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331호 박현준⁄ 2013.06.17 11:48:31
오늘은 강화의 장(場)날이다. 전국에 사라져 가던 5일 장날을 지자체에서 살려 나가면서 장날에 맞추어 답사 길을 잡는 것도 또한 즐거움이다. 강화 장날은 2일과 7일이다. 곧 2일, 12일, 22일, 7일, 17일, 27일 장날이 열린다. 답사의 즐거움 중 하나는 평소에 자주 해 보지 못하던 ‘느리게 살기’를 해 보는 것이다. 이런 날은 굳이 차를 몰고 가는 호사(豪奢)는 아예 놓아두는 게 좋다. 강화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김포 옛 동네를 여기저기 둘러 강화터미널에 데려다 준다. 터미널 뒤편 풍물시장에는 한바탕 장이 열렸다. 어화, 살판나는구나. 그래도 잠시 미뤄두고 오늘의 목적지 하점면(河岾面)으로 향하는 버스 승강장으로 간다. 잠시, 승강장으로 가기 전 터미널안내소에 들려 말만 잘 붙이면 프린트된 ‘강화시내(군내) 버스시간표’를 얻을 수 있다. 이 표 한 장이면 한 1년 강화답사에 가장 요긴한 자료가 된다. 하점면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30번, 32번인데 서울시내 버스 타듯 하는 조바심은 아예 버리는 것이 좋다. 한 30분 기다릴 요량으로 느긋하게 마음먹으시라. 필자는 강화나들이 갈 때면 항상 마음먹는다. 그 동안 깊이 물들었던 ‘촉새병’을 오늘은 치유하러 가는 날이라고. 오늘은 운수가 좋다. 20분 기다리니 버스 출발이다. 버스는 48번 국도를 부리나케 달린다. 옛 한양에서 양천 김포 통진 지나 강화 관아에 이르고 이윽고 교동(喬洞)으로 넘어 가는 길인데 강화성(江華城) 서문(西門) 지나 고개 넘는 길부터는, 아~ 눈물의 길이었다. 안평대군이 형 수양대군에게 밀려 이 길을 지나갔다. 이 길 끝 인화진(寅火鎭) 인진나루를 건너 교동으로 들어간 뒤 영영 살아서 돌아 올 수 없었다. 연산군도 그랬고, 비운의 세자 광해군의 아들 부부도 이 길을 지나간 뒤 교동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영창대군도 9살 어린 나이에 이 길을 지난 뒤 살아서 돌아 올 수 없었다. 그 옛날 유배의 길을 버스는 무정하게 내달려 10분 만에 ‘고인돌 공원’ 앞에 내려 준다. 강화는 화순, 고창과 함께 고인돌의 고장이다. 지구상에는 고인돌이 6만여 기(基)가 분포되어 있다는데 그 중 4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실로 고인돌의 나라이다. 강화에는 대체로 16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곳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공원에는 남한에서 가장 거대하면서 잘 생긴 고인돌이 있다. 이름도 당당하게 ‘강화지석묘(고인돌)’라고 부른다.
