 이어진다. 아래 계곡에는 진달래샘이 있는데 이곳으로 가는 길옆에 재미있는 바위들이 놓여 있다. 길가던 어느 부인이 친절하게 이름을 일러 준다. 이른바 온달주먹바위, 평강공주바위, 투구바위이다. 온달주먹바위의 모양은 정말로 주먹 같고 평강공주바위의 뒤태는 어찌 이리도 섹시한지 모르겠다. 사람들 마음에 아차산성에서 전사한 온달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계속) 교통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지하철 ~ 아차산생태공원 ~ 홍련봉보루 ~ 영화사 ~ 아차산성 ~ 온달샘절터 ~ 진달래샘절터 ~ 큰바위얼굴 ~ 석실고분 ~ 대성암 ~ 절터1 ~ 삼층탑/절터2 ~ 절터3 ~ 아차산 4보루 ~ 망우봉1보루 ~ 관룡탑/화관암터 ~ 효빈묘 ~ 대원사터 ~ 한다리마을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