교동고개, 비운의 황태자 눈물 어린 ‘유배의 길’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인데 무게가 자그마치 75톤이나 되는 사적 137호의 걸작품이다. 강화의 고인돌은 고려산 북쪽에서 봉천산 남쪽, 별립산 동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하점면과 내가면에 주로 분포한다. 강화도의 고인돌 70기는 화순, 고창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고인돌공원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가 서 있다. 근래에 세운 것인데 강화에는 연개소문의 출생지가 강화도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산 북쪽 줄기 낮은 봉우리 시리미산에서 태어나 고려산의 오정(五井: 五蓮池)와 치마대(馳馬臺)에서 말달리고 수련했다는 믿음이 있어 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유적비이다. 잊혀져가는 고구려의 큰 장군 연개소문도 기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잠시 삼국사기를 더듬어 보면 연개소문과 관련해 분통터지는 일이 남아 있다. 열전(列傳)에 연개소문 편이 있는데 이상한 기록이 있다. ‘개소문: 성은 천(泉)씨이다.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혹하게 했다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연개소문의 성을 천(泉)씨라고 쓴 것이다. 왜 멀쩡한 연(淵)씨를 천(泉)씨로 바꾸는 성폭행(姓暴行)(?)이 일어난 것일까?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아버지 고조의 이름은 이연(李淵)이었다. 이 시대에는 기휘(忌諱)라는 것이 있어서 높은 이의 이름 자(字)는 감히 아랫것이 범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 옛날 당나라 임금 이연(李淵)의 이름을 기휘해 이 땅의 옛 장군 연개소문을 천(泉)씨로 바꾸어 기록했던 것이다. 더 기막힌 사실이 있다. 연개소문의 큰 아들 연남생(淵南生)은 동생들과 권력다툼에서 밀리자 조국을 배반하고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 공격에 앞장섰다. 셋째 아들 연남산(淵南産)은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자 항복하고 당나라에 벼슬을 살았다. 이들의 묘지명(墓誌銘)이 낙양에서 발견됐는데 그들의 이름은 천남생(泉南生), 천남산(泉南産)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속담에 장담할 때 ‘손에 장(醬)을 지진다’고 한다. 더 장담할 때는 ‘성(姓)을 바꾼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려고 성(姓)을 바꾼 고구려의 두 장수를 보면서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구나. 유적비 아래쪽으로는 세련된 건물의 강화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美 함대에 맞선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육탄방어 강화군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 1층 로비에는 눈여겨 볼 전시물이 있다. 수자기(帥字旗)이다. 재현품인데 충분한 관람 가치가 있다. 미국 해사박물관으로부터 장기임대 형식으로 반환받은 것의 사본이다. 이 기(旗)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1871년 8월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5년 전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號)’에 대한 책임규명과 개항을 목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이 때 광성진을 지키던 어재연, 어재순 두 형제 장수를 비롯해 군관, 사졸 등 많은 이들이 전사했다. 그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미군의 함포와 현대무기에 육탄으로 맞선 것이다. 항복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조선군 앞에 미군도 당황했다. 이 날의 전투 기록이 고종 실록(1871년, 고종8년)에 남아 있다. “이양선에서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의 조총은 우박처럼 떨어졌습니다. 좌우로 적을 맞는데 우리 군사들은 막아내지 못하여 선두 부대가 곧 패하게 되었고, 뒤의 부대도 이어 패하였습니다(異船大砲飛如雨注, 陸賊鳥銃亂如雹下。 左右受賊, 我軍不能抵當, 先軍乍潰, 後軍繼北)” 이렇게 죽어간 무명전사의 대부분은 강계지방의 호랑이 잡던 포수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부식이나 연남생, 연남산에 비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들인가. 불행히도 신원을 확인할 수조차 없이 훼손된 이들 무명용사 51명의 시신은 7기의 무덤에 합장되어 그들이 죽어간 광성보에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란 이름으로 잠들어 계신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수(將帥) 깃발은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챙겨갔는데 136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공원‘ 나서면 연개소문 출생지 박물관을 나와 북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줄기가 보인다. 왼쪽 제일 높은 봉우리가 봉천산(奉天山)이다. 건물 뒤편(북쪽)으로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밖으로는 정비된 수로(水路)가 있다. 수로 수문(水門) 옆으로는 수로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길은 시멘트포장길로 이어진다. 대략 10분 걸어 포장길이 끝날 즈음 2차선 포장도로에 닿는다. 버스정류장에 도간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400m 나아가면 ‘보물 615호 석조여래입상 600m’를 알리는 안내판에 화살표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다. 조용한 마을길 들어서면 잠시 후부터 숲길이 이어지면서 600m 지점에 당집(堂집)처럼 자리잡은 석상각(石像閣)을 만난다. 석상각 안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서 계시다. 안내판에는 11세기 고려 석불이라 하니 1000년 가까이 서서 당신을 찾아오는 중생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당집 같은 건물의 구조나 불상이 자리한 전각을 석상각(石像閣)이라 이름 붙인 것이나 목책이 촘촘히 세워진 곳에 있는 불상(佛像)이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사진을 찍었더니 마치 나무창(槍)살 안에 갇혀 계신 여래입상을 대하는 듯하다. 더구나 석상각 편액에는 석상각전기(石像閣傳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음 봉씨(河陰 奉氏) 시조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전각 뒤로는 하음 봉씨의 시조인 하음백(河陰伯) 봉우(奉佑) 공(公)의 묘소가 있다. 그러면 하음(河陰)은 어떤 땅이며 하음 봉씨의 시조는 어떤 이인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하음(河陰) 땅을 살펴보자. “하음현은 본래 고구려의 동음내현인데, 신라가 호음으로 고쳐서 모두 해구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이내 강화 임내에 속하게 하였다. (河陰縣, 本高句麗冬音柰縣, 新羅改名沍陰, 皆爲海口郡領縣, 高麗改今名, 仍屬江華任內)” 또, “서기 940년(태조23년)에 비로소 땅이름을 강화라 명명하고 현(縣)의 수령을 현령(縣令)이라 하고 현령 아래 속현을 셋을 두었으니 진강(鎭江), 하음(河陰), 교동(橋桐)이다.” 즉 태조 왕건 23년(940년)에 이 땅을 강화라고 하고 본섬의 북쪽을 하음(河陰), 남쪽을 진강(鎭江), 서쪽 섬을 교동(橋桐)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땅 이름은 하점(河岾)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하음, 간점(艮岾), 내가(內家) 일부를 묶어 하점 이라 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래로 하음을 본관으로 하는 성(姓)씨들이 있다. 李, 田, 秦(또는 奉), 吉, 力(또는 萬), 鄭씨이다. 이 가운데 유명한 성씨가 하음 봉(奉)씨이다. 탄생 설화가 재미있다. 이 이야기는 답사 끝 무렵 봉가지(奉哥池)에 들려 마무리해야겠다. 어느 때인가는 절터였을 석상각 주변에 많은 기와파편을 밟고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시멘트길, 오른쪽은 돌길이다. 시멘트길로 방향을 잡자 이내 시멘트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든다. 주변에는 어느 집안의 납골묘들이 여러 기(基) 자리잡고 있다. 무덤을 지나면 이내 등산로 지능선(支稜線)을 만난다. 오른쪽 산길을 오르자. 1km여 산길을 오르면 주능선(主稜線)에 닿는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식힌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500여m 진행하면 잠시 오르막길 지나 이내 넓은 평탄지가 펼쳐지는 봉천산(奉天山) 정상부에 닿는다. 옛 이름은 (하음)성산(河陰城山), 하음산, 또는 봉두산(鳳頭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봉두산은 즉 하음성산인데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鳳頭山 卽 河音城山在府北十六里)’고 기록했다. 291m의 나지막한 산이나 숲이 우거지고 정상부가 넓어 큰 산에 오른 것 같다. 북녘 땅이 코앞이다. 개성의 송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팔각으로 지은 봉천정(奉天亭)도 자리 잡고 있고 산불감시초소도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나옹선사의 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를 써 붙여 놓았다. 오른쪽으로는 별립산, 앞으로는 고려산이 마주 보고 있다. 둘러싼 산과 바다를 보고는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고’싶은가 보다. 넓은 정상부 평탄지에는 무수히 많은 기와편이 밟힌다. 이 넓은 평탄지에 밟히는 기와편을 볼 때 이곳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을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동국여지승람, 강도지(江都志), 강화부지(江華府誌)에는 하음성산(河陰城山) 봉수와 하음신사(河陰神祠)의 기록이 나타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하음성산봉수(봉천산 봉수)는 동쪽으로는 송악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교동현 화개산에 응한다고(東應松岳山 西應喬桐 華蓋山)했다. 약 350년 뒤 조선 후기 기록인 강도지(江都志)에는 동쪽 송악산 봉수가 남산(南山)봉수로 바뀌어 있다(東傳本府南山). 이 곳 봉수로는 여수 돌산도에서 출발하여 서남해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남산)에 이르는 제5봉수로가 지나가던 길이었다. 하음신사(河陰神祠: 봉천산신사)도 여지승람에는 성산에 있다(在城山)고 했으나 350여 년이 지난 조선후기에는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河陰神祠在河陰 今廢). 이렇듯 하음산(봉천산) 정상에 있었던 신사와 봉수대 관련건물(봉수군들의 거주 공간)이 지금은 없어졌다. 이 때 얹었던 기와들이 부서져 발아래 밟히는 것이리라. 세월 앞에 온전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정상 남쪽으로는 돌을 사다리꼴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올린 봉천대(奉天臺)가 있다. 설명판에는 강도지(江都志)를 빌어 축희소(祝釐所: 길함을 기원하는 곳)의 모습이라 하고 고려 때 나라의 제천의식을 행하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떤 자료에는 고려 때에는 축희소로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는 봉화대로 사용했다는 설명도 있다.
태조 왕건 때 명명된 강화, 하음 봉씨 유래 아마도 아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봉천산에 신사(神祠)와 봉수대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으니 봉수대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봉수대는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5개가 필요했는데 이 봉천대 하나로는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산 정상에는 소나무 숲도 잘 조성되어 있다. 그 곳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하산로로 가장 좋은 코스는 봉천대 남쪽 길 하점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길을 포기한다. 5층 석탑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다.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간다. 정상에서 잠시 내려서면 능선길이 시작되는 곳 오른쪽으로 잘 닦인 하산로가 보인다. 일단 이 길로 접어들면 길은 외길이라 쉽게 내려간다. 약 500여m 내려오면 강화도의 공동묘지 구간이다. 강화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면 묻힐 수 있다는데 별로 묘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화장(火葬)문화가 일반화되어 가는 것 같다. 다시 500여m 내려가면 민묘가 나타나면서 오른쪽 아래쪽으로 단아한 5층 석탑(보물 10호)이 숲 사이로 보인다. 예전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고종 때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로 개성에 세웠던 봉은사(奉恩寺)를 그리워하여 이곳에 봉은사를 다시 지었다 한다(奉恩寺 高麗高宗 甲午所建). 이제 절의 흔적은 탑으로만 남고 주변에는 옛 기와편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다. 아마도 이 탑과 앞서 만난 석조여래입상은 봉은사가 남긴 흔적이리라. 이제 마을길로 내려간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조그만 하음성당을 만난다. 봉천산 기슭의 5층 석탑, 개성의 봉은사 그리워하다 이곳 지나 조금 내려가면 잠시 후 옛 교동으로 이어지는 48번 국도와 만나면서 하점우체국이 있다. 다시 읍내 방향(동쪽)으로 100m 나아간다. ‘남문석재’라는 석재공장을 만나고 석재공장 뒤편 도로공사 중인 논바닥에 ‘봉가지(奉哥池: 향토유적 25호)’라는 물웅덩이가 있다. 하음봉씨 시조 하음백 봉우(河陰伯 奉佑) 공(公)이 태어났다는 전설의 연못이다. 봉씨 집안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초 봉씨의 맨 처음 조상이 연못에서 나올 때에 용이 솟아오르고 천둥이 크게 치며 비가 많이 내려서 순식간에 그 땅이 연못으로 변해버렸다. 연못 가운데에서 궤짝 하나가 물에 떠올랐다. 한 노파가 그 궤짝을 열고 안을 살펴보니 한 어린 아이(河陰 龍兒)가 있었는데, 모습이 매우 늠름하고 씩씩해서 두 손으로 받들어 거두었다. 그를 거두어 기르고 마침내 받든다는 뜻으로 ‘봉(奉)’자를 성씨로 삼았다.” 이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제 강화장터로 돌아가 보아야겠다. 평소 못 보던 산나물도 만나고 순무김치도 사 보아야겠다. 풍물시장 2층에는 오늘도 풍성한 먹거리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겠지.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신촌, 홍대앞 3000번/영등포, 송정역 88번/ 일산 96번/ 부평 90번 ~ 강화터미날, 환승 30번/ 32번 ~ 하점면 고인돌공원 하차 걷기 코스 고인돌공원 ~ 연개소문 유적비 ~ 강화역사박물관 ~ 하점면 석조여래입상 ~ 봉천산 정상/봉천대 ~ 5층 석탑 ~ 봉가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